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순사부장 노구치 처단 장소

유형
조형물
주소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606-1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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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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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28일, 사강시장에서 진행된 만세운동을 진압하던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애국지사 홍면옥에게 총상을 입히고 군중을 피해 도망치다 붙잡혀 처단 당한 장소에 세워진 조형물이다.

1919년 3월 21일, 동탄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송산·서신·마도’, ‘향남·팔탄’, ‘장안·우정’ 등 화성 곳곳으로 만세운동이 번져갔다. 1919년 3월 28일 오후 2시 경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 송산면사무소 뒷산과 그 부근에서 사강리 주민 홍면옥 등의 주도로 만세를 불렀다. 사강리 장날을 맞이해 송산면과 서신면 등지에서 모인 500~600명의 군중이 함께 구한국국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을 외쳤다. 오후 3시경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송산면사무소 뒤에서 홍면옥·홍효선·예종구 등 3명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권총을 발사하여 홍면옥은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격분한 군중이 ‘순사를 때려 죽이라’고 외치며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형세가 위험해졌다.

노구치 순사부장은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의 경찰관주재소에서 남양 방면으로 도주했다. 그러자 200명가량이 군중이 추적하여 자전거를 넘어뜨리고 순사부장을 돌과 몽둥이 등으로 난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수사부장이 사망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후 여러 날에 걸쳐 경찰관헌과 수비대가 사강리의 가옥 200여호를 불태우고 10여인을 총살하였다는 사실이 홍면옥, 문상익의 고등법원 상고추가취의서에 기재되어 있다. 또 수원경찰서에서의 고문 상황에 대한 서술과 함께 경찰 신문 과정에서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최소 고문 과정에서 1명 사망, 사강리에 들어온 군경의 보복 과정에서 10여명 사망이 확인된다. 10여명의 정확한 수치를 확정할 수는 없어서 11~16명으로 추정한다.

탐방로그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606-1 송산농협 좌측 농협 건물 벽면 '순사부장 노구치 처단 장소'를 찾았다.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를 처단했던 역사적인 현장을 일제의 탄압에 맞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독립운동을 이어나간 주민들의 모습을 조형물로 형상화하여 표현하였다. <순사부장 노구치 처단 장소 조형물>에 관한 안내판과 같이 설명문이 있었으면 더 빛날 것 같다.

인물정보

성명
오광득
한자명
吳光得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9 ~ 1947
본적
경기도 수원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04

공적개요

1919. 3. 28 경기도(京畿道) 수원군(水原郡)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에서 군중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 피체된 홍면옥(洪冕玉)에게 수원경찰서 순사 부장이 권총을 발사하자 이에 군중과 함께 순사를 처단하기로 결의하고 왕광연(王光演) 등의 선도로 도망치는 순사를 추적하여 돌을 던져 처단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6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규선
한자명
李奎善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5 ~ 1941
본적
경기도 화성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68

공적개요

1919. 3.1운동(運動)시 동지(同志) 홍면욱(洪免旭) 예종구(芮鍾九)등과 같이 부락민을 동원(動員)하여 만세 시위(萬歲示威)를 전개(展開)하며 주재소(駐在所)를 습격 방화하고 일인(日人) 순사부장 야구(野口)를 살해하고 체포망을 피하여 만주로 망명. 1923~1928년 임시정부의 밀령(密令)을 받고 3차(次)에 걸쳐 입국하여 군자금 모집에 종사하였음. 1928년 8월 사리원서에 체포되어 10일간 구류처분. 1931년 1월 군자금모집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31년 1월 2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의 판결을 받고 복역. 1941년 9월 15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옥사하였음. (치안국 지문대조조회(治安局指紋對照照會)) (인 증) 여주 능서면장(驪州陵西面長) 능서지서장(陵西支署長) (보증인) 유장순 외(劉長淳外) 15인(人)

인물정보

성명
전도선
한자명
全道善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미상
본적
전라남도 기타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19

공적개요

1919년 3월 28일 경기도 수원군(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를 주도한 홍면에게 총을 발사하여 부상을 입힌 일본인 순사부장을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7년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최춘보
한자명
崔春甫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7 ~ 1936
본적
경기도 수원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2009

공적개요

1919년 3월 26일 경기(京畿) 수원군(水原郡)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 소재 송산면사무소(松山面事務所) 앞에서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를 외치고, 3월 28일 송산면(松山面) 사강(沙江)거리 경찰관 주재소(警察官駐在所) 부근에서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시위주도자 홍토면(洪土冕)의 체포과정에서 발포한 일본인 순사에게 돌을 던져 척살한 후 체포되어 징역 6년(징역 4년 7월 20일로 감형(減刑))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홍복용
한자명
洪福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3 ~ 1965
본적
경기도 수원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5

공적개요

1919년 3월 26일 경기도(京畿道) 수원군(水原郡)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수십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고, 동월(同月) 28일에도 송산면사무소(松山面事務所) 뒷산 등지에서 1,0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獨立萬歲運動)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음.

인물정보

성명
홍준옥
한자명
洪㻐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8 ~ 1945
본적
경기도 화성
포상훈격
독립장
포상년도
1977

공적개요

3.1 운동에 참여하여 수원시(水原市) 송산면(松山面)에서 주동적으로 독립만세시위를 하고 송산면(松山面) 경찰관주재소순사부장을 야구광삼(野口廣三)을 살해하여 징역 12년형을 받은 공적이 있으므로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홍면옥
한자명
洪冕玉
운동계열
해당없음
생몰년도
1884~? ~ ?
본적
경기도 수원
포상훈격
해당없음
포상년도
해당없음

공적개요

1884년 경기도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현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51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홍면(洪冕)이라고도 불렸다. 1914년 9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횡령죄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고, 1917년 12월에는 인천지청에서 도박죄로 태형 30도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홍면옥은 1919년 3월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발표 소식을 듣고 그 취지에 찬동하여 송산면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홍면옥은 그와 뜻을 같이 한 왕광연(王光演)·홍명선(洪明善)·홍태근(洪泰根)·홍준옥(洪㻐玉)·차경현(車敬炫)·김교창(金敎昌) 등과 함께 1919년 3월 25일 송산면사무소 부근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3월 28일 오후 2시 경에는 송산면사무소 뒷산과 그 부근에서 1,0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모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당시 치안 방해를 이유로 출동한 노구치 고조[野口廣三]에게 체포되어, 체포 과정에서 노구치 고조가 권총을 발사하여 오른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 홍면옥의 총상으로 분노한 군중은 노구치 고조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둘러 그를 처단하였다. 홍면옥은 1920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살인 교사 혐의로 징역 15년을 판결받았으나, 1920년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일부 취소 판결을 받아 징역 12년이 확정되어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4년의 은사(恩赦)와 1927년의 대사령(大赦令) 등으로 징역 8년 10월로 감형되어, 1927년 12월 23일 만기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송산면 육일리에 대교서당을 열고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아들 홍진후의 증언에 의하면, 홍면옥은 대교서당에서 태극기를 그리는 법과 애국가를 가르쳤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송산면 치안대장을 맡았으며,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도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수원군에서는 수원군인민위원회가 수원군청을 접수하고 자치적 업무를 수행하였다. 1945년 12월 23일 수원극장에서 인민위원회 대표회의가 개최되어 수원군 각 읍면 대표 1,500여 명이 참석하였는데, 홍면옥은 이하영, 박지명, 박승극 등과 함께 인민위원회 임시집행부에 선임되었다. 1946년 민족주의민족전선[民戰]이 결성되면서 인민위원회는 이에 수렴되는 형태를 취하였다. 1946년 2월 26일 민족주의민족전선 경기도위원회 결성대회가 열렸으며, 홍면옥은 상임위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행적으로는 1946년 3월 이하영과 함께 수원군 인민위원회 대표자회의 주석단에 앉은 사실이 확인된다. 1946년 11월 5일 홍면옥이 검거된 사실을 알리는 기사에 의하면, 홍면옥은 민족주의민족전선 경기도위원회 의장뿐만 아니라, 송산면 인민위원회장을 맡은 것이 확인된다. 1948년 8월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도 홍면옥의 이름이 확인되어 월북한 것으로 추측되며, 이후 행적이나 사망과 관련하여 알려진 바가 없다.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