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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동상
신석구(1875-1950)의 호는 은재이며,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 밖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다. 그 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오화영(吳華英)·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이승훈(李昇薰)·박동완(朴東完)·김창준(金昌俊)·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 등과 회합,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석구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 가서 시무하다가, 1945년 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해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대결, 3·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 (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피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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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식 동상
신홍식(1872-1939)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인이다. 34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로 전임되어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하였다. 1919년 2월 14일,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였던 신홍식은 동지 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인환(李寅煥)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 20일 이인환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오기선(吳基善) 등의 동지와 모여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협의하고, 이인환, 이필주(李弼柱),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 최성모(崔聖模),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정춘수 등의 동지와 함께 기독교 측 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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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동상
신규식(1880-1922)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충성심이 대단하던 신규식은 한어학교(漢語學校)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 참위(參尉)로 복무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지방군대에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대일항전을 꾀하려 하였으나 기밀이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여기에 다시 경술국치의 비운을 당하게 되자, 1911년 11월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하고 손문(孫文)의 무창기의(武昌起義)에 참가하였으며, 중국인 호한민(胡漢民), 송교인(宋敎仁), 진독수(陳獨秀) 등이 경영하는 상해(上海)의 민권보(民權報)를 보조하였다.이후 상해(上海)의 불란서조계(佛蘭西租界)에 피신하여, 상해, 남경(南京) 등지에 왕래하고 거류하면서 차츰 모여드는 망명 동지들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다. 동제사는 독립운동단체이자, 상해를 중심으로 한 중국 관내 지역에 있는 동포들을 잇는 역할도 겸하였다. 신규식과 함께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홍명희(洪命熹), 조소앙(趙素昻), 문일평(文一平), 박찬익(朴贊翊), 조성환(曺成煥), 김규식(金奎植), 신건식(申健植) 등이 동제사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사원의 수는 약 3백여 명에 이르고 유럽과 미국 등 해외 각지에는 분사를 두기도 하여 광복운동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또한 신규식은 중국인 혁명지사들과도 교류하며 독립혁명운동을 협조하였고, 한중 양국의 지사 청년들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친선 협조 관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된 후로도 이어져, 더욱 양국간의 친선 협조를 돈독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규식은 조완구(趙琬九), 김백련(金白蓮), 백순(白純), 박찬익(朴贊翊), 정신(鄭信) 등과 함께 단군을 숭봉하는 대종교(大倧敎)의 교회를 설치하고 일요일의 경배식(敬拜式)과 함께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 10월 3일 개천절 등 기념일에는 거류 동포들이 참석하는 경하식(慶賀式)을 거행하여 겨레 고유의 전통 사상을 선양하였다. 한편, 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전후하고서 중국지역의 독립운동 조직 및 지도자들이 전개하는 국내외에 대한 활동도 점점 활기를 띠게 되었다. 동제사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은 이미 1917년 8월 서전(瑞典)의 수도 스톡홀롬에서 열리는 만국 사회당 대회에도 대표를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원동(遠東) 약소민족 대회에도 대표를 참가시켰으나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에 의해 새로운 독립운동 전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내 동포들과도 긴밀히 연락하여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고, 이에 동제사의 대표인 신규식 또한 앞장섰다. 우선,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는 일과 전 국민운동을 일으켜 일본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하는 결의를 담은 비밀 서신을 국내로 전달하게 하였으며, 우리 대표단의 국제적 활동에 대해서는 중국의 혁명정부 관계자들로부터 협조와 지원하겠다는 승낙을 얻도록 하였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법무 총장에 임명되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에는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21년 10월에 그는 임시정부 특파 대표로 광동(廣東)에 파견되어 호법정부(護法政府, 또는 광동 정부)의 승인을 구하는 동시에, 호법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내용의 5개항을 요청하여 최초의 외교관계를 성취하였다. 1922년 3월에는 신규식 내각의 시정방침을 발표하였고,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수행 및 중국 호법정부와의 외교 협조의 대표적인 성과를 일구어냈다. 그러던 중, 1922년 9월 25일 신규식은 과로로 상해에서 43세를 영면하였으며, 상해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안장되었다. 이후 1993년 유해를 봉환하여 서울현충원에 안장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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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동상(상당구)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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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동상(삼일공원)
신석구(1875-1950)의 호는 은재이며,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 밖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다. 그 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오화영(吳華英)·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이승훈(李昇薰)·박동완(朴東完)·김창준(金昌俊)·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 등과 회합,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석구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 가서 시무하다가, 1945년 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해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대결, 3·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피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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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덕 동상(삼일공원)
1894년 동학운동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당한 뒤 전국 각지를 방랑하였다. 1908년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입교했다. 이후 천도교의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館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 참배를 위하여 상경했을 때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에게, 3·1운동 계획을 들었다.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에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고,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29인이 모였다. 이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자진해 붙잡혀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감사원장·선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22년 말 천도교 신파가 ‘천도교 연합회’를 설립하여 분립하자, 천도교에서 탈퇴하여 수운교와 상제교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27년 이후 신간회에서 활동하다가, 신간회가 해체되자 다시 천도교 구파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조선총사(朝鮮總史)』·『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궁중비사(宮中秘史)』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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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동상(삼일공원)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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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 동상(삼일공원)
권동진(權東鎭, 1861~1947)은 충청북도 괴산군 출신으로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애당(愛堂), 우당(憂堂)이고, 법명은 실암(實菴)이다. 원래 집안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나 아버지 대 괴산으로 옮겨와 이곳에서 태어났고, 1869년 무렵 서울 재동으로 이사해 성장하였다.19세가 되던 1880년경 하도감(下都監)주1에서 일본군 장교를 초빙해 사관학교를 개설할 때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졸업 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희연 등과 초관(哨官)주2에 임명되어 좌우영의 교련을 맡았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박영효가 거느리는 전후영 소속으로 무관학교 출신 5인과 함께 대궐에서 고종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1885년 무렵 1년간 경상남도 함안군수를 역임하였다. 함경도 안무중군(按撫中軍) 겸 토포사(討捕使)로 있다가 중추부(中樞府) 내금장(內禁將)주3을 지내고, 1894년에는 거문도 첨사(僉使) 겸 수방장(守防將)으로 나갔다. 1895년 소위 대원군의 ‘ 명성황후 폐위’ 계획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면서 그 해 12월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에 망명한 후 일본 도쿄〔東京〕의 근위사단에서 병학(兵學)을 공부하면서 3연대에서 3년여 동안 실전 훈련을 받았고, 일본 육군성에서 경리 사무를 익혔다. 그런데 오사카〔大阪〕에서 동학 교주로서 망명 중인 손병희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06년 1월 5일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하고 귀국하는 길에 오세창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 손병희가 천도교 대도주(大道主)주4에 취임해 조직을 정비할 때 그를 보좌하며 천도교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중추원 부참의(副參議)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여 만에 그만두고 교육 진흥과 식상 흥업을 앞세운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1907년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설립된 대한협회에서 실업부장과 부회장을 맡았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천도교 지도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재편의 움직임이 보이자 손병희, 오세창, 최린과 함께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기독교, 불교와의 연대를 모색한 끝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2월 22일 출옥하였다. 1922년 5월 손병희가 세상을 떠나면서 천도교는 정치노선과 종교노선에 따라 거듭되는 분화를 겪었다. 이때 천도교 구파 지도자로서 자치운동을 도모하는 천도교 신파와 달리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다. 천도교 구파가 1926년부터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6 · 10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1만 원 가량의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으나 만세운동이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1927년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의 민족협동전선체로서 탄생한 신간회에서 부회장을 맡았다. 1929년에는 신간회 복대표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이 소식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경찰에 의해 사전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였다. 1947년 3월 9일 87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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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리 의병총
1907년 조선군을 강제로 해산시키고 고종황제를 폐위한 일제의 만행에 분노를 금치 못하며 의병으로 봉기 한 분들중 이지역 전투에서 순국하신 세분의 무연고 의병을 모신 묘역이다. 1907년 11월에서 12월 까지 이 곳 서원면에는 700여 의병이 대부대를 이루고 일본군 보병 제 51연대와 대치하던 강원, 경기, 충청도 의병의 거점으로 연일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장렬히 전사하신 의병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후손에 전하고자 1989년 12월 5일 묘역을 정비하고 비를 세웠다. 2009년 4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묘역 정비사업을 완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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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철호 흉상
조철호(1890~1941)는 서울 종로(鐘路) 사람이다. 대한제국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졸업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에 유학하여 1917년 졸업했다. 유학중에 동기생인 지청천(池靑天)과 조국독립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맹약했다. 1917년 조선군 제20사단의 용산(龍山) 부대에 배속된 것을 기회로 만주로 망명하려다가 신의주에서 붙잡혀 군법회의에서 총살형을 당할뻔 했으나 일본인 고관의 비호로 죽음을 면하고 제대되었다. 퇴역후 평안북도 정주(定州)의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학생들을 구한국군 교련 방식으로 훈련시켰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오산학교의 체육교사로서 이승훈과 교장 조만식(曺晩植)으로부터 독립선언의 계획을 통고받고 2월 하순경부터 오산학교 중학부 학생들에게 「프랑스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으며 이 기회에 우리 조선도 독립을 해야하므로 오산학교 생도는 시기의 도래를 기다리라」고 가르치고, 정주의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지도했다. 3월 5일 만주로 망명했다가 봉천성(奉天省) 하마당역(下馬塘驛)에서 일제 헌병대에 붙잡혀 옥고를 겪었다. 출옥 후 서울 중앙학교(中央學校)의 체육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구한국군 교련방식에 의한 체육교련을 시키고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1922년 10월 5일에는 조선소년군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창설하여 청소년 운동을 전개하면서 청소년들을 독립전쟁에 씩씩한 전사가 될 수 있는 민족간부로 육성하기 위하여 진력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때에는 중앙학교 학생대표들을 배후에서 지도하고 후원하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동년 6월 26일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38년 8월에는 보성전문학교의 체육교사가 되어 청년학생들을 훈련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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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목교회(구연영 창립교회)
노루목교회는 구연영이 1899년 3월 17일에 건립한 것으로, 구연영은 일제의 침략에 맞서 의병을 조직하여 국권회복 운동을 펼치던 중, 민족의 희망은 복음 전도에 있음을 깨닫고 여러 교회를 세워 구국운동을 펼쳤다. 구연영(1864~1907)은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1898년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웹엣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구국계몽활동 등의 항일운동을 계속하던 중, 1907년 7월 16일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구국회 지도자들이 붙잡힐 때 피살·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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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우편소 터
원곡 양성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으로 농민층이 주류가 되어 일으킨 대표적인 항쟁이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특히 2,000여명이나 되는 다수의 민중이 참여하였고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일본인 상점 가옥 등을 파괴 혹은 방화하는 등 공격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더불어, 경부선 철도 차단을 시도하는 등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3.1운동 중에서 3대 만세운동(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의 시위,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의 시위 포함)으로 손꼽힐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 중에서 양성우편소는 시위대가 파괴한 장소 중 한 곳으로, 현재 벽화와 안내판이 그 정신을 기리는 의미로 설치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