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167건
-
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소양고등학교)
춘천공립농업학교의 제1차 동맹휴학은 1927년 9월 11일 학생들에 대해 전제적 구속과 민족차별적 발언을 한 일본인 교사 오카와[大川立七]의 배척을 요구하며 시작되었다. 손의재(孫義在, 孫泰基)·박웅남(朴熊南)·장삼영(張三英)·홍완식(洪完植)·정재철(鄭在哲)·김윤옥(金潤玉)·김기영(金琪榮)·김중영(金仲榮) 등이 주동하여 교장인 시부다[澁田市造]에게 진정서를 제출하고, 3일을 기한으로 정해 해답을 요구했다. 학교 측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9월 12일 3학년 학생들이 퇴학원을 제출하고 교내 농성 시위를 전개했고, 요선동 거리까지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2학년생들도 이에 동조하여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이에 학교 측은 강경한 태도로 3학년 전원에게 퇴학 허가장을 발부하는 동시에 2학년 학생 중 주동 학생 2명을 퇴학시켰다. 사태 악화에 학부모와 졸업생들이 중재에 나서면서 동맹휴학은 10월 말에 일단락되었고 3학년 학생들은 다음해에 졸업했다. 그러나 새로 3학년이 된 학생들은 1928년 여름 방학이 끝난 후 학교에 아직 남아 있는 오카와 교사 축출을 위해 또 다시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결국 학교 측과 도당국이 학생들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 오카와는 면직당했다. 그 과정에서 7명의 학생들이 퇴학처분을 받았다. 춘천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1937년 6월 1일에 학생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일본인 교장 노나카[野中鼎]의 유임과 그를 모함한 교무주임 나카노[中野久雄]를 포함한 일본인 교사 4명의 배척을 요구하며 청평사에 들어가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6월 1일 새벽에 약 280여 명의 학생들은 농성지로 예정된 청평사로 출발했다. 이 농성을 주동한 학생들은 이준환(李俊桓)·반영균(潘榮均)·김창경(金昌卿)·정태화(鄭泰和)·이종엽(李鍾燁)·고광돈(高光敦) 등이었다. 이들은 학교측과 강원도 내무부 학무과에 '1. 노나카 교장의 유임과 나카노 교무주임의 축출, 2. 실습시간의 단축과 학과 이론의 확장, 3. 기숙사 급식 제도의 개선과 자율적 운영 방안' 등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이 동맹휴학은 춘천공립농업학교의 동맹휴학 가운데 최대 인원이 참가한 것으로 학교, 경찰은 물론 지역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학교 측은 경찰과 학부모를 앞세워 신분 보장을 약속하며 학생들을 회유했다. 학생들은 교무주임 나카노를 비롯한 기피 인물을 추방한다는 언약을 받고 전원 학교로 돌아왔다. 학교로 돌아온 학생들은 사흘 동안 농성을 벌였으나 학부모와 교사들의 회유와 설득이 계속되고, 주동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동맹휴학은 끝나고 말았다.
-
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춘천고등학교)
춘천고등보통학교 상록회 활동지는 1920~30년대 춘천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상록회의 활동지이자 3차에 걸쳐 항일 동맹휴학이 전개된 곳이다.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일본인 교사의 배척을 요구하고 일제의 교육정책에 반대하며 3차례에 걸쳐 동맹휴학을 전개했다. 1차 동맹휴학은 1926년 10월 4일에 2·3학년 학생 120명이 일본인 교무주임 의 배척을 요구하며 일어났는데, 이 사건으로 4명의 주동자가 퇴학처분을 당했다. 2차 동맹휴학은 1929년 5월 10일에 1·2학년을 중심으로 조선역사와 조선어문법의 교수(敎授) 등을 요구하며 계획되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자 6명이 정학처분을 당했다. 1935년 7월 4일에 일어난 3차 동맹휴학은 3·4·5학년생 250여명이 일본인 교사의 배척을 요구하며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결국 일본인 교사는 사직했으며 24명의 학생이 징계를 당했다. 1937년 3월 14일에는 비밀결사인 상록회가 결성되었다. 창립 당시 회장은 조규석(曺圭奭), 부회장은 남궁태(南宮珆), 선전부장은 문세현(文世鉉), 조직부장은 이찬우(李燦雨), 서적부장은 백흥기(白興基), 회계는 용환각(龍煥珏)이 맡았다. 산하에 독서회를 두어 ① 회원으로서 자기 완성 ② 지도자로서 책임 완수 ③ 단결력 배양을 3대 강령으로 삼아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귀농운동 등을 전개했다. 춘천공립농업학교 독서회 등 춘천 지역 각 학교와도 비밀리에 연락을 갖는 등 이 지역 항일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신북면 천전리에서는 농민단체인 수양단을 조직해 활동하기도 했다. 1938년 가을 발각되어 1939년까지 졸업생과 재학생 137명이 검거되었다. 춘천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문세현(1917~1945), 백흥기(1920~미상), 용환각(1917~미상), 이찬우(1918~1983), 조규석(1918~1963)은 1937년 3월에 함께 일제의 민족차별교육에 반대하여 항일학생결사 상록회를 조직하였다. 그 후 상록회는 신입회원을 가입시켜 회세를 확장하여 전교적인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록회의 주요활동은 월례회·토론회·독후감발표회 및 귀농운동 등으로서 주로 독서활동을 통한 항일의식을 고양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 회원은 졸업 후에도 그러한 상록회의 활동을 계속하여 각기의 정착지에서 새롭게 상록회 조직을 결성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상록회는 더욱 조직을 확대하면서 춘천농업학교의 독서회와도 연락을 통하였고, 졸업생들은 각기의 정착지에서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면서 상록회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졸업생과 긴밀한 교류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심화시켰다. 그런데 1938년 가을, 춘천에서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자 전회원이 붙잡히게 된다. 이들은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9년 12월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이들 모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고, 1968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이찬우에게, 1977년에는 나머지 이들 모두에게 추서하였다.
-
강원학생독립운동사 안내판(모곡초등학교)
1919년 9월에 남궁억(1863~1939)이 사재를 털어 홍천군 서면 모곡리(일명 보리울) 부근에 대지를 매입하고 남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건평 30평에 8칸짜리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교회 건물에 무인가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20년 2월 모곡학교라는 간판을 걸고 학생들을 모아 4년제 보통학교 정도의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 9월 4년제 사립 모곡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주변의 청년학생들이 모여들자,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1922년 10월 100평의 새 교사와 기숙사를 건립하였다. 1925년 3월 6년제 사립학교(보통학교)의 인가를 취득하여 정식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남궁억은 1924년 겨울에 역사교과서 『동사략』(4권)을 간행하고, 1929년에는 사화집(史話集)인 『조선이야기』(5책)를 저술하였다. 또한 국어와 역사 교육, 농촌을 잘 살게 할 수 있도록 실업교육을 시행하고, 독서회를 만들어 독서활동을 장려하였다. 그는 학교 실습지 500여 평에 무궁화 묘목을 기르고, 무궁화 묘목을 교회와 사립학교의 지우들에게 보급하였다. 그러나 1933년 11월 일제 경찰이 학교·교회와 청년들의 집을 급습, 남궁억과 교사, 그리고 마을청년 등 28명을 홍천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로 인해 1933년 12월 모곡학교가 폐교하게 되었다. 남궁억은 1934년 3월 12명의 청년과 함께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7월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39년 4월 5일 모곡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남궁억 흉상
남궁억 선생(1863~1939)은 1896년 7월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하여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에는 나수연(羅壽淵) · 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하면서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친로 수구파의 모함으로 인해 1898년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과 함께 그는 붙잡히게 된다. 독립협회가 해산 당한 뒤인 1900년 7월에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3년 모함으로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 뒤 귀경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된 후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을 구실 삼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면서 정미칠조약을 체결하고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 권동진(權東鎭) · 여병현(呂炳鉉) · 유근 · 이우영(李宇榮) · 오세창(吳世昌) ·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 정운복(鄭雲復) ·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창립한 대한협회(大韓協會)의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는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918년에는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며 활동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 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횡성3.1공원
횡성의 만세시위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나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천도교인이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횡성청년회 윤태환(尹泰煥)과 횡성감리교회 정해경(鄭海景)도 참여하였다. 횡성군수가 직접 면사무소에서 폭동에 대비하라는 훈시까지 하는 등 일제 관헌의 대비가 엄중한 가운데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다. 원주 소초면 둔둔리 천도교인인 하영현(河永賢)과 강사문(姜士文) 등이 주민을 인솔하여 횡성으로 왔다. 4월 1일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몽둥이·돌·장작으로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일제 관헌들은 시위에 미리 대비해 관공서의 중요 문서를 숨겼으며 직원들도 오후에 모두 도망쳤다. 시위가 진행되던 중 일본헌병 상등병인 고지마[小島了]가 말을 타고 거리에 나타났다. 군중은 헌병을 보자 격분하였다. 최동수(崔東壽)가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밟고 때렸다. 이 때 총소리가 울리자 군중의 움직임은 일단 멎었다. 저녁 무렵에 다시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향하였다. 헌병들이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고 뒷산에 매복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군중의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법주리 강승문, 둔둔리의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 4월 2일에도 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며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4월 2일부터 시위 주도자를 검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다. 정해경(1877~1926), 하돌임(이명 : 하영현, 1878~1919), 강승문(이명 : 강사문, 1893~1919)은 강원도 횡성군 횡성 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주도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4월 1일 하돌임과 강승문은 헌병들의 발포로 순국하였고, 체포된 정해경은 1919년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애족장을 2014년 하돌임에게, 2010년 정해경에게 추서했고, 강승문에게는 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횡성중앙근린공원
횡성의 만세시위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나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천도교인이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횡성청년회 윤태환(尹泰煥)과 횡성감리교회 정해경(鄭海景)도 참여하였다. 횡성군수가 직접 면사무소에서 폭동에 대비하라는 훈시까지 하는 등 일제 관헌의 대비가 엄중한 가운데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다. 원주 소초면 둔둔리 천도교인인 하영현(河永賢)과 강사문(姜士文) 등이 주민을 인솔하여 횡성으로 왔다. 4월 1일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몽둥이·돌·장작으로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일제 관헌들은 시위에 미리 대비해 관공서의 중요 문서를 숨겼으며 직원들도 오후에 모두 도망쳤다. 시위가 진행되던 중 일본헌병 상등병인 고지마[小島了]가 말을 타고 거리에 나타났다. 군중은 헌병을 보자 격분하였다. 최동수(崔東壽)가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밟고 때렸다. 이 때 총소리가 울리자 군중의 움직임은 일단 멎었다. 저녁 무렵에 다시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향하였다. 헌병들이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고 뒷산에 매복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군중의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법주리 강승문, 둔둔리의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 4월 2일에도 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며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4월 2일부터 시위 주도자를 검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다.
-
강릉의병항쟁기념탑
2010년 5월 강릉시가 지역 항일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해『강릉항일기념공원』을 조성하였으며, 한말 을미·정미의병 당시 치열했던 항일 투쟁사 속의 구국정신과 그분들의 혼을 기리고 후세에 선열들의 얼을 계승하기 위해 「강릉의병항쟁기념탑」을 건립했다. 강릉의병은 을미의병 시기에는 민용호 의병장의 관동구군도창의소를 중심으로 항쟁을 펼쳤고, 정미의병 시기에는 원주진위대의 장교였던 민긍호 의병장의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항전을 이어갔다. 공원 내에는 기념탑을 비롯하여 강릉 지역에서 의병 활동을 한 민용호, 민긍호, 권인규, 권종해, 권기수, 권익현 등 의병장 6명의 흉상이 건립되어 있으며, 흉상과 함께 어록, 항일 의병 참여자 120명의 명단, 의병항쟁약사가 새겨진 조형물이 있다.
-
최돈호 기공비
최돈호(1870 - 미상)는 강원도 정선 사람으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강원도 강릉군 구정면에서 부하 150여 명을 인솔하고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였다. 1907년 11월 28일에는 민긍호·한갑복 등 약 6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강릉에서 일군경과 교전하면서 정선·평창 등지에서 세력을 펴다가 전사 순국하였다.「강릉 최돈호 기공비(江陵 崔燉浩 記功碑)」는, 1936년 12월 12일 박월리 마을의 발전에 기여한 공을 기리기 위해 마을 주민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비의 규모는 높이 110cm, 폭 44cm, 두께 15cm 규모이다. 정부에서는 최돈호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최선재 묘
최선재(1895 - 1953)는 강원도 강릉(江陵) 사람으로, 1919년 4월 2일 강릉에서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 후 100여 매의 태극기를 창호지와 곶감 꼬지로 만들어 장터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배포하면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4월 14일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본 공적비는 2009년 7월 12일 국가보훈처 및 광복회 강원도지부와 강릉항일운동 얼 선양회의 후원을 받아 세웠다. 1992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강릉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강릉 3·1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일 읍내에서 시작해 외곽 면 소재지로 확산되었고, 이후 5월까지 연 인원 1만 명이 독립을 열망하며 만세운동을 계속 전개했다. 강릉보통학교와 강릉청년회 강릉감리교회 등 비밀결사조직이 상호 연계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펼쳐졌다. 100년 전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선열들과 강릉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항일운동을 기리기 위해 3·1독립만세운동 80주년을 맞아 199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수립기념일에 「강릉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을 건립했으며, 6.2m 높이의 주탑과 애국지사 10인의 흉상, 약사탑, 헌시가 각인된 12m의 병풍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릉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항일운동을 기리는 기념탑이 경포호수 옆에 위치하고 있다.
-
고성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횃불을 들다)
동해안 최초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발원지로서 고성군 애국지사(85명)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되새기고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해, 고성군에서 3·1독립만세운동 기념공원 조성과 기념탑 「횃불을 들다」를 2020년 4월 3일 건립했다. 3·1운동을 의미하는 3개 주탑의 유려한 곡선으로 그날의 횃불을 표현하였고, 기념탑 중심은 독립운동이 이루어진 장소를 의미하며, 바닥은 무궁화 패턴을 적용하였고, 주탑 양옆으로는 동상을 세워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독립운동의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상징화하였다.
-
만해한용운기념관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의 건봉사 입구에 위치한 『만해 한용운 기념관』은 독립운동가이자 불교사상가인 만해 한용운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전시관으로, 조선 선조 임진왜란 때 승장으로 활약했던 사명대사를 기념관인 사명당 의승병 기념관과 함께 있다. 만해 한용운의 영정과 일대기를 알 수 있는 연보 및 사용했던 물건이나 도구 등의 유물, 건봉사와 부속말사에 대하여 기록한 「건봉사급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홀로그램을 통한 시낭송 및 입체영상 프로그램도 선보이고 있다. 만해 한용운은 1907년 건봉사에서 만해라는 당호를 받았고, 이학암 강백으로부터 화엄경과 반야경을 배움으로써 건봉사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건봉사 입구 기념관 앞에는 만해당 대선사 시비 「사랑하는 까닭」, 「오도송」이 자리하고 있다. 정부에서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