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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금정 바위(동학농민군 진격로)
첨금정(沾衿亭) 바위는 예향천리 마실길에 위치한 동학농민군 진격로 중 하나이다. 논 가운데에 첨금정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이기도 하다. 바위에 '萬歷二十五年十月 日 統制使李舜臣銘 宣武原宗功臣 金海金公 緯,한,天貴,殉節'(만력 25년 10월 일 통제사 이순신 명 선무원종공신 김해김공 위, 한, 천귀, 순절)이라 새겨져 있다. 1923년에 발행된 무장읍지에 '첨금정은 재향 동5리에 위치하며 암석과 수목이 있는 곳으로 정인(征人 전쟁터로 떠나는 사람)과 송별시 일가족이 서로 눈물을 흘리며 석별의 정을 나누며 옷깃으로 눈물을 적신 곳'이란 기록이 있다. 이러한 명칭으로 보아 그 당시에는 정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아무런 흔적이 없다. 이와 관련하여 김해김씨 장사군 파보와 선무원종공신록권(만력 33년 4.16, 1605)을 살펴보면 임진왜란때 진도 싸움에서 적의 독화살을 맞고 장열한 죽음을 당한 강동현령 김위의 반장시 이순신 장군이 참석하여 장례를 치룬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또한 김위를 비롯하여 아버지 천록, 할아버지 수연, 동생 현, 혼, 사촌 8명등 조,자,손, 3대 13명이 임진왜란 정유재란과 관련하여 공신록에 등제되어 있음도 볼 수있다. 이곳 들녁 이름도 첨금뜰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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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군 진격로(사신원)
예향천리마실길 동학농민군 진격로의 사신원에 대한 안내판이다. 고대부터 교통기관의 하나로써 이용됐던 사신원은 고려, 조선시대 때 숙박, 통신, 교통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이 특성으로 인해 당시 동학농민군들이 끄렁재와 사신원 그리고 인천강 사이에서 하룻밤 묵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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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동장학당
백관수는 한일 합방이 되자 전국에서 96명의 회원을 모집하고 흥동 장학회를 조직한 항일 독립 운동가이다.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활용됐던 흥동장학당은 항일 애국지사들의 넋이 서린 유서 깊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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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초월 대선사 순국비
백초월(白初月)은 1876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하여 스님이 된 그는 해인사에서 공부하였고, 30대 초반에 범어사, 해인사의 강사가 되었다.3.1운동이 일어난 직후 그는 진관사를 거점으로 불교계 민족대표인 한용운, 백용성을 대신해 불교의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의 본부인 민단본부의 책임자인 그는 상해임시정부 및 만주 독립군에 청년학승을 파견하고 군자금을 제공하였다.백초월은 화엄경의 일심(一心) 사상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일심교(一心敎)를 만들고, 동학사.월정사.봉원사 강사를 역임하면서 항일결사체인 일심회를 전국적인 조직체로 가동하였다. 1939년 10월,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일제의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쓴 사건을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4년 6월 옥중 순국하였다. 국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으로 기려 1990 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백초월의 후손과 고성군민들의 정성으로 1991년 순국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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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주 집 터
윤세주(1901-1942)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독립신문 밀양지국을 운영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신흥(新興)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1919년 11월 9일에 길림성(吉林省) 파호문(巴虎門) 밖의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김원봉, 황상규, 곽재기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무장항일투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제1차 목표로 일제 핵심 인물 암살과,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연말 경 국내에 특파되었다. 그러나 부산과 밀양에 반입된 폭탄과 무기 등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선언문 등과 함께 압수되었으며, 이에 윤세주는 동지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민족문화사업에 참가하여 표면적으로는 중외(中外)일보 기자와 경남 주식회사 사장으로 일하다가 1932년 다시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조선민족혁명당 간부학교를 제1기생으로 수료하고, 정치철학 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934년 3월에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을 위한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35년 4월에는 낙양(洛陽)군관학교를 졸업한 군사 간부들에게 사회과학을 교육하는 교관으로도 활약하였다.1936년 8월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38년 10월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자, 그는 한문반 주편위원(韓文班主編委員)에 임명되어 기관지 「전고(戰鼓)」를 편찬 발행하였다. 1942년 5월 태항산(太行山)에서 마전반격전(麻田反擊戰)에 참전하였다가 동년 6월에 전사하여 중국 태항산에 안장되었다. 이후 1950년에 중국 한단시 진기로예 국가열사능원으로 묘가 이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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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의 불꽃(밀양독립기념관 외곽 조형물)
선열의 불꽃 및 흉상은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외곽에 설치된 조형물이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2008년 6월 20일 개관한 시설이며 전국에서 세번째로 건립된 독립운동기념관이다. 조형물은 중앙에 놓인 선열의 불꽃탑을 중심으로 밀양출신 독립지사 36분의 흉상이 둥글게 둘러싼 모습인데 선열들의 '조국해방에 대한 염원'을 담아 조성한 것이다. 흉상에 새겨진 애국지사들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중 애족장 이상의 서훈자 서른여덟 분 중 서른네분(손경헌,손봉현,오학성,백운하 제외)과 밀양 독립운동의 선구자 을강 전홍표, 그리고 약산 김원봉을 포함한 서른 여섯 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36분의 존함은 가나다 순으로 강인수선생, 고인덕선생, 김대지선생, 김명규선생, 김병환선생, 김상윤선생, 김성두선생, 김성수선생, 김영복선생, 김원봉선생, 김홍규선생, 권잠술선생, 박지원선생, 손일민선생, 손호선생, 손봉현선생, 신석원선생, 윤창선선생, 이상관선생 ,윤세복선생, 윤세용선생, 윤세주선생, 윤치형선생, 이병철선생, 이언권선생, 이찰수선생, 임굉(임병찬)선생, 전홍표선생, 조우식선생, 최수봉선생, 한봉근선생, 한봉삼선생, 한봉인선생, 홍재문선생, 황문익선생, 황상규선생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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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기 추모비
성암 이문기(省庵 李文基)는 구한말의 국운 쇠잔기에 출생하여 포악한 왜제의 식민통치와 8.15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과 6.25 사변의 동족상잔 및 5.16 군사정권의 전제를 두루 겪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도 시종일관하여 어린 학도들에게 민족정기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중흥은 교육이 그 관건임을 자각하여 경남도립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한 후 1925년 단성보통학교 훈도로서 사도 외길의 첫 출발을 하였다. 이후 가야보통학교를 거쳐 1927년에 모교인 함안보통학교로 전근하신 후 8.15 해방때까지 후배 제자들에게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통해 은연중에 민족정신을 고취하셨다. 1967년 3월 23일 과로로 인해 향년 63세로 집무실에서 순직하였다. 해당 비석은 이문기 선생의 후배와 문생들이 뜻을 모아 모교가 보이는 곳에 이문기 선생을 기리는 비석을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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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 묘
독립투사 류성호(柳晟浩)은 1909년 3월 9일 공주군 정안면 운궁리에서 류석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류석우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에 앞장 선 애국지사이시다. 어렸을 적 일찍이 공주 영명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 선생은 당시 일제 식민지 정책의 모진 강압과 착취에 울분을 금치 못한 나머지 독립투쟁에 몸바치기로 결심하였다. 1936년 9월 중국에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서 상해 남경 방부지역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에 심혈을 기울이던 중 1941년 7월 체포되어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밤낮으로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끝끝내 기밀사항을 밝히지 않았다. 이후 요시찰 인물로 분류된 선생은 충남 서산읍 석남리에 강제 압송되어 거주 및 활동이 10리 이내로 제한되는 등 엄중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1941년 11월 일경의 체포 수감 기도를 류붕렬 서산경찰서 고등계 형사로부터 알게 된 선생은 그들의 허점을 틈타 중국 흑룡강성 보청현으로 탈출하여 해방될 때까지 항일독립운동에 힘쓰셨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후에도 청년 육성 사업, 건국 사업에 힘쓰신 선생은 독립운동으로 얻은 후유증으로 1950년 1월 19일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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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구 충훈비
조중구(1880-1942)는 1910년 국권침탈 이후 1914년 서간도 합니하(西間島哈泥河)에서 동지들과 광제회(光濟會)를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미국 등지에서 발간되는 신한민보(新韓民報)를 국내에 들여와 발행하다가 1915년 초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7년에 중국으로 망명하였고 1920년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1922년 4월까지 의정원에서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임시정부 외무부 임시선전원에 임명되어 호북성(湖北省) 등지에 파견되어 선전활동을 했으며, 1922년부터는 중국군에 입대하여 무력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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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달 공적비
논산읍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의 3·1운동에 호응하여 충청남도 논산군 논산읍 일원에서 1919년 3월 12일부터 4월 7일까지 전개된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항거한 일련의 독립만세운동으로 논산읍민뿐만 아니라 학생과 강경읍민까지 가세하여 합동으로 전개된 운동이다.1919년 3월 12일 염중오(廉衆午)·염성필(廉聖弼)·박용진(朴容鎭)·유치만(兪致晩)·이백순(李伯純)·손필규(孫弼奎)·이근옥(李根玉)·김태호(金泰昊) 등이 주도하여 강경읍민과 학생 약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논산 읍내로 진입하였다. 이에 논산읍민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는 군중은 약 1,0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1919년 4월 1일 배영직은 두마면 두계시장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4월 3일에는 욱정과 취암리에서도 주민들이 부근의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취암리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배영달(裵榮達)과 배영술(裵榮述)이 주도하여 마을 주민 약 40명이 모정산에 모여 전개한 횃불만세운동이었다. 이어 같은 달 7일에도 논산에서는 약 100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1919년 3월 12일부터 4월 7일까지 이루어진 충청남도 논산읍 독립만세운동의 결과 이를 주도한 많은 인사들이 일제의 무차별적인 무력 진압에 희생 또는 체포·구금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염중오·염성필·박용진 등이 순국하였으며 10여 명이 구금되었다. 이중 이백순은 징역 10월형을 선고 받았으며 손필규·이근옥·김태호 등도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배영달과 배영술은 태형 90대의 형벌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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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영술 공적비
논산읍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의 3·1운동에 호응하여 충청남도 논산군 논산읍 일원에서 1919년 3월 12일부터 4월 7일까지 전개된 일제의 조선 식민지 지배에 항거한 일련의 독립만세운동으로 논산읍민뿐만 아니라 학생과 강경읍민까지 가세하여 합동으로 전개된 운동이다.1919년 3월 12일 염중오(廉衆午)·염성필(廉聖弼)·박용진(朴容鎭)·유치만(兪致晩)·이백순(李伯純)·손필규(孫弼奎)·이근옥(李根玉)·김태호(金泰昊) 등이 주도하여 강경읍민과 학생 약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논산 읍내로 진입하였다. 이에 논산읍민들도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는 군중은 약 1,000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 1919년 4월 1일 배영직은 두마면 두계시장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4월 3일에는 욱정과 취암리에서도 주민들이 부근의 산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취암리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배영달(裵榮達)과 배영술(裵榮述)이 주도하여 마을 주민 약 40명이 모정산에 모여 전개한 횃불만세운동이었다. 이어 같은 달 7일에도 논산에서는 약 100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1919년 3월 12일부터 4월 7일까지 이루어진 충청남도 논산읍 독립만세운동의 결과 이를 주도한 많은 인사들이 일제의 무차별적인 무력 진압에 희생 또는 체포·구금되었다. 구체적으로는 염중오·염성필·박용진 등이 순국하였으며 10여 명이 구금되었다. 이중 이백순은 징역 10월형을 선고 받았으며 손필규·이근옥·김태호 등도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배영달과 배영술은 태형 90대의 형벌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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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좌상(칠갑광장)
최익현(1833~1907)은 조선 후기의 지사이다. 1833년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화서 이항로의 제자이며 1855년(철종 6)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 전적(典籍)·사헌부 지평(持平)·사간원 정언(正言)·이조정랑(吏曹正郞) 등을 역임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에 따르는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을 상소하여 관직을 삭탈당했다. 이후 일본과의 통상조약과 단발령에 격렬하게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항일의병운동의 전개를 촉구하며 74세의 고령으로 임병찬(林秉瓚)·임락(林樂) 등 80여 명과 함께 전북 태인(泰仁)에서 의병을 모집, 〈기일본정부(寄日本政府)〉라는 일본의 배신 16조목을 따지는 ‘의거소략(義擧疏略)’을 배포한 뒤, 순창(淳昌)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체포되었다. 그러나 순창에서 패하여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그 곳에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