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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기념관
이회영(1867 - 1932)는 일제강점기 신민회 중앙위원, 항일구국연맹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우당(友堂). 서울 출신. 아버지는 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이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2월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4월경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呂準)을 만주로 파견하였다. 그 뒤 1908년 헤이그에서 돌아 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한 끝에 국외활동은 이상설이,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우선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에 진력하도록 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W.)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李商在)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상주하여 쾌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하고,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그 해 11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여,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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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주 의거 터 동상
나석주(1892 - 1926)는 황해도 재령(載寧) 사람이다. 그는 재령 명신학교(明新學校) 2학년을 수료하고 농사일을 하다가 23세때 만주로 건너가서 4년간 군사훈련을 받고 27세때에 귀국하여 황해도 겸이포(兼二浦)에서 표면상 점포를 경영하면서 이면으로는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동지를 규합하여 상해의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하는 한편 결사대를 조직하여 한대홍(韓大弘)과 같이 평산군(平山郡) 상월면(上月面) 주재소 일경과 상월면장을 사살하였고 다시 안악군(安岳郡) 친일파(親日派) 부호를 사살한 후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1920년 9월 22일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약하다가 하남성(河南省) 한단군관학교(邯鄲軍官學校)를 졸업하고 중국군 장교로 있으면서 보안육군강무당(保安陸軍講武堂)에 적을 두었으나 이때 봉직전(奉直戰)관계로 퇴학하였다.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한 그는 1926년 4월 천진(天津)으로 가서 김창숙(金昌淑)과 상면하여 김창숙으로부터 조국의 강토와 경제를 착취하는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와 조선은행(朝鮮銀行)·식산은행(殖産銀行) 등을 폭파하여 학정에 시달리는 동포를 구해 달라는 권고를 받고 이를 실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동년 12월 26일 그는 중국인 노동자로 가장하고 폭탄과 권총을 휴대하여 지부이통환공사(芝 利通丸公司)의 역부로 가칭하고 천진(天津)에서 상선 융극호(戎克號)에 편승하여 위해위(威海衛)를 거쳐 이튿날 27일 인천에 도착하였다. 그는 28일 오후 중국청년으로 변장하고 동척(東拓)으로 가서 회사의 상황을 정찰한 다음 그 길로 남대문통에 있는 식산은행(殖産銀行) 일반 통용문으로 들어가 대부계 철책 앞에서 폭탄 한 개를 던졌다. 다시 오후 2시 동척(東拓)으로 가서 수위실 책상에서 무언가 쓰고 있던 조선부업협회(朝鮮副業協會) 잡지기자 고목길강(高木吉江)을 사살하고 2층으로 올라가다가 총소리를 듣고 놀라 따라 올라오던 사원 무지광(武智光)을 쏘아 쓰러 뜨리고 토지개량부(土地改良部) 기술과장실로 들어가서 차석 대삼태사랑(大森太四郞)과 과장 능유풍(綾由豊) 등을 저격한 후 폭탄 한 개를 던졌으나 불발되었다. 그는 다시 층계를 내려와 문밖으로 나가 조선철도회사(朝鮮鐵道會社)로 들어갔다. 정문에 들어서자 회사 수위 송본필일(松本筆一)과 마침 이곳에 왔던 천진당(天眞堂) 점원 김정열(金井悅)을 쏜 후 황금정(黃金町) 길거리로 발길을 옮길 때 경기도 경찰부(京畿道警察部) 경부 전전유차(田畑唯次)를 만나 그를 사살하였다. 황급히 출동한 경찰대와 기마대의 추격을 받은 그는 최후를 각오하고 권총 세발을 자신의 가슴에 쏘고 쓰러졌다. 일경은 그를 총독부 병원에 입원시켜 응급치료를 받게 하였는데 약간 정신이 되살아 나는 듯 하였다. 이때 일경이 그의 이름을 묻자 "나석주(羅錫疇)"라 대답하고, "김창숙(金昌淑)과 밀의하였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일경은 폭탄 두 개, 스페인제 10연발 권총 1정, 탄환 66발을 그 자리에서 압수하였다. 1927년 5월에 동지 이화익(李化翼)이 북경에서 붙잡혀 신의주(新義州)로 압송되자 비로소 그의 의거가 자세히 밝혀지게 되었다. 동월 31일에 그의 장남 응섭(應燮)이 상경하여 사진으로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유해를 인도받아 안장하였다. 응섭(應燮)이 백운학(白雲鶴)으로 변성명한 후 감시망을 뚫고 상해로 가서 이 사실을 알리자 상해의 동지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그의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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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응 기념비
이한응(1874 - 1905)는 대한제국기 한성부주사, 영국, 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 등을 역임한 관료이다. 본관은 전의(全義). 일명 한응(漢膺).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경기도 용인 출신. 이경호(李璟鎬)의 아들이다. 1892년 관립영어학교(官立英語學校)를 졸업하였다. 1894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897년 한성부주사가 되고, 1899년 관립영어학교 교관으로 전출하였다. 1901년 영국·벨기에 주차공사관 3등참사관(駐箚公使館三等參事官)에 임명되어 영국 런던으로 부임하였다. 1903년에는 통훈대부에서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었고, 1904년 주영공사 민영돈(閔泳敦)의 귀국으로 서리공사에 임명되어 대영 외교의 모든 책임을 지고 활약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강제 체결되어 한국의 독립이 흔들리자, 영국 및 여러 외국과 유리한 입장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해 8월 제1차한일협약이 강제로 성립되어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잠식하자, 각국에 주재하는 우리 공사들에게 전신으로 연락, 한국 외교를 위하여 재외사절단이 공동 항쟁을 하도록 토의하였다. 또한 영일동맹의 부당함을 들어 영국 정부에 항의하였다. 그러나 영국 정부가 주영 한국공사관을 폐쇄하는 등 영일동맹을 강화하고 일본이 한국 정부의 주권을 강탈할 음모를 획책하자 이를 개탄하여 1905년 5월 12일 음독자살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후에 국내에 알려져 을사조약 때는 민영환(閔泳煥)·조병세(趙秉世) 등이 순국하는 등 전국 각지에서 원통함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이가 속출하였다. 주영한국공사관 명예총영사 마틴턴의 주선으로 유해는 고국으로 돌아와 경기도 용인에 안장될 수 있었다. 가선대부 내부협판에 추증되었으며, 장충단(奬忠壇)에 배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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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동상
이준(1859 - 1907)은 대한제국기 대한협동회 부회장, 국민교육회 회장, 헤이그 특사단 부사 등을 역임한 항일운동가. 애국계몽운동가이다.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함경남도 북청 출신. 아버지는 이병관(李秉瓘)이다. 1887년(고종 24)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해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純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같은 해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 등과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 운동을 추진하였다. 1904년 일제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 데 주동적 구실을 하였다. 같은 해 일본이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송수만(宋秀晩)·원세성(元世性)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해 총무를 맡고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후속단체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해 부회장을 맡고, 다시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강력히 반대해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4년 12월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해 매국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이에 대항해 윤하영(尹夏榮)·양한묵(梁漢默) 등과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였다. 회장이 되어, 반일진회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황해도 철도(鐵島)에 6개월간 유배당하였다.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된 뒤 1905년 5월 윤효정(尹孝定)·양한묵 등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해 다시 항일국민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전덕기(全德基)·최재학(崔在學)·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을사조약폐기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준이 상소문을 짓고 대한문(大漢門) 앞과 서울 시내에서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전덕기·유성준(兪星濬)과 함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있으면서 교육구국운동을 시작하고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하였다. 또한, 설태희(薛泰熙) 등 동지들과 고향인 함경도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지도해 함경도지방의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발판을 마련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國債報償聯合會議所)를 설립하고 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4월 양기탁·안창호(安昌浩)·전덕기 등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같은 해 6, 7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었다. 이준은 전덕기·이회영(李會榮)·박상궁(朴尙宮) 등의 도움을 받아 고종을 만나 이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이 고종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해 고종의 동의를 받았다. 그리하여 이준은 헤이그특사단의 부사가 되어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정사 이상설과 합류하고, 다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과 합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세계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평화회의장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적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해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냈다. 또 신문에 이를 공표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특사의 활동에 호의적이었으나,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에 격분한 이준은 통분을 누르지 못해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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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비(장충단공원)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 유림은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제출해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떨친 공헌을 한 바, 이를 기념하기 위해 대통령희사금과 국민의 성금 등으로 1972년 10월 서울 중구 장충단공원에 비를 건립하였다. 파리 장서(長書)는 일제의 한국 주권 찬탈 과정을 폭로하고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여 한국의 모든 계층과 사회 집단이 독립을 열망하고 있음을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서한이다. 곽종석, 김복한을 비롯하여 유림 대표 137명이 연서한 이 장서를 김창숙으로 하여금 상해로 가져가도록 하였고 이를 다시 김규식을 통하여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되었으며 또한,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과 국내 각지의 향교에도 배포되었다. 일본은 파리장서 운동에 참가한 유림들은 체포 투옥하는 등 가혹하게 탄압하였으며(제1차 유림단 사건), 이 사건을 계기로 유림계는 한말 구국운동의 전통을 계승하여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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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탑
3.1독립운동기념탑은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식민통치로부터 조국과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개된 3.1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ㆍ발전시켜 널리 국민들의 호국애족정신을 고양하고자 온 겨레의 정성을 모아 중구 장충동 남산공원에 건립되었다.199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제50주년 기념일에 착공하여 3.1독립운동 80주년 기념일인 1999년 3월 1일 준공하였으며, 탑의 높이가 19m 19cm로 이는 3.1독립운동의 거사일인 1919년을 의미한다. 3.1독립운동은 세계 최초의 비폭력 평화운동이며 세계 최초의 천도교ㆍ기독교ㆍ불교의 종교연합운동으로 중국의 5ㆍ4운동, 인도의 무저항운동을 비롯하여 전세계 비폭력 평화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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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기념관
조만식(1883 - 1950)은 일제강점기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회원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고당(古堂). 평안남도 강서 출신. 1883년 2월 1일 출생. 아버지는 조경학(曺景學)이며, 어머니는 진강 김씨(鎭江金氏)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5세에부터 22세까지 평양성 내 상점에서 일하며 소년시절을 보냈다. 23세에 평양 숭실중학(崇實中學)에 입학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8년 일본 동경으로 유학,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10년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유학 중 백남훈(白南薰) · 김정식(金貞植)과 함께 장로교 · 감리교연합회 조선인교회를 설립하였고, 간디(Gandhi, M. K.)의 무저항주의주3에 심취하여 민족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평안북도 정주에 동지인 이승훈(李承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2년 후인 1915년 교장이 되었다. 1919년 교장직을 사임하고 3 · 1운동에 참가하였다가 잡혀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복귀하였으나 일본관헌의 탄압으로 제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1921년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가 되었다. 이 무렵 알게 된 평생의 심우(心友) 오윤선(吳胤善)과 함께 1922년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 그 회장이 되어 국산품애용운동을 벌였다. 1923년 송진우(宋鎭禹) · 김성수(金性洙) 등과 함께 연정회(硏政會)를 발기하여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를 조직하였으나 일제탄압으로 실패하였고,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을 지내다가 1926년 일제에 의해 강제 사임당하였다. 1924년 신간회(新幹會)에 참여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활동이 좌절되었다. 1930년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으로 민족지도자 육성에 이바지하였고,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에 추대되어 언론을 통하여 민족의 기개를 펴는 데 앞장섰다. 1936년 전국적인 민족정신 앙양운동의 일환으로 평양에서 을지문덕장군수보회(乙支文德將軍修保會)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평양조선인사회의 유일한 공회당이었던 백선행기념관(白善行記念館)을 개설하고 인정도서관(仁貞圖書館)을 세웠다. 1943년 지원병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해온 재조선군일본인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郎]의 면담요청을 거절하여 한때 구금당하였다. 광복 직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그 위원장이 되었다. 소련군정당국이 그들이 만든 최고행정기관인 북조선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다. 이 조선민주당을 통하여 북한에서 반탁운동을 전개하다가 1946년 1월 5일 소련군에 의해 고려호텔에 연금당하였다. 그 뒤 생사가 분명하지 않은 가운데 1950년 6 · 25전쟁 직전 평양방송이 그와, 체포된 간첩 김삼룡(金三龍) · 이주하(李舟河)의 교환을 제의하였다. 공산군의 평양철수시 그들에 의하여 총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평생을 기독교정신의 실천가로서 생활하였고, 일제에 대하여는 비폭력 · 무저항 · 불복종의 간디즘으로 대항하였다.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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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주 집(정동제일교회)
이필주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경기도 고양(高陽) 출신이며, 기독교(基督敎)인이다. 선천적인 무인 기질로서 20세에 한말(韓末) 군대에 입대, 단시일에 승진하여 장교로서 8년간 복무하였다. 1907년(융희 1)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군대생활을 청산하고, 남대문에 있는 상동(尙洞) 예배당의 전덕기(全德基) 목사를 중심으로 한 상동청년회(尙洞靑年會)에 가입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주권이 완전 상실되자, 통분하여 일주일간 단식하고 두문불출하였다. 그 후 종로 청년회관(y.m.c.a.)의 초대 체육교사로 재직하다가 상동 공옥소학교(尙洞攻玉小學校) 체육교사로 취임하여, 애국정신과 광복의 큰 뜻을 청소년에게 가르쳤다. 또 모범적인 기독교 신자로서 미신타파와 신분차별의 배격 등 신생활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신학교(神學校)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정동교회(貞洞敎會)에서 목자생활을 하며 조국독립에 대한 이상을 품고 이상재(李商在)·최병헌(崔炳憲)·최성모(崔聖模)·오화영(吳華英)·신홍식(申洪植)·박동완(朴東完)·오정도(吳貞道)·현 순(玄楯) 등과 자주 만나 친분을 두터이 하였다.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이 거의 구체화되던 1919년 2월 27일 자기의 집에서 이인환(李寅煥)·박희도(朴熙道)·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泰永)·김창준(金昌俊)·신석구(申錫九)·오화영·최성모·박동완 등의 기독교측 대표들과 만나 함태영이 최 린(崔麟)으로부터 가져온,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서류의 초안을 회람하고, 기독교측의 민족대표로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기로 하였다. 28일 밤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최종적으로 독립운동 전개에 따른 계획을 검토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孫秉熙)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서울의 여러 교회에서 종교활동과 육영사업에 힘쓰다가, 말년에는 수원 남양교회(南陽敎會)를 맡아보면서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등 일제에 항거하다가 병사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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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여성상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면서 남녀 학생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서울 중구 정동 거리에 항일여성을 표현한 동상이 설치됐다. ‘거사 전야’는 한복을 입은 여학생이 등불을 비추고, 교복을 착용한 다른 여학생이 독립선언서를 찍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동상 건립위원회는 취지문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독립투쟁에 여성은 남성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며 “항일여성들은 자주독립 의지를 일깨우는 교육사업과 계몽운동, 문화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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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집 터
남궁억(1863 - 1939)는 일제강점기 황성신문 사장, 대한협회 회장, 배화학당 교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이다. 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치만(致萬), 호는 한서(翰西). 서울 출신. 아버지는 도사(都事) 남궁영(南宮泳)이다. 1884년(고종 21) 영어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을 수료하고 해관(海關)의 견습생으로 있다가, 1886년(고종 23) 내아문(內衙門) 부주사(副主事)가 되었다. 1887년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영국 · 러시아 · 독일 순방길에 올라 홍콩까지 갔으나, 청나라주1의 간섭과 방해로 2년간 홍콩에서 머물다가 소환되어 돌아왔다. 1889년 궁내부(宮內府)별군직(別軍職)을 거쳐, 1893년 칠곡군수를 지냈다. 1894년 갑오개혁 내각에 내부 토목국장으로 중용되어 서울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그 해 7월 서재필(徐載弼) ·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를 창립, 중앙위원 · 서기 · 사법위원 · 평의원 등에 선출되는 등 고위급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1898년 9월 나수연(羅壽淵) · 유근(柳瑾) 등과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창간하고 사장에 취임, 국민 계몽과 독립협회 활동을 지원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를 전제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개혁, 의회를 설립하고 대대적 개혁을 단행하려는 독립협회운동 지도자로 활동하다, 1898년 11월 17명의 지도자와 함께 붙잡혔다. 독립협회가 해산당한 뒤인 1900년 7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을 외국 신문에서 옮겨 실어,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되었다. 1902년 5월에도 『황성신문』에 일본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래 우리나라를 침략해 들어오면서 러시아와 맺은 러 · 일협정의 침략적 성격을 논박한 사설을 실었다. 이 사건으로 총무 나수연과 함께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4개월 만에 석방되었다. 1903년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柳東根)이 『황성신문』 사장 남궁억과 총무 나수연이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등과 공모,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진상이 밝혀져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년 3월 고종의 간곡한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사임한 뒤 귀경하였다. 1906년 2월 다시 양양군수에 임명되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7월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일본이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삼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정미칠조약주2을 체결,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1907년 11월 권동진(權東鎭) · 여병현(呂炳鉉) · 유근 · 이우영(李宇榮) · 오세창(吳世昌) · 윤효정(尹孝定) · 장지연(張志淵) · 정운복(鄭雲復) · 홍필주(洪弼周)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취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기관지로 『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08년 4월 강원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창립해 회장으로 활동하며, 교육구국운동 잡지로서 『교육월보』를 발행하였다. 1910년 8월 일본이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새세대 교육현장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 그 해 10월 배화학당(培花學堂) 교사가 되었다. 1912년에는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 고취, 애국가사 보급, 한글서체 창안 및 보급에 힘썼다. 1918년 건강이 악화되어 친지들의 권고에 따라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牟谷]로 낙향하였다. 1919년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애국적 찬송가를 만들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들에 보급하였다.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되었다. 노령이 참작되어 석방되었으나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여독으로 사망하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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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사 표지석
『독립신문』은 189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이다. 국문판과 영문판으로 구성되었다. 계몽적 신문의 필요성을 인식한 서재필과 유길준, 개화파 내각의 합작으로 탄생했다. 거액의 정부 예산이 지원되어 1896년 4월 7일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근대민족주의·민주주의·자주화 근대화 사상을 강조하며 국민을 교육·계몽하는 일에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독립협회가 수구파정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하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결국 정부의 매각 강요에 굴복해 1899년 12월 4일자 신문을 끝으로 종간했다. 정부는 신문사 매수 후 속간을 약속했다가 영구 폐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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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진, 이위종 집
이위종(1887 - 미상)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로 파견된 독립운동가이다. 주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李範晋)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유럽 각국을 순회했으며,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가 유창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의하여 외교권이 박탈되어 각국에 있는 한국공사관이 폐쇄되고 주재 공사에게는 철수령이 내렸으나, 주 러시아 한국공사 이범진은 2등참사관으로 일하고 있는 아들 이위종과 함께 철수하지 않고 러시아 수도 페테르부르그에 체류하였다.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 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있자, 서울에서는 이 회의에 한국대표를 참석시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기 위하여 정사(正使)에 이상설(李相卨), 부사(副使)에 이 준(李儁)과 이위종 등 세 밀사를 임명하였다. 이준은 황제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가지고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에 가서 이미 1년 전에 망명해 와 있는 이상설과 만나 합류하고 함께 페테르부르그에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밀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밀사는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요청하였으며 1907년 6월 25일 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한국 대표로서 공식으로 회의장에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활동에는 프랑스어와 영어에 유창한 이위종이 교섭과 문서 작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으며, 열강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반면에 신문기자들과 네덜란드의 현지 여론은 한국대표들의 활동에 호의적인 인사들도 있었다. 이에 일제의 한국 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무효임을 알리는 공고사(控告詞)를 이상설 이 준 이위종 등 세 특사의 연서로 작성하여 6월 27일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제출하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이를 공표해서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프랑스어로 된 이 장문의 공고사와 그 부속문서의 프랑스어 본은 이위종이 작성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위종은 7월 9일에 열린 각국신문 기자단의 국제협회(國際協會)에서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a plea for korea)」란 강연을 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은 일본이 무력으로 위협하여 강제 체결된 것으로 무효이며, 한국의 국민과 황제는 한국의 독립과 세계 평화를 열망하고 있으므로 세계가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회합에는 각국대표와 이름 있는 언론인 및 각국 수행원들까지 광범위하게 참석했는데, 이위종의 연설은 모든 참석자들로 하여금 감명과 찬사를 금치 못하게 했다. 그 결과 즉석에서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의 박수로서 의결하게 까지 하였다. 이위종의 이 강연의 성과는 당시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신문인 『헤이그신보(haagsche courant)』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국제여론의 환기에 상당히 큰 작용을 하였다. 밀사들은 투숙한 호텔정문에 태극기를 걸고 열성적으로 활동하다가 밀사 중의 이 준이 7월 14일 순국하였다. 이위종은 이상설을 따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을 순방하고 러시아로 돌아가서 군정부(軍政府)와 권업회(勸業會)에 참가하는 등 구국운동에 생애를 바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이범진(1852 - 1911)은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部事)가 되었다. 1895년 명성황후가 친로정책을 표방할 때, 친로파에 가담하여 농상공부협판(農商工部協辦)으로 대신서리가 되었으나 명성황후시해사건 후에 사임하였다. 1895년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을 주도하였으나 실패하여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金弘集) 등을 몰아내고 친러내각을 성립시키고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이후 1897년에 자원하여 주미공사로 가서 외교에 노력하였다. 1900년에는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독일 · 오스트리아 · 프랑스 공사를 겸임하였다. 그런데 주러시아공사로 있을 때 러시아의 용암포(龍巖浦) 조차(租借) 요구에 대해 대한제국정부가 승인한다는 공문이 도착하자, 용암포 조차를 강경하게 반대하며 공문을 러시아정부에 전달하지 않아 파면되었다. 그 뒤 서리공사 김인석(金仁錫)이 공문을 러시아에 전달하면서 복직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외교권 등 국권을 박탈한 다음 각국 주재 한국공사들을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였다. 그리고 양국 황제의 밀사(密使)의 명목으로 러시아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주1에 고종이 파견한 밀사 이상설(李相卨) · 이준(李儁) 등이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협의하여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들 이위종(李瑋鍾)을 밀사의 일원 겸 통역으로 동반하게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에게 후원을 요청하여 밀사들이 러시아 호위병의 보호를 받아 헤이그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조처하였다. 또한 러시아대표의 알선으로 각국 신문기자들에게 한국밀사들이 연설할 기회를 만드는 등 헤이그밀사 파견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1908년 연해주에서 이범윤(李範允)이 의병을 조직할 때 지원금을 보냈다. 보냈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못이겨 1911년 1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했고 실패하자 목을 매 자결하였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한민학교(韓民學校)가 양옥 대건물로 신축해 다시 개교할 때 유지로 남겼던 1,000루블의 거액이 기금으로 쓰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이,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