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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 3.12독립만세운동 기념탑

유형
기념탑·기념공원·기념관 | 안내판·표지석
주소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 산8-2

사적지 지도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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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개요

1919년 3월 12일 인동 진평동 3.12독립만세운동은 일제치하 최대의 항일 민족항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경상도 지역에서는 3월 8일 대구 개성학교 학생의거를 시발로 의성비안과 인동진평동, 김천, 포항을 거쳐 안동과 경주 등지로 만세운동이 확산됐다. 당시 경북 중서부 지역에서는 3월 12일과 이틀뒤인 14일 인동에서 만세운동이, 4월 3일 해평, 4월 8일 임은동, 4월 12일 선산장터 등지에서 연속해 시위가 일어나 도내의 만세운동의 열기를 고조시켰다. 인동 3.12독립만세운동의 발단은 인동 진평동 출신의 이내성, 이범성, 이상백 등이 1910년 8월 일제의 무력침략에 한일합병이 되자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거사가 진행된 것이다. 3.1독립만세운동이 있은 뒤 3월 7일 대구 계성대학교에 재학중이던 이영식이  등사판으로 등사된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동지인 이내성 애국지사와 함께 진평동 유지 이상백을 찾았으며, 이범성 등과 함께 거사를 논의했고 이어서 같은 동리의 이영래, 임점석, 임용섭, 박명언, 권영해 등과 상의해 모두의 동의를 받아냈다. 3월 12일로 거사 날짜를 결정한 이들은 독립선언서 등사본과 태극기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거사 당일 박영언 등은 동리의 각 호를 방문해 오후 8시 현재 인동3.12독립운동만세 기념탑이 위치한 진평동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통해 우리 민족이 일제에 항거해 궐기한다는 사실을 알리며 참여를 독려했다. 이상백과 이영식은 교대로 만세바위 위에 올라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독립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이를 앞당기기 위해 힘차게 만세를 통한 시위운동을 전개해야 된다는 사실을 강력히 호소하며 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인동 3.12 만세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달려온 일제 군경들은 주동 인물 8명을 체포했고 만세시위대는 강제로 해산당했다. 1차 만세 사건으로 항일 저항의식이 고취됐으며 이틀 뒤, 대구 계성학교 학생 김도길은 다시 진평동으로 들어와 청년 유지 박봉술과 김성윤을 만나 의거를 다시 논의했으며 일제 군경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3월 14일 오후 9시경 뒷산 만세바위를 중심으로 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며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인물정보

성명
권경보
한자명
權景甫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1 ~ 1959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3. 14 밤 9시경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거동 뒷산에서 이상백(李相柏), 이내성(李乃城) 등을 중심으로 계획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여러 동지들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권영해
한자명
權永海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5 ~ 1947
본적
경상북도 대구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12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교회(眞坪敎會) 목사(牧師)로 재직하면서 진평동(眞坪洞) 뒷산에서 동민 200여명을 규합(糾合)하여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시위를 하였고 동년(同年) 3월 14일에도 동일 장소(同一場所)에서 동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주도하다 일경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 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未決期間)을 합산하여 11월 11일간의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도길
한자명
金道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1984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8

공적개요

1919. 3. 14 밤 경북(慶北) 潻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 뒷산에서 동민(洞民)들을 주도하여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시위(示威)를 전개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김성윤
한자명
金性允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6 ~ 1957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4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에서 김도길(金道吉) 박봉술(朴鳳述)등 여러 동지(同志)들과 함께 2백여명(百餘名)의 동민(洞民)을 동리(洞里) 뒷산(山)에 집결(集結)시켜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고 시위 운동(示威運動)을 전개(展開)하다가 일경(日警)에게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근술
한자명
朴根述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0 ~ 1960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3. 12 오후 8시 경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 뒷산에서 동민 2백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시위를 전개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명언
한자명
朴明彦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3 ~ 1948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12~3. 14일간의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3.1운동 만세시위계획에 참가하여 태극기(太極旗)를 만들며 독립선언문을 동리(洞里)에 붙이게 하는 등 활동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10월을 받았으나 미결기간을 합산하여 11월18일간 옥고를 치른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봉술
한자명
朴鳳述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1958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 3. 14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독립만세시위에 가담하여 동내 뒷산에 모인 시위군중 200여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체포되어 징역 1년형(年刑)을 언도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삼봉
한자명
朴三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2 ~ 1975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4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 뒷산에서 2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활동하다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박순석
한자명
朴順石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5 ~ 1958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2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 거사를 준비한 후 3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행진하고 2차로 3.14 약목(若木)장날을 기하여 200여명과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하다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서기옥
한자명
徐琦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8 ~ 1934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2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 뒷산에서 2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활동하다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서천수
한자명
徐千壽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7 ~ 1934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2 경북(慶北) 칠곡군(漆谷軍)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 뒷산에 올라가서 2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다가 피체(被逮)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이내성
한자명
李乃成
운동계열
국내항일
생몰년도
1893 ~ 1927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1919년 대구(大邱) 3.1운동시 동민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피체되어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1년 6월형을 받었으며 1927. 10. 28 조선은행 대구지점(朝鮮銀行大邱支店) 폭파계획의 총참모로 활동하다 일경의 지목을 받어 피신하다가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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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범성
한자명
李範成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0 ~ 1967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8

공적개요

1919년 3월 7일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에서 이상백(李相佰), 이내성(李乃成) 등과 독립만세’(獨立萬歲) 운동(運動)을 일으키기로 결의, 동민(洞民) 60여명을 권유하여 모집하고 동월(同月) 12일부터 14일사이에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곳곳에 붙인 후 마을 뒷산 기슭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逮捕)되어 불기소(不起訴) 처분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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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상백
한자명
李相栢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6 ~ 1965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경북 칠곡 인동시장(慶北漆谷仁同市場)에서 3.1운동(運動)을 주동(主動)하여 1919. 4. 15 대구지법(大邱地法)에서 2년형(年刑)을 언도(言渡) 받았으며 해 지역(該地域)에서 시위(示威)를 주동(主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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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영래
한자명
李榮來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901 ~ 1940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2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에 올라가서 2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피체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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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영식
한자명
李永植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7 ~ 1981
본적
경상북도 대구
포상훈격
애국장
포상년도
1990

공적개요

3.1운동 및 1919.4 대구 철시운동(大邱撤市運動)으로 전후 2차에 걸쳐 2년 복역하였으며 출옥 후에는 만주(滿洲)에 들어가 목사직(牧師職)에 있으면서 최만혁(崔萬赫) 등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고 교민들의 독립사상과 민족의식을 고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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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이윤약
한자명
李允若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79 ~ 1959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4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2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고창 시위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임동석
한자명
林東碩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1962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3

공적개요

1919. 3. 14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 노상(路上)에서 한국(韓國)의 독립(獨立)을 계획하고 예수교 신도 허도봉(許道封)외 수명과 함께 한국독립 만세(韓國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며 활동(活動)하다 체포(逮捕)되어 태(笞) 90도(度)를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임삼선
한자명
林三先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5 ~ 1966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4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2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고창 시위하다 피체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임용섭
한자명
林龍燮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9 ~ 1967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4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200여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고창 시위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임점석
한자명
林点錫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6 ~ 1975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2

공적개요

1919. 3. 12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 뒷산에 동지들을 모이게 한 후 사전에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민족자결의 취지를 설명하며 군중을 선도,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시위를 하다가 피체되어 징역 8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장상건
한자명
張尙建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8 ~ 1969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1

공적개요

1919년 4월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逮捕)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장영직
한자명
張永稷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9 ~ 1929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2010

공적개요

1919년 3월 14일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체포(逮捕)되어 징역 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장주서
한자명
張珠瑞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83 ~ 1935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5

공적개요

1919. 3. 12. 오후 8시 경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 뒷산에서 동민 2백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만세시위를 하다 피체(被逮)되어 징역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인물정보

성명
장준현
한자명
張浚鉉
운동계열
3.1운동
생몰년도
1893 ~ 1950
본적
경상북도 칠곡
포상훈격
대통령표창
포상년도
1996

공적개요

1919.3.14 오후 9시경 경북(慶北) 칠곡군(漆谷郡) 인동면(仁同面) 진평동(眞坪洞) 뒷산에서 동민 2백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등 시위를 하다 피체되어 징역6월을 받은 사실이 확인됨.

3.1운동

사건설명

3.1운동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기미년) 3월 1일 전후로 일으킨 거족적인 독립 만세운동이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일본 도쿄의 2.8 독립선언, 고종의 인산일 등을 계기로 계획되어, 마침내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에 의한 독립선언서 낭독과 더불어 탑골공원에서 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시위행진을 벌이며 거행되었다. 이날의 거사는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만주, 북미 등 해외 등지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세계에 우리 민족의 실상을 알림과 동시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자주 독립사상 고취 등의 의의를 거두었으나, 동시에 일제가 민족 분열을 위해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통치로 바꾸는 원인이 되었다.

애국계몽운동

사건설명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과 산업, 언론 진흥을 통해 민족의 실력을 키워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 지식인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였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신민회가 있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단체의 활동으로는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 신문과 <대한자강회월보>, <대한협회회보> 등 기관지 또는 학회지 발간을 통한 민중계몽운동이 있다. 또한 보광학교, 한남학교 등 학교 설립과 <보통교과동국역사>, <동국사략>, <대동역사략> 등 교과서 편찬을 통한 교육계몽운동, 그리고 국채보상운동 등의 경제구국운동 등을 펼치며 국력을 키우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다.

한국 광복군

사건설명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 군대로, 1919년부터 군사조직법 제정을 통해 임시정부의 군대를 창설하려는 노력이 존재했으나 마침내 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 정착하면서 김구 등의 주도하에 1940년 창설되었다. 총사령에 지대형, 참모장에 이범석, 총무처장에 최용덕 등이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30여 명에 불과했으나 병력 모집에 몰두하고 1942년 조선의용대의 편입을 거쳐 1945년 4월경에는 564명으로 확대되었다. 1945년, 임시정부의 주석이던 김구는 미국전략사무국 책임자와 공동작전을 협의하여 한국광복군을 국내에 침투시키는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실행에 옮기기 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며 한국광복군의 진공작전은 무산되었고, 1946년 해체되었다.

한말 의병운동

사건설명

항일의병운동에는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다.
1895~1896년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으로, 을미사변 후 왕후폐위조칙 발표, 단발령 시행을 계기로 일어났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대개 그 지방의 유명한 유생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대표적으로 유인석, 이필희, 서상렬을 비롯하여 춘천의 이소응, 이천과 여수의 박준영과 김하락, 강릉 여주의 민용호 등이 활약하였다.
1905~1906년의 을사의병은 러일전쟁 발발, 한일의정서 체결 등으로 고조된 항일의식이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을 계기로 폭발한 구국항일의병이다.
대표적으로 최익현 의병진, 신돌석 의병진과 더불어 민종식과 안병찬 등이 주축이 된 홍주의병, 그리고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등이 있다.
1907~1910년의 정미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 체결, 대한제국군대 강제해산 등을 계기로 발생하였다. 특히 1907년 8월 강제로 해산된 군인들의 대일항전에서 비롯되었고, 1906년 후반으로 접어들며 기세가 누그러졌던 을사의병이 이를 계기로 하여 거국적으로 확대 및 발전하였다. 원주진위대 해산군인 민긍호와 박준성, 경상북도의 이강년과 신돌석, 경기도의 허위와 연기우, 장성의 기삼연, 함평의 김태원과 심남일, 무주의 문태수, 임실의 이석용 등이 활약하였다.

의열단/의열투쟁

사건설명

의열투쟁이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일제를 상대로 벌인 무력 투쟁을 일컫는다.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이어졌고, 한국 독립운동사의 매우 중요한 항일 투쟁 방식 중 하나이다.
의열단은 의열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단체이다.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로, 김원봉, 윤세주, 황상규 등이 활동하였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계기로 1919년 11월 의열단이 조직되어 1920년대에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조국 독립을 위해 과격한 적극 투쟁과 희생정신을 강조하였다.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조선총독부 투탄의거, 종로경찰서 폭탄누척의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건설명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기 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요구가 존재했으나, 3.1운동과 동시에 임시정부 수립 운동이 일어나면서 마침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되었다. 각료에는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 등이 임명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는 등 외교활동과 더불어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와 같은 의열투쟁, 육군무관학교 및 비행사양성소 설립, 한국광복군 창설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학생독립운동

사건설명

우리 민족이 1945년 독립을 이루기까지 학생들은 조국 독립을 위해 여러 투쟁을 계속하였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국권 수호를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섰으며, 농촌계몽 및 야학 등의 활동으로 국민의 자주 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2월 8일에는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영향을 받은 3.1운동 또한 유관순, 어윤희 등 학생들을 주체 세력으로 전개되었다. 1926년에는 학생 중심의 6.10만세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전문학교 학생 이병립, 이병호, 이천진, 박두종 등과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등의 학생들이 주도하여 전개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기옥, 이금자,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사건을 계기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고, 이것이 확산되어 대구, 부산 등 주변 지역에서도 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밖에도 부산의 노다이사건, 대구사범학교 왜관사건 등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여러 항일운동으로 하여금 학생들의 조선독립정신은 지속되어 왔다.

동학농민혁명

사건설명

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둔 반봉건, 반외세적 성격의 농민민중항쟁이다. 1894년에 전라도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을 지도자로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켰다. 총 2차에 걸쳐 전개되었는데, 1차 봉기는 전라도 고부 지방의 관리 조병갑의 횡포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항하여 발생하였고, 이후 동학군의 해산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내정간섭, 청일전쟁, 갑오개혁 등을 강행하자 반외세를 외치며 2차로 봉기하였다. 그러나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에 패하고 1895년 1월 전봉준에 이어 손화중 등 동학농민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되고 교수형에 처해지면서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후에 일어난 항일의병항쟁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국내 항일 운동

사건설명

조선 땅에 잔혹한 일제의 지배가 드리워진 암울한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독립을 목적으로 주력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독립지사들은 국내 독립운동을 위한 여러 단체를 조직하였는데, 기독교 등 종교와 결합하거나 농민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는 등 성격이 다양했다. 그들은 친일부호를 처단하고 독립군을 양성함과 동시에 3.1운동의 계획을 세우거나 군자금을 모집하여 국내 독립운동단체의 존속을 지원하였다. 더불어 선전물을 배포하고 야학을 설치하여 식민지 수탈의 실상과 독립 달성을 역설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해외 항일 운동

사건설명

독립운동을 위한 열망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들끓었다. 우리 민족은 구주(유럽), 노령(러시아의 시베리아 일대), 만주, 미주, 인도네시아, 일본, 중국 등에서 활동하며, 위치한 곳과 상관없이 오직 조국 독립의 목적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지사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항일의식교육을 펼치고 독립군 양성을 도모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유럽 등지에 우리 민족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등, 여러 방면에서 조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기타

사건설명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시작으로 1945년 광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은 오직 정의롭고 자주적인 국가를 위해 힘써왔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목숨을 바쳐 투쟁하고 희생된 애국지사들의 넋을 기리고 그 흔적을 기억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