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각 항일의적비, 통고국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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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23-3
탐방로그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23-3에 위치한 백세각 항일의적비를 찾았다. 백세각 항일의적비 옆에는 그와 관련된 독립유공자를 소개하는 통고국내문을 함께 찾아볼 수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송우선 호 세한제
1894.2.5 ~ 1942.5.2
파리장서 서명인 규합
성주만세운동 선봉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송문근 자 회이
1895.9.10 ~ 1963.11.25
국내통고문 인쇄배포, 성주만세운동 주모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송인집 자 충하 호 해여
1896.1.3 ~ 1961.2.17
국내통고문서, 파리장서 서명인 규합
성주만세운동 선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송수근 자 강숙 호 은포
1896.7.5 ~ 1969.11.27
파리장서 서명인규합, 성주만세운동 주모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송명근
1912.1.2 ~ 1971.2.24
항일학생운동 주모
타도군국주의의 격문 인쇄배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通告國內文 통고국내문(국내에 통고하는 글)
아 죽고 사는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나라가 회복되면 죽어도 오히려 사는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아도 또한 죽은 것이다. 이 날이 무슨 날인가 서울을 비롯하여 밖으로 이름있는 도시와 큰 항구및 깊은 산골 외진 마을에 이르기까지 혈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환호하고 춤추며 한 마음으로 함께 외치지 않는 자가 없으니 하늘의 뜻이 화를 내린것을 뉘우치고 사람들의 마음이 단결되었음을 이미 알 수 있도다. 아 우리가 입을 다물고 혀를 깨물며 분노의 눈물을 흘리고 소리없이 통곡 한지가 지금 십년이 되었도다. 이제 천년에 한번 있는 기회를 만나 만방의 여론이 스스로 공평하여 나라를 회복할 가망이 있는데도 우리가 어떤 사람이기에 문을 닫고 앚아만 있을 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는 울분을 이기지 못하여 글을 띄워 우러러 고하노니 이것은 실로 온나라가 같은 심정일것이며, 여러 군자들의 생각 또한 마음속에서 빛날 것이다. 원컨데 지금부터 군에서 향으로, 향에서 동에 이르기까지 각각 독립의 깃발을 세워 종노릇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뜻을 밝히자. 그리고 다시 만국회의에 글을 보내어 우리의 실정과 소원을 알게함으로써 공평한 여론이 널리 펼쳐지게 한다면 천만다행이리라.
백세각 항일의적비를 찾아가고 있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523-5 마을 입구 백세각 항일의적비가 있는 곳이다.
百世閣 抗日義蹟碑(백세각 항일의적비)
봉암산하 낙수상의 고산정은 야성송씨의 500년 세거지이고 백세각은 충숙공파 종택이며, 3.1독립운동 당시에 항일의거한 곳이다. 이 高山은 원래 孤山이었으나 충숙공 야계 송희규께서 명종조 을사사화때 오두는 가쇄고 오골은 가마나 오지는 불가탄이라 하며 불의에 항거하다가 유배되었던 땅 高山과 같게 고쳐서 의절을 드높인 동명이고 백세는 충효영전의 뜻을 담은 종택의 편호이다. 이렇게 유래된 고절 가풍을 승습하여 오던중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공산 송준필이 백세각에서 문회를 열어 사생은 천명이다. 나라가 회복되면 죽더라도 사는 것이요 나라가 회복되지 못하면 살더라도 죽은 것이다하며 창의를 결의하고 이 말을 서두로 의거를 충격하는 통고국내문을 기초하였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만나 만방의 공의가 자재하여 나라를 흥복할 가망이 있는 터에 우리들은 오히려 문을 닫고 앉아서만 있을수 있겠는가. 원컨대 군에서 향으로 향에서 동으로 독립의 기를 세워 망복의 뜻을 밝히고 파리만국평화회의에 공고서를 보내어 우리의 관정과 소원을 알게하여 공의가 회장되도록 하자 하였다. 이 격문을 송인집이 글씨를 쓰고 봉?서당내 흥효당의 비목을 빼어다가 송종직이 글자를 새겨서 수천매를 인쇄하고 문중과 문도의 소장을 동원 각지에 배포하여 일제히 거의케 하였다. 한편 아들 수근을 시켜 유림의 원로인 회당 장석영에게 편지를 보내어 거의
의 창도와 장서의 기초를 원청하여 쾌약을 얻었다. 한편 백세각에 찾아온 심산 김창숙과 합모하여 전참찬 면우 곽종석을 대표에 추대키로 하여 자광 송규선이 심산과 함께 면우를 방문하여 응약을 받았다. 이렇게 하여 파리장서가 발단되고 회당이 기초한 장서를 명우가 시대의 흐름에 맞게 가감하고 영호의 유림에서 백수십인이 이에 서명하였다. 이 때에 공산과 회천 송필래 획당 송민근이 문중을 대표하여 동참하였고 파리행 경비의 조달에는 회당과 청난 여포회가 거액을 내어 장서를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성주만세운동은 4월 2일 장날을 거의일로 정하여 백세각에서 태극기를 만들곡 격문을 돌려 군중을 충동하며 기독교인 오임오와 합의하여 일제히 봉기하였다. 관제묘 뒷산에서 백여인이 만세를 외치는 것을 신호로 세한재 송우선 김희규 송천흠등이 주막의 지붕에 올라가 만세를 선창하니 전후좌우에 군중이 호응하여 운동이 절정에 달했다. 이때 군중들이 경찰서 옥상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시위하다가 총탄을 맞고 쓰러지니 피를 본 군중의 운동이 격렬해지고 왜적이 사정없이 총을 난사하여 수명이 죽고 수십명이 상해를 입었으며 6~70명이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때 송우선 송훈익 송문한이 함께 피체되었고 후일 성재 정재기 연행을 거부하고 자결하였다.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십일간 운동이 산발적으로 계속되니 왜적이 주모자의 검거에 나서면서 공산에게 연행을 청하자 그는 의연히 사생은 명이다 오늘 비록 살아서 갔다가 죽어서 돌아온다 하여도 천지에 부끄러움이 없다하고 따라 나섰으며 왜경의 거사경위에 대한 심문에 나라의 유무가 이 한번의 거의에 달려 있거늘 내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끼겠는가 하였고 이는 정당한 거의라고 주장하니 달부의 감옥으로 보내어 10년의 징역에 처해도 벌이 부족할 것이라고 위협하자 10년이 아니라 종신토록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내 뜻은 굽히지 못할 것이라 하였으며, 삭발하려하자 내 목은 자를수 있을지언정 내가 죽기전에는 머리카락 하나도 자를 수 없다 하였다. 이러한 협박과 회융도 굴하지 아니하고 회천의 양사왕가회두직이면 이신난사역위영이라 한 옥중시와 같이 모두 신명을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알고 장기간의 옥고를 의연히 겪었다. 이동안 고산 성주 달부로 이동하는 연도에서 배종 일송 인파는 수천명에 달했고 성주와 대구로 문옥한 인사는 254인이며 자의한 성의는 금1385량과 조 1석이었고 광복후 국내의 보훈은 공산을 비롯하여 송천흠해려 송인집 송훈익 자광 송규선 세한제 송우선 괴당
송회근 송문근 은포 송수근 송명근에게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회천 송홍래에게는 건국포장을 추서하여 절의를 기렸다.
그리고 백세각으로 백범 김구 주석이 내방하여 지난날의 의거를 현양하고 은포를 비롯한 문노들과 건국을 협의하는 등 보국의 사행이 끊어지 않았다. 이렇게 온 문중이 거의하여 많은 사람이 옥고를 겪고 또 보훈을 받은 사실은 극히 드문 일로서 충효를 전세한 가문이 아니고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 거의사실을 공산의 차자 인근이 사실 그대로를 일기에 기록하였고 이를 문중에서는 독립운동실기로 발간하였으며 이제 또 충숙공의 백세각하에 거의비를 세워 효충수의를 ○양하니 이 일문의 고절은 옛이 그러했고 지금이 그러하여 영원히 승전될 것이다. 아! 목숨을 걸고 나라를 회복하려는 일거가 파리장서의 발단이 되고 성주 3.1독립운동의 거의가 되었으며 이런 의적이 바탕이 되어 조국의 공복을 이루었으니 그 의절에 고산정 드높고 백세각 영원하리라.
송준필 자 순좌 호 공산
1869.10.18 ~ 1943.8.28
파리장서 발의 서명, 성주만세운동 주동
통고국내문 기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송홍래 자 순익 호 회천
1876.5.19 ~ 1953.2.7
파리장서 서명, 유림동참자 규합
성주만세운동 주모
건국포장 추서

송회근 자 춘녀 호 괴당
1877.5.18 ~ 1949.3.18
파리장서 서명, 파리행 여비제공
성주만세운동 주모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송규선 자 현백 호 자광
1880.12.20 ~ 1848.4.27
파리장서 서명인 규합
성주만세운동 주모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송훈익 호 연암
1884.9.22 ~ 1961.2.27
성주만세운동 선봉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송천흠 일명 무출
1888.4.8 ~ 1968.6.11
파리장서 서명인 규합
성주만세운동 선봉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