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아카데미 역사기록 백과사전

3.1운동 부조벽

유형
조형물
주소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도진리 199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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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3.1운동 부조벽은 1919년 4월 6일에 우곡면사무소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록한 사적이다. 야정동(野亭洞)에 사는 박재필과 도진동(桃津洞)의 박영화(朴英華)가 주모하여 고령에서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박차천(朴且千)을 시켜 동네를 돌며 동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고 마을 주민들은 이에 호응하여 곧바로 강변에 모였다. 1919년 4월 6일 밤 11시경 주민 30여 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여 마을을 일주한 뒤, 우곡면사무소 앞으로 몰려가 독립의 의지를 전달하였다. 자정을 넘겨 시위가 계속되자 면장이 나와 이들의 해산을 간청하였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 경찰은 주동 인물 박재필과 박영화를 비롯하여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인물정보

성명
강복이
한자명
姜福伊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9 ~ 1953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에서 박재필(朴在弼)·박영화(朴英華) 등과 주동이 되어 동민과 함께 독립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강복이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구갑출
한자명
具甲出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7 ~ 1924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19년 4월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도진동(桃津洞)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구갑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경술
한자명
金庚述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66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7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에서 박재필(朴在弼)․박영화(朴英華) 등과 주동이 되어 동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경술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구범
한자명
金具範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1980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7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에서 박재필(朴在弼), 박영화(朴英華) 등과 주동이 되어 동민과 함께 독립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구범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김순동
한자명
金淳同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4 ~ 1934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8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저녁에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도진동(桃津洞)에서 박영화(朴英華)의 권유로 김경술(金景述) 등과 함께 마을일대와 우곡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김순동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도말용
한자명
都末用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9 ~ 1988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9

공적개요

1919. 4. 8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대곡동(大谷洞) 김성원의 집앞 노상(路上)에서 여러 동지를 권유하여 함께 대한독립 만세(大韓獨立萬歲)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도말용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경회
한자명
朴景會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7 ~ 1942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7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에서 박재필(朴在弼) 등과 함께 마을을 시위행진하고, 우곡면 사무소 등지에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경회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기로
한자명
朴基魯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1 ~ 1938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4.8밤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대곡리(大谷里)에서 독립 만세 거사(獨立萬歲擧事)를 결심(決心)하고 동리 청년(洞里靑年)들에게 지금(至今)이야말로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일으켜서 독립(獨立)할때라고 강조(强調)하고 스스로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니 주민(住民)50여명(餘名)이 따라 고창(高唱)하며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1년을 받아 옥고(獄苦)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박기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성근
한자명
朴性根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32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에서 박재필(朴在弼)·박영화(朴英華) 등과 주동이 되어 동민과 함께 독립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쌍암
한자명
朴雙岩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7 ~ 1948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에서 박재필(朴在弼)·박영화(朴英華) 등과 주동이 되어 동민과 함께 독립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쌍암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영순
한자명
朴英詢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8 ~ 1967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4월 초순 박재필(朴在弼), 박영화(朴英華)의 권유에 따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도진동(桃津洞) 개천가에서 동네 주민 20여 명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고 우곡면사무소(牛谷面事務所) 안팎에서 만세를 연호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영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영우
한자명
朴英友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65 ~ 1932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에서 박재필(朴在弼)·박영화(朴英華)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영우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영화
한자명
朴英華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0 ~ 1952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도진동(桃津洞)에서 박재필(朴在弼)과 공모(共謀)하여 독립만세(獨立萬歲)를 부르기로 결의하고 동민(洞民)들을 동원하여 우곡면사무소(牛谷面事務所)에 이르기까지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행진하는 등 활동하다가 일경(日警)에게 체포(逮捕)되어 징역 1년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용학
한자명
朴龍鶴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54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4. 8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대곡동(大谷洞)에서 박기로(朴基魯)의 제의(提議)에 따라 이민(里民) 다수를 규합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용학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재필
한자명
朴在弼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4 ~ 1957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저녁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도진동(桃津洞)에서 박영화(朴英華)와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그날 밤 9시부터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우곡면사무소와 동리 일대를 행진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재필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정렬
한자명
朴貞烈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0 ~ 1971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밤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에서 박재필(朴在弼)과 박영화(朴英華)의 권유를 받아 동민들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정렬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차천
한자명
朴且千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1 ~ 1955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에서 박재필(朴在弼)·박영화(朴英華)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박차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박채환
한자명
朴埰煥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2 ~ 1962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4. 8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사무소(牛谷面事務所) 앞에서 고령경찰서원(高靈警察署員) 4명(名)으로부터 독립운동(獨立運動)에 대(對)한 경고(警告)를 듣고 귀가(歸家)하는 군중(群衆)에게 독립만세 시위(獨立萬歲示威)를 종용하여 스스로 대한독립 만세(大韓獨立萬歲)를 선창(先唱)하니 수십명(數拾名)의 군중(群衆)이 호응(呼應)하여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를 하던중 피체(被逮)되어 징역1년을 받은 주동자(主動者)의 사실이 확인됨.

박채환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이상준
한자명
李尙俊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미상 ~ 미상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2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밤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도진동(桃津洞) 천변(川邊)에서 박재필(朴在弼)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동내(洞內) 및 동 면사무소 앞 등에서 “조선독립만세(朝鮮獨立萬歲)”를 부르면서 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이상준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정공출
한자명
鄭公出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1 ~ 1924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에서 박재필(朴在弼)·박영화(朴英華) 및 동민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정공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정만도
한자명
鄭萬道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1974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06

공적개요

1919년 4월 6일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에서 박재필(朴在弼)·박영화(朴英華) 등과 주동이 되어 동민과 함께 독립시위를 전개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정만도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한광룡
한자명
韓光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1 ~ 1957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4. 8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대곡동(大谷洞)에서 박기로(朴基魯)의 제의(提議)에 따라 리민(里民) 다수를 규합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한광룡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한용발
한자명
韓用發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76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4.8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대곡동(大谷洞)에서 박기로(朴基魯)의 제의(提議)에 따라 리민(里民) 다수를 규합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활동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한용발의 발자취

인물정보

성명
한이군
한자명
韓二君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7 ~ 1938
본적
경상북도 고령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6

공적개요

1919. 4. 8 경북(慶北) 고령군(高靈郡) 우곡면(牛谷面) 대곡동(大谷洞)에서 박기노(朴基魯)의 선창에 따라 한용발(韓用發),도말용(都末用) 등의 청년들과 같이 대한독립만세(大韓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한이군의 발자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