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농고항일운동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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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사농동 122
탐방로그
춘천농고항일학생운동기념탑은 강원 춘천시 사농동 122 춘천농공고등학교 교정 내에 위치한다. 본 탑은 기단 1.5m 탑신 5.4m 규모로, 춘천농고 동문회에서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옥고를 겪은 학생들의 영혼을 위로하고 후진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기 위해 광복 50년을 맞아 1995년 8월 25일에 건립하였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춘농항일운동 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
춘천농고항일운동기념탑은 강원 춘천시 사농동 122 춘천농공고등학교 내에 위치한다.
춘농 항일운동기념탑 이전기

1905년 8월 25일 본 교사 앞 평지 화단에 세워져 있었던 것을 좀 더 평안하고 영생을 위한 자리에 이전함으로서 이를 추모하는 재학생들에게 선배의 정기와 학습효과를 거두기 위하여 역사적인 2010년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있는 날 100주년 기념공원에 이 비를 세우는 것입니다.
인류사회에 이바지하는 춘농인들이여!
과학, 기술, 사회, 인류역사에 훌륭한 족적을 남기고 리더쉽과 인성을 갖추고 미래의 창조적 지도자가 되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2010년 4월 29일
춘천농공고등학교 총동창회장 최형문, 춘천농공고등학교장 허남화
〈지원해 주신 분〉
춘천보훈지청장 박종근·광복회장강원도지부장 류연익
춘천농고항일학생운동 기념탑

· 소재지 : 춘천시 사농동 122
· 건립자 : 항일운동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
· 관리자 : 춘천농공고등학교

춘천농공고등학교는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식민지 교육을 받는 가운데서도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이 터지자 전교생이 만세 시위에 동참한 강원도 최초의 유일한 학교로, 이를 효시로 일인 교사 배척, 식민지 교육 반대, 광주학생사건 연대투쟁, 비밀결사 상록회 사건, 독서회 사건, 일본 천황과 총독에게 보낸 통치 반대 청원 사건 등 크고 작은 일련의 항일운동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역사의 주역으로 옥고를 치른 많은 본교 애국 학생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총동창회 동문들의 뜻을 모아 1995년 8월 25일 개교 85주년 및 광복 50년을 맞아 이 탑을 건립하였다.
기단 1.5m 탑신 5.4m로 매년 3월1일 동문회 주관으로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春農抗日運動紀念塔(춘농항일운동기념탑)
春農抗日運 動紀念塔 銘 (춘농항일운동기념탑명)
봉의산과 소양강이 아우러진 언덕에 젊은 知性을 드높인 春川農業學校가 있다. 구한말에 개교한 춘천농업학교는 관동지방에서 유일한 中等학교로서 이地方 개척을 선봉에서 이끌었고 일제치하에서는 학생운동을 줄기차게 전개하여 韓國近代史에 금자탑 을 세웠다.三․一운동에 이르러 春農 항일운동의 포문을 열 때 교내의 만세시위로 그 첬지만 그것은 해방의 날까지 朝鮮本位敎育을 위 한 투쟁의 기초가 되었다. 一九三六년 六․十만세 운동때는 送義在등이,一九二九년 광주학생운동때는 尹衡重등이一九三二년 동맹휴학때는 李文求등이앞장서 활약했고,一九三八年 淸平寺 소풍때는 전교생이 농성 하여 일본인 교원을 축출한 개가를 올렸다. 그에 앞선 一九三七년에는 讀書會운동을 일르켰다,처음에 李俊桓이 회장을 맡았다가 나중에는 金載河가 맡아 사상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一九四十년말에 발각 되자 襄陽 平康 金化 三陟 金浦 聞慶 茂山등 전국 각처에서 졸업생까지 잡혀와 폐교설이 나돈 위기를 맞기도 했다.一九四二년 十월 모두 불구의 몸이되서 출옥했으나 회원들은 사상감시에 묶여 식민지인의 굴래를 벗을수 없었다. 그렇다고 젊은 기상이 꺽기겠는가, 一九四三년부터 학생조차 전쟁터로 끌려갈 때 李安聖등은 日本國王을 비롯한 그들 수뇌부에 항의서를 송달하며 투쟁했다. 그러다가 잡혀 八․一五 해방을 맞아서야 自由의 몸이 되었다 학교에도 正義를 찬미하는 노래가 비로서 울려 퍼젓다.그래서 春農학생운동은 靑史에 빛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값진 전통을 디디고 선진농촌의 햇불을 들때이다. 그것이 선배들의 遺志를 꽃피 우는 길이고 그래야 당초의 建學精神에 부응한 열매를 맺을 것이 아니냐
一九九五년 八월 一五일 塔銘 문학박사 趙東杰 짖고 塔銘 如 初 金膺顯 쓰다
춘농항일운동 년지
1919년 3월 7일 서울의 3.1만세운동 1주후인 3월 7일 전교생이 독립만세시위 3일간 계속. 주동학생 유재화 김종식, 김수한, 정만시, 박용하, 박효신, 장기영, 이재구, 엄정환, 홍성도, 공신용, 전호중, 정종연, 김상순, 김주경, 신재양, 강용수, 민춘식, 김익수(9회), 서병철(10회). 춘농만세시위운동은 5회 김병환이 배후주동
1926년 6월 10일 6.10만세시위 3.1독립운동으로 민족의 울분이 내연중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식민지교육반대, 일신교사배척, 동맹휴학시위. 주동학생 손의재, 장삼영, 홍원식, 정재철, 김윤옥, 김기영, 김중영, 박남용(17회)
1927년 8월 12일 大川立七 일인교사추출 동맹휴 8월 하계방학중 평소 민족차별 언동이 심한 大川立七 교무주임을 축출하기위한 동맹유학 3개월간 휴교. 주동학생 손의재, 정재철, 김윤옥, 홍기영, 김중영(3학년)
1930년 2월 29일 11.3 광주학생사건후 조회시간을 이용 대한독립만세 시위. 주동학생 윤여중, 윤형중, 윤춘학, 김금덕, 김덕균, 이승춘, 권의준, 송철호, 김무규, 김남순, 김재준, 신유철, 이정호, 임문승, 황규헌(징역형및 퇴학처분)
1932년 4월 29일 식민통치결사반대 맹류 4학년 주동 3개항의 식민통치 식민교육결사 반대 결의서을 조선총독에게 우송하고 전원이 금강산 장안사로 집결 농성하기로 모의한 맹휴. 주동학생 이문구, 이재인, 박두서, 신명철, 허계철, 허영(許英), 이기동(주모자 전원 퇴학처분)
1937년 11월 15일 독서회조직. 3학년 이준환 김창경 김시묵 반영균이 주동 민족독립사상 함양을 목적으로 독서회 조직 지하활동중 1940년 12월10일 조직 탄로 피검학생 이준환 김재하 김시묵 송봉용 정용화 전승원 고광돈 유근택 김두섭 박찬하 김응화(이상 징역형) 조관현 김인순 고현정 백춘기 김진훈 김희찬(이상 퇴학처분)
1938년 6월 1일 中野 교무주임 배척 맹휴. 1학년을 제외한 전교생 청평사로 집결 농성 시위. 주동학생 이준환 반영균 김창경 김재하(25회) 송봉용 고광돈(26회) 정태부(27회)
1943년 10월 일 일본국왕 및 조선총독에게 식민통치 항의사건. 2학년생 이안성 고순재 외 2명이 10개항의 식민통치 항의서 우송탄로. 주동학생 이안성 피검(이상 년지는 춘농 75년사 자료에서 발췌)
여기 기록된 학생들 이외에도 항제의 식민통치를 반대하여 투쟁한 많은 학생들이 희생되었으나 오랜 세월이 흐르므로서 선배들의 타계와 6.25동란으로 괜련 자료의 멸실로 완벽한 기록이 되지 못함을 첨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