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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중앙근린공원
횡성의 만세시위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나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천도교인이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횡성청년회 윤태환(尹泰煥)과 횡성감리교회 정해경(鄭海景)도 참여하였다. 횡성군수가 직접 면사무소에서 폭동에 대비하라는 훈시까지 하는 등 일제 관헌의 대비가 엄중한 가운데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다. 원주 소초면 둔둔리 천도교인인 하영현(河永賢)과 강사문(姜士文) 등이 주민을 인솔하여 횡성으로 왔다. 4월 1일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몽둥이·돌·장작으로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일제 관헌들은 시위에 미리 대비해 관공서의 중요 문서를 숨겼으며 직원들도 오후에 모두 도망쳤다. 시위가 진행되던 중 일본헌병 상등병인 고지마[小島了]가 말을 타고 거리에 나타났다. 군중은 헌병을 보자 격분하였다. 최동수(崔東壽)가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밟고 때렸다. 이 때 총소리가 울리자 군중의 움직임은 일단 멎었다. 저녁 무렵에 다시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향하였다. 헌병들이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고 뒷산에 매복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군중의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법주리 강승문, 둔둔리의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 4월 2일에도 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며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4월 2일부터 시위 주도자를 검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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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공로 표지석
해공 신익희(1894 - 1956) 선생은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1919년 김시학, 윤치호, 이상재, 이승훈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였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지사들과 연락하다가, 4월 10일에 각 지방 출신과 대표자들을 의원으로 하는 임시의정원 회의를 열어 국호, 관제, 정부 관원 및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탄생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의원이 되어 법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나중에는 법무총장, 외무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6월 임시정부에서는 외교연구위원회를 설치, 선생은 연구위원으로 선임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3년 4월부터는 새로이 대한민국 잠행관제(暫行官制)가 실시됨과 함께 정부 행정부의 한 부처로 선전부가 새로 설치되어 조소앙, 엄항섭, 유림 등과 함께 선전 계획 수립, 선전 진행 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초창기부터 시작하여 내무차관, 내무총장, 국무원 비서장, 법무총장, 내무·외무·문교부장 등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끈질기게 항일 독립투쟁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에는 민주당 최고위원,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의장을 역임한 분이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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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영로 집 표지석
변영로(1898~1961)는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학가이다. 1919년 3·1운동 때는 YMCA의 구석진 방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독립선언문」을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는 일을 하였다. 1920년 『폐허』 동인(同人)으로 활약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2년 이후 『개벽』지를 통해 해학이 넘치는 수필을 발표하였으며, 발자크의 작품 등 해외 문학을 국내에 번역·소개하였다. 1924년 일제 식민지 지배하의 민족적 울분을 노래한 시집 『조선의 마음』을 출간하였고, 1927년에는 백두산을 여행한 후 「두만강 상류를 끼고 가며」, 「정계비」, 「천지(天池) 가에 누워」 등 1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신가정』 주간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등 일본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려, 결국 일본 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사를 떠나야만 했다. 광복 후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서울신문사 이사,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3월 14일 인후암으로 별세하였다. 변영로는 친일 문학 연구가 임종국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 중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문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일제의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민족의 저항 정신을 노래한 시와 수필을 발표하였다. 1922년 발표한 「논개」는 변영로의 대표적인 시로, 진주성 촉석루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으로 떨어져 죽은 논개(論介)의 애국충절을 노래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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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주로 표지석
변영로(1898~1961)는 일제강점기 부천 지역에서 활동한 문학가이다. 1919년 3·1운동 때는 YMCA의 구석진 방에서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가며 「독립선언문」을 영역하여 해외로 발송하는 일을 하였다. 1920년 『폐허』 동인(同人)으로 활약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22년 이후 『개벽』지를 통해 해학이 넘치는 수필을 발표하였으며, 발자크의 작품 등 해외 문학을 국내에 번역·소개하였다. 1924년 일제 식민지 지배하의 민족적 울분을 노래한 시집 『조선의 마음』을 출간하였고, 1927년에는 백두산을 여행한 후 「두만강 상류를 끼고 가며」, 「정계비」, 「천지(天池) 가에 누워」 등 10여 편의 시를 발표하였다. 1931년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 산호세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3년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신가정』 주간으로 재직하였다. 그러나 『신가정』 표지에 손기정 선수의 다리만을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는 제목을 붙이는 등 일본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려, 결국 일본 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사를 떠나야만 했다. 광복 후인 1946년 성균관대학교 영문과 교수로 부임하였다. 이후 서울신문사 이사, 대한공론사 이사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초대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 3월 14일 인후암으로 별세하였다. 변영로는 친일 문학 연구가 임종국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지식인 중 지조를 지킨 몇 안 되는 문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일제의 탄압에도 굽히지 않고 민족의 저항 정신을 노래한 시와 수필을 발표하였다. 1922년 발표한 「논개」는 변영로의 대표적인 시로, 진주성 촉석루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으로 떨어져 죽은 논개(論介)의 애국충절을 노래함으로써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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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토동과 항일운동 안내판
남상목(1876~1908)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1907년 7월에 경기도 용인군 용천곡을 중심으로 의병 50여 명을 그 휘하에 두고 구식총 40여 자루와 서양총 10여 자루를 무기로 하여 항일 운동에 투신하였다. 그 후 새로이 의병진에 참여한 송주상(宋柱祥)·김태동(金泰東) 등으로 하여금 의진에 종사시키고 강춘선(姜春善)은 후군장, 김경화(金景化), 이시영(李時永)은 포군으로 진용을 재정비하고난 뒤 음성 지역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으나 불행히도 분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패전군 30여 명을 이끌고 죽산의 칠정사에 도달한 뒤 전봉규(全奉奎) 휘하에 있는 100여 명의 의진과 진을 합하여 전열을 가다듬고 나서 안성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과 다시 접전하여 큰 승리를 거두니 항일투쟁에 있어서 일익을 담당하였다. 1908년 11월 판교에서 살고 있던 가족을 만나러 가던 중 일제 앞잡이의 밀고로 인하여 "느릿골"이란 지역에 잠복해 있던 일본헌병에게 체포당하여 모진 고문을 받고나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복역하던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생긴 장파열(腸破裂)로 1908년 11월 4일에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고 전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윤치장(1876~1972)은 경기도 광주 출신이다. 정미 군대해산을 당하여 통분함을 금치 못하여 국권을 바로 잡고자 1907년 음력 10월경 동지 70여 명을 규합하여 거병하였으며, 대체로 광주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7년 음력 12월경 광주군 묵동에서 일본 기병대와 전투하여 그의 부하 8명이 전사하였다. 1908년 음력 2월 중군장 오사과(吳司果) 외 2명으로 하여금 광주군 언주면에 사는 박승호(朴勝浩)에게서 군자금 1백원을 거두고 그를 의병에 입대케 하였다. 또한 박승홍에게 돈 40원을 주어 경성에 가서 탄약을 구입해 오도록 명하였는데 1908년 10월 11일 양주에서 적에게 체포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이 일경에 노출되어 1909년 3월 23일 경성 공소원으로부터 징역 15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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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루리 출신 독립운동가 안내판
박선태(1901~1938)는 경기 수원 사람이다. 그는 휘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9월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상해로 가려다가 삼일학교 교사 이종상(李鍾祥)을 만나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펴기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1920년 7월까지 수원 일대에서 ≪애국창가집≫과 〈대한민보〉 수십매를 배포하며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이들은 이후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펴기 위해 1920년 6월 20일 임순남(林順男)·최문순(崔文順)·이선경(李善卿) 등의 여학생을 규합하여 비밀결사 구국민단을 조직하였는데 그는 단장에 선임되어 동단의 활동을 주도하였다. 동단은 독립국가를 실현할 것과 독립지사들의 가족을 후원할 것을 활동목표로 삼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문서를 국내에 배포하는 등 임시정부 지원활동도 폈다. 특히 동단의 여학생들은 임시정부 적십자회에 참가하여 미·일전쟁이 일어나면 간호부로서 참전할 것을 계획하였다. 동단은 이후 혈복으로 명칭을 바꾸고 매주 금요일 삼일학교에서 회합하여 독립운동 방침을 협의하였으며 김석호(金錫浩)·김노적(金露積)·김귀섭(金龜燮)·김병갑(金秉甲)·이희경(李熙景)·신용준(愼用俊) 등을 동지로 포섭하기 위해 활동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그는 192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이선경(1902~1921)은 1920년 6월 경기도 수원군에서 구국민단을 결성하여 구제 부장에 선임되어 회원을 모집하였고, 대한민보 등의 배포에 관해 수차례 협의하였으며, 동년 8월 상해로 망명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순국하 였다. 1919년 3월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에 15일간 구류를 당하였다. 1920년 6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경기도 수원 서호 부근에서, 수원 삼일여학교 교사 차인재의 소 개로 임순남(林順男,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2년생)·최문순(崔文順, 이화여자고등 보통학교 2년생) 등과 함께, "제1. 일한합병에 반대하여 조선을 일본제국 통치 하에 서 이탈케 하여 독립국가를 조직할 것, 제2. 독립운동을 하다가 입감되어 있는 사람 의 유족을 구조할 것"의 2대 목표를 표방하는 비밀결사 구국민단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이후 동년 7월경까지 수원 읍내 삼일학교에서 구국민단 부단장 이득수(李得壽) 등과 수차례 회합하여 <대한민보>·<독립신문> 등의 반포를 담당하기로 서약하고, 또 기회를 보아 상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간 호부가 됨으로써 독립운동을 도울 것을 맹서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동년 8월 9일 수원을 출발하여 상해로 향하다가 경성에서 체포되었다. 1921년 4월 1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1919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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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헌 묘
홍종헌(1867~1919)은 천도교인으로 경기도 양주시 은현면 용암리 출신이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5년 이후 동학에 들어가 양주 접주로 활동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의병이 되어 항일 의병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낙향한 후에는 의병 지원 사업을 전개하여 화승총과 화약을 포함하여 각종 군수 물자를 의병에게 제공하였다. 1919년 3월 20일 동두천장에서 홍병준(洪秉俊)·윤진현(尹眞鉉)·홍종각(洪鍾珏) 등과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때 출동한 일본 헌병 사토[佐藤] 기마대장을 타살하였다. 홍종헌에 대해서는 시위 중에 일본 헌병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였다는 설과 피신하던 중 체포되어 순국하였다는 설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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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삼 활동지(김량장터)
김량장터 이익삼 의병 활동지는 1908년 전후 이익삼의병을 비롯한 용인지역 의병이 주로 활동했던 곳이자, 1919년 3월 24일 김량장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던 곳이다. 이익삼(李益三)은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출신의 의병장이다. 그는 1907년 8월부터 1909년 6월 8일 체포될 때까지 용인과 광주, 죽산, 양성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익삼은 같은 모현면 출신 정기인(鄭基仁) 등과 인근 지역 출신 인물들을 규합해 의병활동을 벌였다. 이익삼 의병의 주요 활동지는 김량장이었다. 1908년 4월 10일 이익삼의병은 김량장에서 동장 정한기(鄭漢基)를 위협하며, 광목 4필과 짚신 20족을 빼앗아 갔다. 이것은 친일세력 처단과 군자금 모집의 일환으로 펼친 활동이었다. 김량장에서는 이익삼 의병 외에도 여러 의병이 활동하기도 했다. 1908년 9월 2일 오후 8시경 의병 30여 명이 김량장에 있던 한 학교에 나타나 의병 활동에 필요한 기물과 금품을 요구하였다. 또 같은 해 9월 21일에는 의병들이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일본군 헌병과 한인 보조원을 응징하였다. 한편, 1919년 3월 24일 김량장에서 김량장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이 만세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경기도 용인 출신의 의병장 이익삼은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고 ‘정미조약’이 체결되면서 8월에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의병을 일으켰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주로 유격전으로 일제와 전투를 벌였으며, 그 밖에 일진회 등 친일파를 처단하거나, 빈민을 구제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익삼 의병부대는 일제도 두려워할 정도로 상당한 세력을 떨쳤다. 그러던 1909년 6월 2일 밤 10시경 일제의 수원수비대 제3중대 여섯 명의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졌다. 이에 이익삼 의병부대는 분투하였으나 일본군의 화력이 강하여 그들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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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고당 터(민창식 집)
감고당은 조선 숙종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살던 친정집이다. 인현왕후는 14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가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서인되어 6년간 감고당에 갇혀 살다가 환궁하였다. 이후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 애국지사 민창식 선생이 6.10 만세운동에 사용할 격문 외 4종의 격문 5만장을 인쇄한 장소이자 선생의 생가 자리로 쓰이게 된다. 현재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정문 앞에 이 자리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민창식은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수학한 후 대동인쇄사와 경성일보·매일신보 등의 신문사 인쇄직공으로 일했다. 1920년대 들어 연우사(鉛友社) 동인,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회원, 혁청당(革靑黨) 당원으로 활동하며 화요회 회원이 되었다. 1925년 서울에서 경성인쇄직공조합(京城印刷職工組合)을 결성한 민창식은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인쇄직공 등의 노동자 권익 확보를 위해 힘쓰며 대동인쇄주식회사(大東印刷株式會社)·창신인쇄주식회사(倉新印刷株式會社) 파업 등에 참여했다. 당시 대동인쇄주식회사의 직공 파업은 인쇄소 직공들의 불합리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일어난 것으로, 회사 측은 직공 측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해놓고는 오히려 주모자 등을 해고하였다. 이에 다시 들고 일어난 인쇄소 직공들의 투쟁은 직공들의 승리로 끝난 바 있었다. 이러한 때에 그는 직공들과 함께 동맹 휴업을 벌이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부산직공파업 때에도 이를 원조코자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을 강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한 민창식은 활동범위를 넓혀 청년운동 및 사회주의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여 경성부 위원으로 인쇄직공조합이 설치된 경성부 제2구 제1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당시 격문의 인쇄와 배포를 담당한 민창식은 만세운동의 전국확대를 위해 원산과 평양 등지에서 선전문을 배포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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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묘
윤봉길(1908 - 1932)의 본관은 파평이며, 본명은 윤우의, 호는 매헌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열네 살 때는 인근 마을의 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공부하며 사서삼경 등 중국고전을 익혔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 부흥 운동을 본격화하며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30년 만주로 망명하던 윤봉길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결국 만주로 탈출해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과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931년 8월 활동 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옮겨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한 뒤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해 겨울부터는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에서 일본 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며 상하이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윤봉길의 거사로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상하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수류탄 투척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이후 1932년 11월 20일 오사카형무소에 수감, 1932년 12월 19일 총살되었다. 윤봉길은 1932년 일본에서 총살된 후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해방 후 유해봉안추진위원회의 주도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여 서울특별시 효창동의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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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묘
안중근(1879 - 1910)은 일제강점기 이토저격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 · 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 · 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 ·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 · 이범석(李範奭)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 · 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 · 엄인섭 · 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 · 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禹連後) · 조도선(曺道先) · 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을 쐈다. 다시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쐈다. 처음 쏜 4발 가운데 3발은 이토, 1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도시히코[川上俊彦]의 오른팔을 맞혔다. 이어서 쏜 3발은 비서관 모리타이지로[森泰二郞], 만주철도이사 다나카세이타로[田中淸太郞]를 맞혔다. 1발은 플랫폼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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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동상(탑골공원)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