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정환직, 정용기 산남의진비

유형
비석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창구동 1-1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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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정환직(1843 - 1907)은 대한제국기 의금부 금부도사, 중추원의관 등을 역임한 의병장이다. 1888년(고종 25) 의금부의 금부도사를 지냈으며, 1894년 삼남참오령(三南參伍領)에 임명되어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해 겨울 다시 토포사(討捕使)에 임명되어 고종의 밀지를 받고 황해도 지방의 동학군을 진압하였다. 그 공으로 태의원시종관(太醫院侍從官)이 되었다. 1899년 삼남검찰 겸 토포사(三南檢察兼討捕使)로 삼남 일대의 민정을 두루 살펴보았다. 1900년 도찰사에 임명되어 농민들의 원성이 높은 경주부윤을 파면하다 오히려 봉세관(俸稅官)에 의해 구금되었다. 석방된 뒤 관직에 뜻이 없어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다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에 제수되었다. 1905년 일제의 강권에 의해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이 정환직에게 밀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할 것을 권하였다. 그 뒤 관직을 사직하고 아들 정용기(鄭鏞基)로 하여금, 고향에 내려가 의병을 모집하게 한 뒤 서울로 진격하여 황제를 구하고 국권을 회복하도록 하였다. 정용기가 청송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석방된 뒤 의병활동이 부진하므로 이를 독려하고자 1907년 9월 19일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 해 10월 7일 정용기가 입암에서 영천수비대소속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총탄에 맞아 순절하자, 정순기(鄭純基)·이세기(李世紀)·우재룡(禹在龍) 등의 추대를 받아 삼남의병부대 의병장에 올랐다. 그 뒤 군세가 크게 떨치기 시작하자 여세를 몰아 동쪽으로 포항 등지, 서쪽으로 신령 등지, 북쪽으로 청송 등지를 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전투 중 사상 당하는 의병이 속출하자 전의가 크게 떨어져, 이에 의병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각지에 소모군을 파견,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와 함께 무기와 탄약·군량 등을 준비하며, 국민들의 반일투쟁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전념하였다. 이 때 병이 들어 신병을 치료하다 일본군 수비대에게 잡혔다. 일본군이 회유하고자 하였으나 끝까지 반일의 뜻을 굽히지 않다 총살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정용기(1862 - 1907)는 한말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의병장으로, 아버지 정환직과 함께 산남의진을 결성하였다. 정용기는 국채 보상 운동을 위한 ‘단연회통문(斷煙會通文)’ 및 ‘의연금권고가(義捐金勸告歌)’와 정계의 부패를 비난하는 6개 조항을 들어 투서하였다. 그 외에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정 행위를 탄핵한 ‘통곡조한국민(痛哭弔韓國民)’이란 글월 및 순절한 민영환(閔泳煥)을 추도하는 ‘혈죽가(血竹歌)’를 발표하고 격렬한 가두 연설을 전개해 대중의 각성과 단결을 환기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민중 계몽에 힘쓰던 중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은 부친 정환직(鄭煥直)과 영남에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고향인 영천으로 내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정순기(鄭純基) 등과 힘을 합쳐 통유문과 권고문을 작성하여 각지에 배포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이름하고 제1대 대장에 추대되었다. 정용기는 경주 우각리를 경유할 때 경주진위대의 간계로 체포되어 대구로 압송되었다가 아버지의 주선으로 석방된 후 1907년 4월 재차 거의하여 영덕의 신태호(申泰浩) 의병부대와 연락을 취하면서 영천·영일·청송 등지에서 일본군을 여러 차례 전투를 하였다. 1907년 8월 산남의진 본진 100여 명과 함께 죽장의 매현으로 들어가 9월 초 강릉으로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7년 9월 1일 입암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의 역습을 받아 격렬히 싸우다가 이한구(李韓久)·손영각(孫永珏)·권규섭(權奎燮)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탐방로그

본 비는 구한말 일본의 국권침탈에 대항하여 산남의진을 일으켰던 정환직, 정용기 양세 의병장의 공훈을 추모하고 구국충정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1963년 3월에 건립되었다. 현재 영천항일독립운동선양사업회가 관리하고 있다.

인물정보

성명
정용기
한자명
鄭鏞基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62 ~ 1907
본적
경상북도 영천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2

공적개요

1. 1905년 그의 부친 정환직(鄭煥直)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1907년 군중(群衆)의 추대(推戴)로 의병대장(義兵大將)이 되었음 2. 의병(義兵) 400명을 거느리고 청하(淸河), 청송(靑松) 등지에서 적병(敵兵) 4명을 격살(擊殺)하고 영천 자양면에서 적헌병(敵憲兵) 3명을 효수(梟首)하였음 3. 그 후 적(敵) 1인을 살해하고 1907.9.1 입암(立岩)으로 진격(進擊)하다가 적(敵)의 포격(砲擊)으로 인하여 전사(戰死)함

인물정보

성명
정환직
한자명
鄭煥直
운동계열
의병
생몰년도
1844 ~ 1907
본적
경상북도 영천
포상훈격
대통령장
포상년도
1963

공적개요

1. 전력(前歷) 금부도사(禁府都事),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순무영 참모관(巡撫營參謀官),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대의원전의(大醫院典醫), 삼남도검찰(三南都檢察), 삼남도찰사(三南都察使), 비서승 등(秘書丞等) 역임(歷任) 2. 1905년 그의 아들 용기(鏞基), 이한구(李韓久)등과 같이 흥해 청하(興海淸河) 동래 등지(東萊等地)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1906년에 환가(還家) 3. 1907년 그의 아들 용기(鏞基)의 전사에 분개(憤慨)하여 군졸을 규합 재차 의병을 일으키고 흥해(興海), 의흥 등지(義興等地)에서 활동함 4. 1907년9월3일 부하(部下) 약60명과 같이 청하분파소(淸河分派所)를 습격하여 한인 순검(韓人巡檢) 1명을 사살함 5. 1907년10월2일 부하(部下) 약150명으로 영천분파소(永川分派所)를 습격하여 보조원(補助員) 1명을 사살함 6. 1907년10월29일 조재술 등(曺在述等) 부하(部下) 약150명으로 흥해분파소(興海分派所)를 습격하는 동시에 우편취급소(郵便取扱所)에 방화하고 우편소장의 가족을 몰살시킴(일인(日人) 3명) 7. 1907년11월3일 신녕분파소(新寧分派所)를 습격하고 총기(銃器) 69여정을 탈취함 8. 1907년11월4일 의흥분파소(義興分派所)를 습격 소각하고 총기(銃器) 49정을 탈취함 9. 1907년11월8일 청송군(靑松郡) 유전(楡田)에서 일군(日軍)과 교전(交戰) 10. 1907년11월16일 부하(部下) 약200명으로 흥해분파소(興海分派所)를 습격 소각(燒却)하고 일인 순사(日人巡使) 한인 순검(韓人巡檢) 각 1명을 사실함 11. 1907년12월5일 영덕군(靈德郡) 주방(周防)에서 일군(日軍)과 교전(交戰) 12. 1907년12월7일 영덕분견대(靈德分遣隊) 습격 13. 1907년12월8일 청하군(淸河郡) 각전(角田)에서 일군(日軍)의 습격으로 부하이산(部下離散) 14. 1907년12월11일 청하산중(淸河山中)에서 일군(日軍)에 피체(被逮)되어 총살(銃殺)됨 (기려수필(騎驢隨筆) p139, 폭도편책(暴徒編冊) 8호, 10호, 10호의2, 30호, 폭도사자료(暴徒史資料) 27호, 폭도토벌지(暴徒討伐誌) (407)102, 경비편책(警備編冊) 150)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