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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전리 의병 전투지
마전리 의병 전투지는 1907년 11월 의병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07년 11월 8일 오전 10시경 헌병 18명이 수비하고 있던 마전 서남쪽 두일성 천신면에 의병 약 1,000명이 마전읍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다. 마전 일제 헌병분견소는 그 이전에 마전 부근에 있는 약 1,000명의 의병이 8일 밤 또는 9일 새벽에 마전읍내에 내습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철원헌병분견소에 급하게 증원을 요청하였다. 철원헌병분견소의 중위 태전청송(太田淸松, 오오타 기요마츠)은 부하 20명과 철원수비대의 하사 5명을 인솔하여 9일 오전 7시에 급히 마전으로 향하였고, 김화수비대에서 파견된 일본군이 후방에서 의병을 공격하였다. 의병은 고전 끝에 약 20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의병들이 다시 마전을 습격할 기미를 보이자 일본군은 하사 이하 19명을 잔류시켜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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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전향교 3.1운동 만세 시위지
마전향교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1~22일 연천군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1일 밤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장터 만세시위를 지휘하던 조우식·정현수 등은 20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로 향하였다. 한편 백천기는 백학면 통구리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민 60여 명을 모아 만세를 부르면서 미산면 마전향교 앞에 이르러 두일리에서 행진해 오는 주민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22일 새벽 3-4시경 마전향교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불렀고, 오후에 약 300명의 군중이 마전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 이들은 이곳을 떠나 미산면 석장리로 가는 도중 마전경찰관주재소 앞에서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22명이 체포, 오후 4시경에 해산되었다. 조우식(미상~미상), 정현수(1899~1951), 이낙주(1896~1923), 홍순겸(1892~1953), 한상혁(1877~미상), 김문유(1894~미상), 구금룡(1896~미상), 김복동(1889~미상), 백천기(1880~1951)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조우식은 장날인 21일 두일리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한 구금룡이 동지를 포섭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였다. 21일 시장으로 간 조우식은 구금룡에게 소방용 경종을 울려 장꾼들을 모이도록 하였다. 장꾼들이 모여들자 조우식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때 정현수는 인근 동리의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며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고 이렇게 하여 모인 다수 군중을 지휘하여 백학면사무소로 몰려 들어갔다.정현수와 이낙주는 백학면장을 데려와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어 조우식, 정현수, 이낙주, 홍순겸, 한상혁 등은 군중을 지휘하여 백학면사무소로 가서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모두 만세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직원들이 응하지 않자, 군중은 돌을 던져 면사무소 일부를 파손시켰다. 이후 이들은 제지하는 헌병을 뿌리치고 시위를 계속하며 미산면 마전리로 행진하였다. 마전리에서 태극기를 만든 조우식, 홍순겸 등은 향교로 가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한편 통구리에서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60여명의 주민들을 규합하던 백천기는 두일리에서 행진해 오는 주민들과 합세하였고, 시위 후 결국 이들은 체포되고 만다. 1919년 7월 7일 정현수는 징역 2년, 구금룡, 이낙주는 징역 1년 6월, 김복동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9월 18일에 조우식은 징역 3년, 홍순겸, 한상혁, 김문유는 징역 1년 6월, 백천기는 징역 8월을 선고받는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 정현수, 이낙주, 홍순겸에게, 1995년 구금룡에게, 2011년에 조우식, 한상혁에게, 2016년 김복동에게 추서하였다. 또한 1982년에는 대통령표창을 홍순겸에게, 1985년 이낙주에게, 1992년 백천기에게 추서했고, 2013년 김문유에게는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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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회종 집 터
의병장 왕회종(1879 - 1925)은 숭의전 참봉으로 근무하다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금성, 토산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함경도 길주, 명천, 혜산진까지 북상하였다. 또한 1907년의 고종 퇴위와 군대 해산 때에도 조인환, 권준, 김진묵 등과 함께 의병 부대를 지휘하며 양주, 파주, 적성, 철원, 춘천, 양구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에 13도연합의진의 서울진공작전에 실패한 후 임진강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청년 교육에 힘쓰다가 의병 전쟁 때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1925년에 세상을 떠났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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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연천 항일운동 기념탑은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백학면 두일리 장터에서 자발적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킨 선열들을 기리고 관내 학생들에게 역사의식 고취 및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자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평화관광교육관 부지 내에 2008년 8월에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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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일리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
두일리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1919년 3월 21일 두일리 장날에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이다. 1919년 3월 21일은 두일리 장날로 조우식, 정현수, 이낙주, 구금룡 등의 주도로 장터에 모인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특히 정현수는 면장 윤규영(尹圭榮)에게 같이 만세를 부를 것을 요구하고, 인근 집의 문을 돌로 두드리며 “만세운동에 참가하라”고 독려하였다. 또한, 구금룡은 소방용 경종을 쳐 100여 명의 군중을 집합시켰다. 이어 이들은 시장 부근의 백학면사무소로 몰려가서 직원들에게 독립만세를 같이 부를 것을 요구하였으나, 이에 호응하지 않자 정현수는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기물을 파괴하였다. 조우식(미상~미상), 정현수(1899~1951), 이낙주(1896~1923), 홍순겸(1892~1953), 한상혁(1877~미상), 김문유(1894~미상), 구금룡(1896~미상), 김복동(1889~미상), 백천기(1880~1951)는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두일리 시장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5일 조우식은 장날인 21일 두일리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한 구금룡이 동지를 포섭하고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였다. 21일 시장으로 간 조우식은 구금룡에게 소방용 경종을 울려 장꾼들을 모이도록 하였다. 장꾼들이 모여들자 조우식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이때 정현수는 인근 동리의 집집마다 대문을 두드리며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고 이렇게 하여 모인 다수 군중을 지휘하여 백학면사무소로 몰려 들어갔다.정현수와 이낙주는 백학면장을 데려와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이어 조우식, 정현수, 이낙주, 홍순겸, 한상혁 등은 군중을 지휘하여 백학면사무소로 가서 면사무소 직원들에게 모두 만세를 부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직원들이 응하지 않자, 군중은 돌을 던져 면사무소 일부를 파손시켰다. 이후 이들은 제지하는 헌병을 뿌리치고 시위를 계속하며 미산면 마전리로 행진하였다. 마전리에서 태극기를 만든 조우식, 홍순겸 등은 향교로 가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였다. 한편 통구리에서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60여명의 주민들을 규합하던 백천기는 두일리에서 행진해 오는 주민들과 합세하였고, 시위 후 결국 이들은 체포되고 만다. 1919년 7월 7일 정현수는 징역 2년, 구금룡, 이낙주는 징역 1년 6월, 김복동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9월 18일에 조우식은 징역 3년, 홍순겸, 한상혁, 김문유는 징역 1년 6월, 백천기는 징역 8월을 선고받는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1990년 정현수, 이낙주, 홍순겸에게, 1995년 구금룡에게, 2011년에 조우식, 한상혁에게, 2016년 김복동에게 추서하였다. 또한 1982년에는 대통령표창을 홍순겸에게, 1985년 이낙주에게, 1992년 백천기에게 추서했고, 2013년 김문유에게는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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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원사 의병 주둔지
심원사 의병 주둔지는 1907년 연천 및 철원 지역의 의병이 주요 거점으로 삼아 활발한 전투를 전개한 사찰이다. 1907년 9월 25일 의병 800여 명이 철원 심원사에 주둔하자 정보를 입수한 일제 김화수비대는 26일 밤에 심원사 일대 각 방면을 포위한 채 공격하였다. 26~27일에 걸쳐 의병들은 27일 오전 3시에 법화동 전투, 오후 3시에 대광리 전투를 벌였는데, 화력의 열세로 피해를 입었다. 같은 해 10월 17일에는 심원사에 있던 의병 300여 명이 일본군의 습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일본군은 의병의 은거지인 심원사에 불을 질러 전소시켜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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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 5위 위령비
항일의병 5위 위령비는 1907년 9월 27일 보개산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의병진 250여 명이 일본군 김화 수비대 재경보병 50연대 1소대와 치열하게 항쟁하다가 순국한 무명의 항일의병 5인의 주검을 대광리 주민들이 수습해 마을 뒤 야산에 묻고, 연천문화원 향토사연구소가 1997년 마을에서 구전으로 전해져온 의병 묘 5기에 대한 검증에 나서 밤나무를 통째 깎아 만든 관과 유골을 확인한 뒤 2000년 11월에 세운 것이다. 보개산 일대는 조선 군대가 강제 해산된 1907~8년 허위, 연기우 등이 이끈 수백 명의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던 곳으로 유명하다. 연천군은 2012년에 신서면 대광리에 있던 무연고 의병 묘 9기와 함께 위령비를 항일의병 투쟁의 본산인 심원사 부근인 신서면 내산리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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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항일의병비
심원사는 연천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들의 주요 근거지였다. 1907년 의병장 허위가 이끄는 의병부대 800여 명이 심원사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 정보를 입수한 김화수비대가 의병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심원사로 접근하였는데, 이를 알아차린 의병부대는 서로 분산하여 이동하던 중 250여 명의 의병들이 신서면 대광리에서 1907년 9월 27일 오후 3시 김화수비대와 재경보병 50연대 6중대 1소대의 연합토벌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였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의병들이 희생되었다. 이 중 6명의 시신이 대광리역에서 약 600미터 떨어진 야산 구릉에 안치되었다. 2012년 대광리의 6인묘와 도신리 일대에서 무명 의병묘로 전해오던 3인의 주검을 수습하여 이 곳 심원사 경내로 안치하였다. 2016년에 일제강점기 때 구국의 신념으로 연천에서 활동하다 순국한 수많은 선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연천 항일의병묘역을 조성하고 위령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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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동 의병 전투지
법화동 의병 전투지는 1907~8년 경기북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곳이다. 1907년 9월 27일 오전 3시경 경기북부지역에서 활동하던 약 150명의 의병은 연천의 법화동에서 일제의 니시카와중대(西川中隊)와 전투를 벌였다. 일제측 자료에 의하면 이 전투에서 의병은 20여 명이 사망했으며, 나머지 병력은 인근지역으로 후퇴한 것으로 확인된다. 일제의 니시카와 중대는 원래 철원 남쪽의 심원사에 집결한 800여 명의 의병을 탄압하기 위해 연천의 법화동을 지나던 길이었다. 이때 법화동에서 의병과 교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제의 니시카와 중대가 같은 날 오전 5시경 심원사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집결해 있던 의병은 이미 1시간 전에 모두 피신한 상태였다. 즉, 법화동에서 의병이 일본군과 교전했기 때문에 심원사에 있던 대규모 의병이 모두 피신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1908년 4월 23일에도 법화동에서는 한 차례의 전투가 더 있었다. 이날 밤 의병 약 15명이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12명이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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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우, 이근배 의병 전투지
연기우, 이근배 의병 전투지는 연기우, 이근배 등이 일본군과 전투를 전개한 곳이다. 1908년 2월 24일 의병장 연기우와 이근배 등 의병 20여 명은 신서면에서 일제 헌병 모기 게이키치(茂木敬吉). 모리야스 지로(守安治郞) 등과 마주쳤다. 연기우와 의병 20여 명은 이들을 향해 사격하였고, 잠시 후 의병 약 30명이 나타나 연기우 의병 부대를 지원하였다. 모리야스는 지원 병력을 요청하기 위해 철원으로, 모기는 복막리로 향하다가 모두 의병들에게 사살되었다. 급보를 듣고 철원 분견소장 오오타(太田) 대위가 일본군 하사 이하 12명을 거느리고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의병은 없고, 모기의 시체와 부상당한 말을 발견하였다. 모기가 휴대한 물품은 의병이 노획해 간 상태였다. 연기우(1865~1910)는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강화진위대에서 부교로 복무하던 중 1907년 8월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덕물포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 60여 명을 소모한 뒤 동한창의대장이 되어 연천·적성·삭녕·마전 등지에 출몰하며 양주·포천 방면의 강기동 의병부대와 연결하여 여러 곳에서 일본군수비대와 경찰을 공격하였다.1908년말 원수부13도총대장인 이인영(李麟榮)의 휘하에 들어가 서울 공략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양주에서 패한 뒤 창의한북대장이 되어 다시 의병을 이끌고 고양·연천·마전·삭녕·강화·교동 방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2월에 삭녕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자 9명과 피금자 43명을 내고 많은 병기를 빼앗기는 패전을 당하였다. 그뒤 나머지 부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안협으로 들어가 철원·평강·이천 등지를 전전하다가 5월에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가 탈출하였다. 그뒤에도 활동을 계속하다가 국권상실 후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근배(1882~1910)는 강원도 철원(鐵原) 사람이다. 1908년 2월 24일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연기우 의병장 의진에 참여하여 그 부하 50명과 함께 철원군 신서면 목포에서 활동하던 중 철원 헌병분견소 일헌병 무목경길(茂木敬吉)을 저격하여 살해하여 총검 각 1정과 실태 20발 외 잡품 8점을 노획하였다. 그후 동년 12월 2일에 연기우 의진의 20여 명과 함께 철원군 동변면 장흥산에 거주하는 일인의 집을 습격하여 일인 문곡일랑(文谷一郞)과 중야영조(中野寧造)를 살해하고 중야건치(仲野乾治)에게 상처를 입힌 뒤 붙잡혔다. 그로 인하여 1910년 2월 1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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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근 묘
이종근(1868 - 1943)은 경기도 통진(通津, 지금의 김포) 사람으로, 1908년 4월 23일(음력) 향리인 경기도 통진군에서 정용대(鄭容大) 의진에서 활약하였다. 18명의 동료 의병과 함께 통진군내 3개면의 동장들을 모아놓고 1만 5천냥의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계속해서 군도와 양총(洋銃)으로 무장하여 교하군(交河郡) 민판서(閔判書)로부터 양총 7자루와 탄환 200발, 군도 2자루 등을 모집하는 등 활약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1908년 10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유형 5년을 선고받고 정배생활을 하였다.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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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명, 소은숙 기념상
일제강점기 당시 서울 배화여학교에 재학 중이던 소은명(1905 - 미상)·소은숙(1903 - 미상) 열사 자매는 1920년 3.1운동 1주년을 기념해 학교 뒷산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다 체포돼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연천군 항일 독립운동가 69명 중 유일한 여성이다. 2018년 8월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