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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리 만세터 표지석
3.1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난 다음에 전국 방방곡곡에서 잇따라 만세운동이 일어나서 들불처럼 번져갈 때 이곳 양주에서도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월 15일 천도교 양주교구장 윤원세 선생은 이윤의 등과 함께 금오리를 중심으로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만세시위는 금오네거리에서 시작하여 양주군청과 시둔면사무소 등이 있던 의정부리로 진출하려 하였으나, 일제 경찰들의 진압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3월29일 밤에 금오리 인근의 자일리에서 조금호 선생 등 30여명의 주민이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이고, 부근 동리들에서는 봉화를 올리며 횃불 시위를 벌이는 등 독립에 대한 열망을 굽히지 않았다. 현재 의정부시 금오동 금오사거리에는 이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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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추모비
독립투사 추모비는 동풍신을 비롯한 동창률, 동민수, 동석기, 동주원, 동명옥, 동상엽 등 7분의 광천동씨 애국지사의 추모비이다. 동풍신은 1919년 3월 15일의 하가면 화대동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17세의 나이에 옥중 순국하였으며, 오랜 병상에 누워있던 아버지 동민수 역시 하가면 화대동 일대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왜헌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동풍신은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 동민수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동창률은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활동 및 기관지 〈대동신보(大同新報)〉의 배포, 의친왕의 상해 망명 추진 등으로 옥고를 치렀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았고, 동석기는 1919년 3월 1일 목사로서 파고다공원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징역 7월, 집행유예 3년을 받아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동주원은 경성의전 재학 중 1919년 3월 1일 파고다공원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징역 6월, 집행유예 3년을 받고 출옥 후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동명옥은 1919년 3월 10일 단천 천주교인 독립선포식에 참가하여 만세 고창 주도하다 함흥형무소에 수감 실형선고를 받았다. 동상엽은 어업으로 재산을 축적하여 연해주 지방을 근거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 이범석 장군에게 군자금을 조달하며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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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세 추모비
면암 윤원세(1890 - 1939)는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으로, 1916년부터 천도교 의정부 교구장으로서 천도교당 내 야학당을 운영하면서 농촌 청소년과 부녀자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던 중 1919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3월 15일 금오리에서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의정부로 진출하려다 일경에 저지되었다. 1923년 11월 27일 금오청년회와 부인회를 조직하여 농촌진흥을 위해 활동하였고, 1936년 8월 14일에는 멸왜기도(滅倭祈禱)와 특별모금운동을 벌였다. 1938년 4월 황해도 신천에서 열린 천도교 전국교구장대표 특별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4월 25일 신천 경찰서원 2명에게 이끌려서 귀가하였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39년 5월 2일 사망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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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세 공적기념비
1919년 3월 15일 의정부 금오동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면암 윤원세(1890 - 1939)는 1916년 천도교 의정부 지역교구장으로 야학당을 설치,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고 생도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이후 1936년 8월 14일 멸왜기도와 특별모금 운동을 벌이며 지속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4월 천도교 전국교구장대표 특별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고문 후유증이 악화되면서 1939년 5월 2일 만 4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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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세 애향공적비
면암 윤원세(1890 - 1939)는 1890년 11월 7일 의정부 금오동에 태어나 1916년 천도교 의정부 지역교구장으로 야학당을 설치,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고 생도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는 등 독립운동에 앞장섰으며, 천도교구장으로 1919년 3월 15일 의정부 금오리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1936년 8월 14일 멸왜기도와 특별모금 운동을 벌이며 지속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8년 4월 천도교 전국교구장대표 특별기도회에 참석하였다가 일경에 붙잡혀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고문의 여독으로 만 49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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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선열의 유훈)
3.1운동기념비는 만세를 하는 손을 태극기가 감싸고 있는 모양으로 3.1운동의 정신을 형상화하였으며, 기념비 하단에는 선열의 유훈과 광복회 의정부시지회 애국지사 66인 명단, 그리고 대한민국 독립운동 주요 연표가 새겨져 있다. 2015년 조국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의 명예 선양과 무관심속에 잊혀진 역사의 현장을 되살리고, 일제 침략에 항거한 선열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후대에게 널리 일깨우기 위하여 광복회 경기도지부 의정부시지회에서 건립하였으며, 의정부 평화통일 테마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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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연영 구정서 순국추모비
구연영(1864 - 1907)은 이천의 의병장이며 기독교전도사이자 애국계몽운동가로, 1896년 1월 이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중군장이 되어 이천시 광현(廣峴- 넓고개) 전투와 남한산성 전투 등을 비롯한 을미의병항쟁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기독교 선교활동 및 애국계몽 활동을 하다가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의 밀고로 아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07년 7월 아들 구정서와 함께 총살당하였다. 구정서는 구연영의 장남으로, 동대문교회 전도사로 복음전파에 힘썼으며, 보안회·자강회 회원으로 항일운동에 참여했고 낙향하여 구국회 책임자로 활동했다. 원주·여주 등지에서 의병지도자들과 항일운동을 꾀하였으며 일진회의 밀고로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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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운규 부조
춘사 나운규(1902 - 1937)는 함북 회령(會寧) 사람으로, 1919년 4월 초순 회령에서 3·1독립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간도로 건너가 독립군에 투신하였다. 1920년에는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가입, 항일전을 전개하였는데 4명의 동지와 함께 회청선(會淸線) 7호터널 폭파 및 전선절단 임무 등 항일전선의 대열에 적극 투신하였으나 1921년 1월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향으로 압송되었으며, 1921년 3월 5일 소위 보안법 및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영화계로 진출하여 한국 영화예술 개척 및 「아리랑」 등 주로 민족적 성향이 강한 영화를 제작하여 일제하 항일민족의식 고취에 크게 공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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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애국지사 공훈비
이천시 설봉공원에 있는 충효동산에는 고려부터 대한제국까지 이천이 낳은 충신과 애국지사, 그리고 효자와 열녀 72명을 기리고 있는데, 거란의 소손녕이 침입해 왔을 때 외교의 힘으로 물리친 장위공 서희(章威公 徐熙) 장군을 중심으로 오른쪽 벽면에 이천을 빛낸 22분의 애국지사의 공적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소개되어 있는 애국지사는 다음과 같다. 구연영(국내항일, 독립장, 1963년), 김봉기(의병, 애국장, 1991년), 임형순(의병, 애국장, 1995년), 전덕기(계몽운동, 독립장, 1962년), 박정심(의병,애족장, 1995년), 윤순채(의병, 애국장, 1995년), 박경채(의병, 애족장, 1995년), 구정서(의병, 애국장, 1991년), 김원조(국내항일, 독립장, 1963년), 유성근(만주방면, 애국장, 1990년), 이기룡(임시정부, 애국장, 1991년), 박종설(3.1운동, 대통령표창, 1995년), 이상혁(3.1운동, 애족장, 1990년), 한석동(3.1운동, 애족장, 1990년), 권중효(3.1운동, 애족장, 1990년), 이수흥(만주방면, 독립장, 1962년), 유택수(만주방면, 독립장, 1968년), 유남수(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김현국(문화운동, 애족장, 1990년), 나기창(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김기주(광복군, 애족장, 1990년), 박영순(국내항일, 애족장,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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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천장터 3.1운동만세시위지
오천장터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마장면 주민 1,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이다. 마장면 관리에 사는 이창호·김기재·박종설 등은 오천리 장날인 1919년 3월 30일에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각 동리에 통문을 들렸다. 그러나 표광수의 밀고로 오천주재소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를 한 탓에 낮에는 시위를 벌이지 못하고 이날 오후부터 밤까지 각 마을 단위로 만세 운동과 함께 봉화 시위를 벌였다. 오천장터 만세 운동은 3월 30일부터 4월 1일까지 계속되었다. 천도교인들이 주도한 시위대는 규모가 1,000여 명에 이르렀고, 일제 경찰과 격렬한 충돌 끝에 1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현재 이천시 마장면 오천리 공영주차장 도로변 전봇대 옆에 이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안내판이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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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가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모가면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모가면 주민 15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인곳이다. 모가면 만세운동은 이 마을에 사는 권중효와 한석동이 주도하여 일어났다. 권중효는 신둔면 만세 운동을 위한 사전모임에 참가하였다가 자신의 마을에서도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매형인 한석동과 상의하였다.1919년 4월 2일 권중효와 한석동은 마을 주민들을 설득한 끝에 인근 응봉산(매봉재)에 함께 올라가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벌였다. 그 후 마을 사람들 다수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며, 주동자인 권중효, 한석동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권중효 선생과 한석동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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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백사면사무소는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이자 이수흥이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습격한 곳으로, 두 가지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는 곳이다. [백사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 백사면 만세 시위는 송말에 사는 임덕재·임예재·임경순·임재순 등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1919년 4월 2일 마을 사람들을 인솔하고 송말리 앞산에 올라가 만세를 부른 후 면 소재지가 있는 현방리로 행진하였다. 도중에 시위 참가자의 수가 점점 불어나 많은 수의 군중들이 현방리에 모여들었는데, 당시 백사면장인 이연의를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애국지사 이수흥 선생] 이수흥은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으로서 19세가 되던 해에 만주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이 사관양성을 목적으로 길림성(吉林省)에 세운 신명(新明)학교를 졸업하였다.1923년 7월경에는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대한통의부가 의군부로 확대 개편되자 의군부 총재 채상덕(蔡相德)의 부하로서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그후 임시정부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에 가담한 그는 1925년 새총독이 시찰여행을 하고 있을 때 압록강 상의 증기 란치(steam launch : 船載大型端艇)에서 총독에게 수류탄을 던지기도 하였으나 성사되지는 못했다.한편 그는 주만참의부 제2중대 특무정사(特務正士)에 임명되어 1926년 5월에 모젤권총 1정과 동 실탄 147발, 부로닝 구식 권총 1정과 동 실탄 29발을 휴대하고 총독 및 일제 고관을 주살하기 위하여 국내로 들어왔다.그는 먼저 군자금이 필요했으므로, 동년 7월 6일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발참리(平山郡安城面發站里)에 사는 김상렬(金相烈)을 찾아가 요청하였으나 뜻일 이루지 못하였다.다시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중리(邑內面中里)에 사는 유택수(柳澤秀)의 집으로 가던 도중 동월 10일 서울 동소문(東小門)파출소를 습격하여 보초근무중인 일경 덕영승차(德永勝次)를 저격하여 중상을 입혔다. 동년 9월 9일에는 안성(安城)에서 유택수와 함께 군자금 요청을 거절하는 부호 박승육(朴承六)의 아들 박태병(朴泰秉)을 사살하였다.그리고 10월 20일에는 경기도 이천군 현방(玄方) 경찰주재소를 습격한 후 다시 백사(柏沙)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면서기 송천의(宋天義)를 사살하였다.그는 그후 새로운 계획을 위하여 변장하고 서울로 피신하였다. 동년 10월 25일에는 동지 유택수(柳澤秀)로 하여금 서울 수은동(授恩洞)에 있는 대성호(大成號) 전당포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부친의 부음(訃音)을 듣게된 그는 부득이 수원(水原)으로 내려가 발상하였다. 이때 이천경찰서장 하기(河岐)는 범인의 신장이 불과 5척이라는 말을 듣고 관내에 거주하는 신장이 5척되는 사람을 모조리 조사하게 하였다.이에 따라 일경 3천여명이 동원된 삼엄한 계엄상태의 3개월 동안, 4대사건을 신출귀몰한 수법으로 흔적도 없이 수행하던 그는 유택수와 함께 11월 6일 체포되어 3년의 예심 끝에 1928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29년 2월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