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춘천농고항일운동기념탑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안내판·표지석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사농동 122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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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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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농공고등학교는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식민지 교육을 받는 가운데서도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이 발생하자 전교생이 만세 시위에 동참한 강원도 최초의 유일한 학교로, 이를 효시로 일인 교사 배척, 식민지 교육 반대, 광주학생사건 연대투쟁, 비밀결사 상록회 사건, 독서회 사건, 일본 천황과 총독에게 보낸 통치 반대 청원 사건 등 크고 작은 일련의 항일운동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역사의 주역으로 옥고를 치른 많은 본교 애국 학생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총동창회 동문들의 뜻을 모아 1995년 8월 25일 개교 85주년 및 광복 50년을 맞아 이 탑을 건립하였다.

탐방로그

춘천농고항일학생운동기념탑은 강원 춘천시 사농동 122 춘천농공고등학교 교정 내에 위치한다. 본 탑은 기단 1.5m 탑신 5.4m 규모로, 춘천농고 동문회에서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옥고를 겪은 학생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후진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해 광복 50년을 맞아 1995년 8월 25일에 건립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고광돈
한자명
高光敦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19 ~ 2009
본적
강원도 정선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37년11월 춘천농업학교(春川農業學校) 재학 시절(在學時節) 이준항(李俊恒)등 학교 선후배(學校先後輩)들로 구성(構成)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組織)하여 농촌 계몽(農村啓蒙)과 민족사상 고취(民族思想鼓吹)를 위해 활동(活動)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6월, 4년간(年間) 집행유예(執行猶豫)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기영
한자명
金基英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미상
본적
강원도 삼척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20

공적개요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경성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다수의 군중과 함께 종로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고, 동년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반도목탁’이라 제목한 문서를 서울 송현동 주민 등에게 배포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김무규
한자명
金武圭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87 ~ 1945
본적
경상북도 안동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20년 음력 8월 경북(慶北) 안동군(安東郡) 임동면(臨東面)에서 흠치교(吽哆敎)에 가입하여 운동자금(運動資金)을 모집하고 활동을 전개하다 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상순
한자명
金相淳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77 ~ 1956
본적
전라남도 나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11

공적개요

1919년 음(陰) 10월 경 전남(全南) 나주(羅州)에서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 체포(逮捕)되어 징역 3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윤옥
한자명
金允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1 ~ 1944
본적
황해도 송화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8

공적개요

1919. 3. 5 서울 남대문(南大門) 역전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 독립(朝鮮獨立)’이라고 쓴 기와 적포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에 집행유예(執行猶豫) 3년을 받고 미결(未決)로 8월간(月間)의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익수
한자명
金益洙
운동계열
학생운동
생몰년도
1900 ~ 1968
본적
전라남도 나주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6.6 건아단(健兒團) 비밀 결사(秘密結社)에 참여하여 농민 계발(農民啓發)로서 신사회(新社會) 실현을 위한 농민운동을 하다 18개월의 옥고를 치룬 후 면소(免訴)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재준
한자명
金在俊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3 ~ 1951
본적
충청남도 홍성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5

공적개요

1919년 4월 1-2일경 충남(忠南) 홍성군(洪城郡) 홍성시장(洪城市場) 등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가 일경(日警)에게 피체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서병철
한자명
徐丙哲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2 ~ 1970
본적
경상북도 달성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20 임정원(臨政員) 허영원(許永元)의 권유로 군자금 모금에 가담 영남지방(嶺南地方)의 부호자를 대상으로 활동중 일경에 체포되어 2년형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윤형중
한자명
尹� 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5 ~ 1935
본적
충청남도 홍성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7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 화계리(花溪里) 앞산에서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한후(后) 5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장곡면사무소(長谷面事務所)를 습격(襲擊)하고 4. 8 다시 시위군중 60여명을 모이게하여 동면사무소(同面事務所)를 습격(襲擊)하여 건물(建物), 집기(什器)등을 파괴(破壞)하며 활동(活動)하다 체포(逮捕)되어 징역8월형(月刑), 벌금(罰金)20원(圓)을 언도(言渡)받았으며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鐘路警察署爆彈投擲)에 활동(活動)한 윤익중(尹益重)의 친형(親兄)으로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지원(支援)한 특별(特別) 활동을 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재인
한자명
李在寅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07 ~ 1964
본적
경상북도 의성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9

공적개요

1935년 경북(慶北) 의성군(義城郡) 의성면(義城面)에서 의성교회(義城敎會) 목사(牧師) 유재기(劉載奇)와 함께 조국독립의 방안을 협의하고 교회 소속 청년들의 민족의식(民族意識) 강화를 위해 청년면려회(靑年勉勵會)를 민족주의 조직으로 개편(改編)하는 등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3개월이상의 옥고(獄苦)를 치르고 기소유예(起訴猶豫)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정호
한자명
李庭浩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6 ~ 1952
본적
경상북도 영양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10

공적개요

1920년 음(陰) 8월경 경북(慶北) 영양(英陽)에서 흠치교(吽哆敎)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 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장기영
한자명
張基榮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7 ~ 1950
본적
경기도 가평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3. 16 경기(京畿) 가평군(加平郡) 북면(北面)에서 전날의 시위도중 피체(被逮)된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가평 헌병분견소 앞에서 군중을 선두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3년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정재철
한자명
鄭在喆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921 ~ 1993
본적
경기도 인천
포상훈격
건국포장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40년 12월부터 인천(仁川)에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는 활동을 하던 중 체포되어 징역 1년을 받고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홍원식
한자명
洪元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7 ~ 1919
본적
경기도 화성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8

공적개요

① 1907년 구한국 군인(舊韓國軍人)으로 서소문(西小門)안 병영(兵營)에서 정미 군대해산시(丁未軍隊解散時) 이를 반대하여 일병(日兵)과 직접 반대 항전(直接反對抗戰)하다가 부상되여 각처(各處) 전전(轉轉) 의병(義兵)을 일으켜 활약타가 고향인 제암리(提岩里)에 귀가하여 김성열(金聖烈) 안종후 등(安鍾厚等)과 모의(謀議)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를 조직하고 활약. ② 1907년 위 사실을 수색코저 출장한 일헌(日憲) 2인을 타살 도주함 ③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김성열(金聖烈) 안종후 등(安鍾厚等)과 주동하여 3월 25일 3일간을 계속하여 만세시위 ④ 1919년 4월 5일 발안(發安)장날을 기(期)하여 만세시위코 발안(發安) 주재소(駐在所)를 습격 주모자(主謀者)로 수원서(水原署)에 연행되여 고문 구타 당함 ⑤ 1919년 4월 15일 일본 중위(中尉) 1명이 일병(日兵) 1개대(個隊)를 인솔하고 수원군(水原郡) 남제암리(南提岩里)에 와서 주민들에게 유시(諭示)할 일이 있다하여 천도교인(天道敎人) 기독교인 등(基督敎人等) 많은 주민을 교당(敎堂)에 집합시켜 놓고 쇄문(鎖門)한 다음 난사(亂射) 학살(虐殺)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p 156 3.1운동비사(運動秘史) p 871 “스코팔드” 박사(博士) 현장시찰(現場視察) 수기(手記) 보건사회부(保健社會部) 순국선열심사위원회(殉國先烈審査委員會)에서 순국 선열(殉國先烈)로 선정(選定))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