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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사부장 노구치 처단 장소
1919년 3월 28일, 사강시장에서 진행된 만세운동을 진압하던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애국지사 홍면옥에게 총상을 입히고 군중을 피해 도망치다 붙잡혀 처단 당한 장소에 세워진 조형물이다. 1919년 3월 21일, 동탄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송산·서신·마도’, ‘향남·팔탄’, ‘장안·우정’ 등 화성 곳곳으로 만세운동이 번져갔다. 1919년 3월 28일 오후 2시 경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 송산면사무소 뒷산과 그 부근에서 사강리 주민 홍면옥 등의 주도로 만세를 불렀다. 사강리 장날을 맞이해 송산면과 서신면 등지에서 모인 500~600명의 군중이 함께 구한국국기를 앞세우고 조선독립을 외쳤다. 오후 3시경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송산면사무소 뒤에서 홍면옥·홍효선·예종구 등 3명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권총을 발사하여 홍면옥은 어깨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격분한 군중이 ‘순사를 때려 죽이라’고 외치며 돌을 던지고 몽둥이를 휘두르며 형세가 위험해졌다. 노구치 순사부장은 자전거를 타고 사강리의 경찰관주재소에서 남양 방면으로 도주했다. 그러자 200명가량이 군중이 추적하여 자전거를 넘어뜨리고 순사부장을 돌과 몽둥이 등으로 난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수사부장이 사망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후 여러 날에 걸쳐 경찰관헌과 수비대가 사강리의 가옥 200여호를 불태우고 10여인을 총살하였다는 사실이 홍면옥, 문상익의 고등법원 상고추가취의서에 기재되어 있다. 또 수원경찰서에서의 고문 상황에 대한 서술과 함께 경찰 신문 과정에서 맞아 죽은 사람도 있다고 기술되어 있다. 최소 고문 과정에서 1명 사망, 사강리에 들어온 군경의 보복 과정에서 10여명 사망이 확인된다. 10여명의 정확한 수치를 확정할 수는 없어서 11~16명으로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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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중심지 사강시장
3월 26일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100~200명이 송산면사무소와 주재소 부근에서 구한국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벌이고 서신면 방면으로 행진했다. 3월 26일 오전에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의 구장 홍명선 집에서 계원 120명이 모여 계모임을 할 때 사강리에 사는 홍효선의 제안으로 시위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만세시위를 시작했다. 오후 2시경 면사무소 뒷산에서 다수 사람들이 홍면옥(홍면)의 주도로 만세를 불렀으며, 오후 4시 경에는 주민 100~200명이 송산면사무소로 몰려가 구한국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 수십 명이 면사무실로 들어가 면장과 서기들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여 만세를 외치게 했다. 시위군중은 면사무소와 주재소 부근은 물론이고 마을을 돌면서 만세를 불렀고, 저녁에 남쪽 서신면 방면으로 행진해 밤 11시경에 해산했다. 이 시위는 3월 28일 사강장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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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경현 집 터
경기도 수원군(水原郡) 송산면(松山面) 사강리(沙江里)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을 처단하였다. 1919년 3월 26일 오후 5시경 홍면(洪玉+冕, 이명 洪冕玉)은 사강리에 위치한 송산면사무소 근처에서 태극기를 내걸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를 본 차경현 등 군중은 홍면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이틀 뒤인 28일 오후 2시경 송산면사무소 뒷산에서 홍면을 비롯한 1,000여 명이 모여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홍면 등은 면사무소로 가서 면장과 면서기 등에게 만세를 부를 것을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인 순사부장 노구치[野口廣三]가 홍면 등 2~3명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에 홍면 등이 저항하자, 노구치는 권총을 꺼내 홍면을 쏘아 사망시켰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일본 경찰을 죽이라고 외치자, 노구치는 자전거를 타고 사강주재소 방면으로 달아났다. 이에 차경현 등 시위 군중은 뒤쫓아 가면서 돌을 던졌다. 마침내 노구치가 돌에 맞아 자전거에서 떨어지자, 차경현 등은 일본인 순사를 돌과 몽둥이로 처단하였다. 이 일로 체포된 차경현은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살인,소요,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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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강경찰관주재소
송산지역 만세운동 당시 주민들을 탄압했던 일본 경찰관 주재소가 있던 곳이다. 1919년 3월 28일 만세운동 당시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는 주민들을 향하여 총을 쏘며 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면옥이 총상을 입고 쓰러지자 주민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고, 주재소에 들어 자전거를 타고 탈출을 시도하던 노구치는 주민들에 의해 처단되었다. 이후 일제는 사강리를 중심으로 부근 20여개 마을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를 실시하여 가옥에 불을 지르는 등 악행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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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면사무소 터
송산지역 만세운동 당시 송산면사무소가 있던 자리이다. 1919년 3월 26일 호세 납부를 위해 모인 주민과 이후 합류한 200여 명의 주민들이 사강장터를 거쳐 면사무소로 이동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8일 사강장날 오전에 시작된 만세운동은 오후가 되자 참여 인원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송산지역 주민들은 면사무소 뒷산(현 송산초등학교)과 그 부근에 모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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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기념비
송산면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6일 사강리에서 홍면옥(일명 홍면)의 지휘 아래 만세를 부르며 시작되었으며, 이틀 뒤 사강장날 3월 28일 인근 면민 1,000여 명이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에 당황한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이 총을 쏘며 탄압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홍면옥이 총상을 입고 쓰러지자 주민들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고, 울분을 참지 못한 군중이 순사부장을 붙잡아 때려죽임으로써 이에 앙심을 품은 왜인과 헌병이 앙심을 품고 총칼을 휘두르며 불을 질러 180여 호가 잿더미가 되고 목숨을 잃었다. 이에, 그 아픔을 위로하고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되새기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삼일동산을 만들고 기념비를 세웠다. 당시 만세운동이 있었던 송산면사무소의 뒷산은 지금의 송산초등학교 후문으로, 학교 교정 내에 삼일동산을 조성하고 1979년 3월 1일에 세운 기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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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초등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6일과 28일에 송산면 주민 1,000여 명이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26일 홍면옥(일명 홍면)은 송산면사무소 근처에서 태극기를 내걸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사강리 만세운동을 이끌었으며, 송산면 사강장날이었던 3월 28일에는 송산면사무소 뒷산에서 1,0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이 총을 꺼내 탄압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홍면옥이 총상을 입고 쓰러지자 울분을 참지 못한 20여 명이 순사부장을 뒤쫓아 돌과 몽둥이로 그를 처단했다. 이에 앙심을 품은 왜인과 헌병이 앙심을 품고 총칼을 휘두르며 불을 질러 180여 호가 잿더미가 되고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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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광연 묘
왕광연(1872 - 1951)은 1919년 3월 26일 오후 5시경 마을주민들과 함께 송산면사무소 부근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독립만세를 불렀다. 3월 28일에도 송산면사무소 뒷산과 그 부근에서 1,000여 명의 군중과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시위를 탄압하기 위해 출장 온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가 홍면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총상을 입히자, 순사를 죽이라고 외치며 도망가는 노구치를 추격하여 돌을 던지고 몽둥이로 난타하여 처단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7월 5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왕광연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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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유 묘
홍덕유(1887 ~ 1947)는 1916년 시베리아와 만주지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후, 1919년 국내로 돌아와 민립대학기성준비회 준비위원, 신사상연구회, 조선기근대책강구회 준비위원, 화요회 등에 참여했다. 또한 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및 위원을 역임하고, 상하이에서 국내로 공산주의운동 지원금 및 항일격문을 들여오는 것뿐만 아니라 6.10만세운동 준비에 관여하였다. 1926년 6.10만세운동 준비과정이 발각돼 촉발된 〈제2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체포되어 1928년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0년 석방되었으며, 출옥한 이후 중앙일보사에 입사하여 경리부장, 공무국장을 역임하였다. 1943년 화요파 공산주의자그룹 결성 참가 등 공산주의 운동을 이어나갔다.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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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칠보 묘
공칠보(1884 - 1939)는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으로, 오산장날인 1919년 3월 29일 경기도 수원군 성호면 오산시장 만세운동 계획에 참가,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제작하는 등 준비 후 시장에 모인 3백여 명의 군중에게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배포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 도중 일경에 붙잡힌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시위군중과 함께 주재소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시위를 해산시키려는 면장에 대항하여 면사무소를 점령하고 우편소와 일본인 상점을 부수면서 만세시위를 밤늦게까지 전개하였다. 그는 이 일로 붙잡혀 6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소요(騷擾) 혐의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다. 199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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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 시위지 쌍봉산
쌍봉산은 화성 지역 3.1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적지로 해발 117m이며, 장안면과 우정면을 아우르는 산이다. 1919년 4월 3일 주곡리를 출발하여 석포리, 수촌리를 거쳐 어은리의 장안면사무소에 도착한 시위군중들은 면사무소의 서류와 집기를 파괴하고 전부 불태워버렸다. 이후 쌍봉산 남쪽 봉우리에 올라 만세를 부르며 독립 의지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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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희식 집 터
차희식(車喜植)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 차병한(車炳漢)·차인범(車仁範) 등의 동지와 함께 화성군 장안면(長安面)·우정면(雨汀面)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그는 3월 1일 이후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전해듣고, 차병한·차병한과 함께 이영쇠(李永釗) 등에게 장안면 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한 계획을 알려서, 인근 주민들에게 몽둥이를 가지고 면사무소로 모이도록 연락하는 한편, 자신은 장제덕(張濟德)·장소진(張韶鎭)과 함께 석포리(石浦里) 주민들에게 참여하도록 홍보하였다. 군중 200여 명이 모인 장안면 사무소에서 선두에 서서 투석과 몽둥이로 면사무소 건물을 부수고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점차 군중이 1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다시 이들은 인근의 쌍봉산(雙峯山)으로 인솔하여 그 곳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으며, 이어서 차병혁·차인범(車仁範)과 함께 2천여 명으로 불어난 만세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우정면 사무소로 가서 그 곳의 건물을 파괴하고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였다. 다시 석포리 이장 차병한의 제의로 화수리(花.樹里)에 있던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고 방화하였다. 이 때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인 순사 천단풍태랑(川端豊太郞)이 권총을 발사하며 도망가자, 차인범·정서송(鄭庶松)·이순모(李順模)·장제덕(張濟德)·장소진(張韶鎭) 등과 함께 추격하여 격살시키는 등, 격렬하게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살인·방화와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9년 2개월만에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