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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순, 안상용 집 터
안경순(1879~1919)은 천도교(天道敎)인이다.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安相容)·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마침내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그러자 수원(水原)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되어, 이 보복으로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하였다. 그 후에도 제암리(堤岩里)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유전준부(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基督敎)·천도교(天道敎)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유전준부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같은 만행으로 23명이 현장에서 죽고, 이어 고주리에서 6명이 죽었는데, 일본군은 그들의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 때 그도 일제의 만행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안상용(1900~1919)은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안진순(安珍淳)·김덕용(金德用)·안봉순(安鳳淳)·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마침내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그러자 수원(水原)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되어, 이 보복으로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하였다. 그 후에도 제암리(堤岩里)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본인 유전준부(有田俊夫)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基督敎)·천도교(天道敎)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유전준부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같은 만행으로 23명이 현장에서 죽고, 인근 고주리에서도 6명이 살해당했는데, 일본군은 그들의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 때 그도 일제의 만행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안경순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 안상용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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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 시립독립기념관
양산 지역에서는 1919년 3·1운동 이후 본격적인 항일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양산 지역에서는 인근의 밀양이나 울산 지역에서처럼 3·1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끈 비밀단체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동한 윤현태의 영향을 받은 지인과 후배들의 조직체 결성과 이 조직을 주축으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9년 3·1운동 이후 양산 지역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은 청년운동·소년운동·여성운동·농민운동·학생운동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양산 시립독립기념관은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알리고 자주독립의 정신을 미래세대에 전승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역사기억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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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입산리 만세공원(기미년 만세공원)
의령 입산리 만세공원(기미년만세공원)은 창남학교가 있던 곳이자, 1919년 3월 19일에 인근의 십여 곳 마을주민들이 모여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장소이다. 안희제는 1919년 기미년 3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고향인 입산마을에도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먼저 집안 조카인 안준상에게 기미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게 하고, 세부 계획은 안준상의 맏형인 안경상에게 맡겼다. 백산의 뜻을 전해 들은 안경상은 마을 원로들과 청장년 대표를 고산재로 불러들여 3.1만세운동에 관해 설명하고 마을별로 동원책을 정하였다. 만세운동의 집결지는 백산 선생이 설립한 창남학교(상로재에서 현 위치 만세공원으로 이전) 교정으로 정하고, 일본 경찰의 출동에 대비해 신반에서 입산마을까지 일정한 거리에 나무꾼으로 위장한 연락책을 두고 신호를 통해 상황 전달이 되게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919년 3월 19일, 창남학교 교정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안경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이곳 지역민들의 나라 사랑 정신이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본 만세운동은 창남학교의 운동장에서 일어났는데, 창남학교 또한 위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안희제가 1908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는 안효제, 안석제 등과 함께 이곳에서 교육활동을 펼치며 애국혼을 발휘하고 문명개화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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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제 묘
안창제(1866~1931)는 경남 의령(宜領) 사람이다. 안효제(安孝濟)의 서제(庶弟)이다. 1894년 갑오경장의 조서가 내려가자 갑오토역(甲午討逆) 상소를 올리고 금부옥(禁府獄)에 감금당했으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유생을 대표하는 유약소원(儒約所員)으로 연이어 3번이나 소(疎)를 올려, 오적을 참하기를 청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광복의 큰 뜻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 박장호(朴長浩)와 협력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여 일경과 밀정을 다수 사살하였다. 1919년에는 중국측에서 조직한 전국유교연맹 동삼성(東三省)학회 분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1년 8월 13일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일가족이 장학량(張學良)의 패잔병에게 총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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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로재(창남학교)
입산마을은 1600년부터 이어진 탐진 안씨의 집성촌이다. 상로재는 원래 탐진안씨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로 1722년 창건 후 수차례 보수를 거쳐 1922년 중창되었다. 상로재는 1908년 백산 안희제 선생이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문명개화를 이끌 인재를 양성한 곳이며, 독립운동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성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3호로 지정되었다. 상로재(霜露齋)는 '서리가 내리면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군자의 도리에 따라 조상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상로재의 구조는 일반적인 화려한 고택이 아니라 소박하고 작은 고택이다. 대문채인 이필문의 솟을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 같이 널찍한 터가 있으며 다시 좌측으로는 상로재로 드는 협문이 자그마하게 있다. 안희제(1885~1943)는 경상남도 의령(宜寧)군 부림(富林)면 입산(立山)리에서 태어났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구포(龜浦)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 南學校)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으며 당원들은 일제강점말기까지 안희제의 조직에 다수가 참가하여 끝까지 애국 동지로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가 3 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에 서울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시켜 각지에 배포하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을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7년에는 이시목(李時穆) 등 동지들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천수백일 갈이(千數百日耕) 넓이의 농토를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유랑하고 있는 한국농민 300여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 주고, 5개년 연부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이를 순국십현(殉國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하며, 안희제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옥사(獄死)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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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로 집
이극로(1893~1978)는 일제강점기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 한글맞춤법 제정위원이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등을 역임한 학자, 국어학자, 정치인이다.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마치고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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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도석 흉상, 시비
명도석(1885~1954)은 경남 마산(馬山) 사람이다. 1919년 3월 12일 경남 마산의 만세시위를 추진하기 위해 최용규(崔龍奎) 등과 사전협의하여 3월 21일 마산 장날을 기하여 거사키로 작정하고 당일의 시위를 위한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며 행진 시위하게 하였다. 1920년 가을 미국에서 항일활동을 펴던 박용만(朴容萬)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奉天省) 안동(安東)에서 만나던 중 일경에게 붙잡혀 6개월간 구류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1년 7월 20일 마산 노동야학의 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며 항일교육에 힘썼다. 또한 1927년 7월 20일 신간회(新幹會) 마산지회창립대회(馬山支會創立大會)에서 간사(幹事)로 선출되고 1929년 1월 28일 신간회 마산지회 정기총회에서 지회장(支會長)으로 선임되었으며, 1930년 3월 31일 제3회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이 되어 신간회(新幹會) 해소시까지 활동하였다. 1940년 2월 일제는 소위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고 민족말살을 강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였으나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고수하였다. 1944년 8월 그는 여운형(呂運亨)의 주도로 전국에 걸쳐 결성된 건국동맹(建國同盟) 경상남도 조직책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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쌈지공원 애국지사 안내판
일제강점기, 마산 지역도 여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억압과 수탈이 심한 곳이었다. 특히 항구도시라는 지역 특성상 상권과 관련한 침탈이 많았는데, 동양 척식 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를 기반으로 마산 출장소 설치, 토지 박탈, 대일 미곡수출, 소비성 물품의 수출입항화 등이 자행되었다. 일제는 경제 침탈과 아울러 각종 학교의 설립을 통해 식민지화의 기반을 조성하였다. 마산에는 합병 이전부터 공립 마산 심상 소학교·마산 소학교·사립 일어 학교 등이 세워졌으며, 합병 이후에는 1915년에 마산 실과 고등 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런 학교에서의 교육은 처음부터 조선인을 위한 교육과는 무관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할 민족 학교 설립이 절실히 요구되었고 마산 최초의 민족 사학으로 창신 학교가 설립되었다. 창신 학교는 국권 회복과 근대화 달성을 위한 실력 양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교육 목표로 마산 지역의 민족 교육 담당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정규 학교 이외에 야학도 민족 의식과 자주 독립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마산의 노동야학은 지역 주민 옥기환·구성전 등이 자금을 출자하고 명도석·김명규·나인한·팽삼진 등이 교사로 참여하여 1907년 6월 10일 개교하였다. 노동 야학의 민족적 성격의 교육은 마산의 3·1 운동에서 앞장서 투쟁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한편, 1915년 1월 조직된 비밀 결사 단체인 조선 국권 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의 활동도 마산 3·1 운동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 들 수 있다. 조선 국권 회복단은 박상진·윤상태·서상권·배중세·이시영 등 영남 지역의 자산가·혁신 유림·지식인들이 경북 달성에서 독립군 지원을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 운동 단체였다. 마산에는 국권 회복단 지부가 설치되어 지부장 안확을 비롯하여 이형재·변상태·김용환 등이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3·1 운동이 일어나자 마산의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현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상남동에는 마산 항일 운동의 핵심 독립운동 인물들의 정신을 기리는 의미에서 활동 내용을 간략히 서술한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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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천도교 영남거점 기도처
1919년 3월 1일부터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항거하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국에서 만세운동시위를 벌였다.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하나로 활약하게 되는 손병희는 천도교의 3대 교조였는데, 그의 지시로 전국 9곳의 지역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광복 특별기도가 이루어졌다. 경주교구에서는 1919년 1월 8일부터 2월 25일까지 49일간, 영남지역 천도교 대표 4인(진주 신용구, 경주 박인환, 언양 곽해진, 영천 이종원)을 중심으로 독립 선언식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당시 경주교구는 최시형의 집인 228-1번지 건물과 경주교구인 229번지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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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부조벽
3.1운동 부조벽은 1919년 4월 6일에 우곡면사무소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록한 사적이다. 야정동(野亭洞)에 사는 박재필과 도진동(桃津洞)의 박영화(朴英華)가 주모하여 고령에서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박차천(朴且千)을 시켜 동네를 돌며 동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고 마을 주민들은 이에 호응하여 곧바로 강변에 모였다. 1919년 4월 6일 밤 11시경 주민 30여 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여 마을을 일주한 뒤, 우곡면사무소 앞으로 몰려가 독립의 의지를 전달하였다. 자정을 넘겨 시위가 계속되자 면장이 나와 이들의 해산을 간청하였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 경찰은 주동 인물 박재필과 박영화를 비롯하여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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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수 묘
유동수(1898~1983)는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臨東面中平洞鞭巷)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5일 유연성(柳淵成)·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박재식(朴載植)·유교희(柳敎熙)·박진선(朴晋先)·유곡란(柳谷蘭) 등이 편항 장터 동편에 있는 공동 타작장에 모여 거사에 대하여 의논함으로써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편항 장날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중의 동원을 분담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는 이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성하여 3월 21일 오후 2시, 편항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이곳 주재소에서 2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인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 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경들에게 달려들어 주재소로 쫓아버렸다. 그리고 그가 시위군중과 함께 편항주재소로 달려가 시위를 전개할 때,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 내전(內田)이 공포를 발사하자, 그는 분노한 군중과 함께 주재소의 유리창·책상·의자를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또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대검과 소내에 비치되어 있던 장총·칼·탄환·제복 등을 거두어 그곳 우물안에 버렸다. 이때 2명의 일본경찰이 신덕리(新德里) 방향으로 도망하자, 이를 추격하여 1명을 도중에서 붙잡아 구타하였다. 신덕리로 도망한 일본 경찰은 그곳 주재소에 이르러 위급한 상황을 전하고 안동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그후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관의 사택도 습격하여 완전히 파괴하였는데, 경찰 가족들은 모두 피신하고 없었다. 오후 5시, 그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류를 파기하였다. 자정부터는 파괴해 버린 주재소의 판자로 모닥불을 피워가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한편 급보를 받은 안동경찰서에서는 오전 5시, 순사부장 1명과 일본군 하사 이하 8명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다. 결국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31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건조물 손괴·가택 침입·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에는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요인인 유 림(柳林)의 지시에 따라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으며, 향리에서 후진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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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연 묘
류시연(1874~1914)은 1896년부터 1914년 42세에 순국할 때까지 약 18년 동안 의병 항쟁을 펼쳤다. 그는 어렸을 때 마을에 있는 대평학숙(大坪學塾)에서 류연각(柳淵覺)에게 한문을 배웠다. 그리고 용맹하면서도 병서(兵書)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어떤 일에 있어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매사 과감하게 결단하였다. 류시연이 의병 항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896년부터였다. 그는 약관인 24세의 나이로 안동의진의 소모장과 선봉장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나자 의진을 창의하였다. 류시연은 1906년 봄부터 1908년 여름까지 안동을 중심으로 한 봉화·예안·청송·영양 등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 류시연은 예안분파소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지속적인 교전을 통해 일본군 수비대에게 타격을 입혔다. 특히 군대 해산 이후 일제의 의병 토벌 작전이 강화되었을 때에는 신돌석(申乭石)·김성운(金成雲) 등과 연합하여 1908년 2월 영양 일월산에서 항쟁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류시연은 1908년 2월 일월산 항쟁 이후 의진을 해산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1912년 군자금 및 무기 구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가 1913년 8월 영주시 문수면 소재지인 반구시장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14년 1월 29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