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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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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삼 묘
윤영삼(1891 - 1919)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양성면(陽城面) 및 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주민 2천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기물과 건물을 파괴, 방화하는 등 격렬한 만세운동을 하다가 붙잡혀 취조받던 중 모진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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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봉 묘
손정봉(1896 - 1971)은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양성면(陽城面) 및 원곡면(元谷面) 일대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원곡면과 양성면의 주민 2천여 명과 함께 시위에 참여하여 일경 주재소와 우편소, 면사무소 등을 습격하여 기물과 건물을 파괴, 방화하는 등 앞장서서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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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만흥 묘
염만흥(1878 - 1928)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원곡에서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이후 양성으로 옮겨가 양성면민과 합류하여 양성주재소 앞에서도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세 번의 재판 끝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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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독립만세항쟁 2일간 해방지 동상
안성의 원곡·양성면은 일제 식민통치기관에 저항하며 가장 격렬한 만세운동을 펼쳐 일제의 통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2일간의 해방'을 이루었다.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 황해도 수안군 수안면과 함께 3·1운동 전국 3대 실력 항쟁지로 손꼽히고 민족대표의 재판에 인용되기도 하였다. 본 사적은 3·1운동 당시 원곡·양성면에 주재 중인 경찰주재소, 통신선, 우편소, 면사무소와 일본인 대금업자 집 등과 함께 면사무소를 모조리 방화 및 파괴하여 일제 통치기관을 몰아내고 2일간의 해방 공간을 만든 항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조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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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항쟁동상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 원곡면민 1,000여 명은 태극기와 횃불을 들고 현재의 원곡파출소 앞 만세광장에 집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면장과 면서기를 앞세우고 양성면으로 돌진하였다. 때마침 양성 주재소 앞에서 평화적으로 시위를 벌이고 해산하려던 양성주민 1,000여 명과 조우하여, 연합한 2,000여 명의 시위대는 양성 주재소, 우편소, 일본인 가옥과 상점, 그리고 면사무소를 차례로 돌면서 파괴 및 방화함으로써, 서부 안성을 일제의 통치로부터 2일간 해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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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항쟁지비(원곡면)
이 곳은 1919년 원곡·양성 3·1운동의 진원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원곡면사무소 앞에 세워진 비석이다. 이 지역은 3·1운동 때 전국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독립운동이 일어났던 지역으로 황해도 수안, 평북 의주와 더불어 전국 3대 실력 항쟁지로 꼽히고 있다. 실제 이 지역 주민의 용감한 항쟁으로 경기 안성 서부지역을 2일간 해방시킨 기록도 가지고 있다. 원곡면 주민들은 1919년 3월 25일부터 매일 이곳에 모여 만세시위를 거듭하다 4월 1일 저녁 이유석·홍창섭·이덕순·이근수,·이희룡·최은식 등의 주도로 1천여 명이 대열을 지어 이웃 양성면으로 돌진 그곳 주민들과 합세하여 경찰관 주재소·면사무소 등 일제 통치기관과 일인 상점들을 방화·파괴하고 일본인들을 몰아냈다. 이어 4월 2일 새벽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원곡면사무소를 불태웠다. 또한 시위대는 평택의 경부선 철도를 차단하고 부근 남산에서 실력항쟁을 벌리고자 준비하다 일본군의 잔혹한 탄압을 받았다. 피검 361명, 순국 24위, 옥고 117명, 태형 40명, 민가 소실 9동의 피해를 입었으며, 공공시설 훼손 배상 및 취학방해 등 전국에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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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필 묘
송재필(1888 - 1965)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원곡의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 시위를 벌이고, 양성으로 옮겨가 양성면민과 합류하여 양성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의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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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지성 묘
원지성(1884 - 1933)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원곡의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 시위를 벌이고, 양성으로 옮겨가 양성면민과 합류하여 양성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의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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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3·1운동 기념관
안성 3.1운동기념관은 3.1운동 당시 가장 극렬하게 만세항쟁을 펼쳤던 4.1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집결지였던 만세고개 일원에 건립된 기념관이다. 안성지역의 만세운동은 전국3대 실력 항쟁이라고 불릴만큼 거셌는데 당시 자료를 포함하여 독립운동과 관련된 유물, 기록 등을 실물 모형 및 체험의 형태로 관람할 수 있다. 1989년 사료전시실을 건립한 것이 본 기념관의 전신으로 이후 2001년 무궁화동산을 준공하면서 광복사와 기념관을 개관했으며 2003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었다. 크게 로비층에 마련된 상설전시실,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어있다. 안성 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11월부터 4월 3일까지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 일원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이다. 원곡면과 양성면 일원에서 원주민들이 서울에서 일어났던 3.1 만세운동에 큰 영향을 받아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던 안성군 지역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를 소개하고 있다. 당시 안성군 독립운동가인 최은식, 이유석 등이 원곡면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세고개를 넘어 양성면으로 전래되어서 양성면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불태우고 우편소를 파괴하였으며 주재소와 사무소에 내걸렸던 일장기를 끌어내어서 불태우고 일본인 상점 등을 파괴하고 감옥에 갇힌 조선인들을 탈출시키는 2일간의 해방기를 가지고 있다. 일제는 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헌병대를 동원하여 수원과 안성 4개지역에 검거반을 파견하였고 약 800여명의 참여자들을 체포하고 276호의 가옥을 방화하였다. 그 결과 현장·옥중·부상 순국자가 26명이 발생하였고, 태형 41명, 177명이 투옥되어 최고 12년의 중죄 형량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이후 안성에서는 청년운동, 민족운동, 사회운동 등에 관심을 가졌으며 1920년 안성보통학교에서 야학을 개설하였으며 이후 청년운동,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와 연계한 무장투쟁을 전개해나가는 활동이 전개되었다. 안성지역 출신 중 김태원(죽산면 장계리 출신)과 유만수(금광면 개산리 출신) 등은 의열단, 대한애국청년당 등에 관여하였다. 또 1940년 광복군에서 활약한 인물 중에서도 안성지역 출신인 심광식(미양면 강덕리), 홍종윤(미양면 용두리), 박건배(고삼면 봉산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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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3.1운동기념탑
황해도 수안면, 평안북도 옥상면의 만세운동과 함께 전국에서 가장 격렬했던 항쟁지였던 곳에, 1984년 4월 1일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원곡면에서 기념탑 건립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원곡면 칠곡리 이종락 유족회원의 땅을 희사받아 건립했던 구(舊) 3.1운동기념탑이다. 2001년 11월 17일 만세고개에 안성3.1운동기념관 및 안성3.1기념탑(원곡-양성 3.1독립항쟁기념탑)을 건립하면서 구(舊) 3.1운동기념탑은 원곡면의 요청으로 기념탑 보수 및 편의시설을 설치하여 주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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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묘
이병철(1894 - 1970)은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사람으로, 1919년 4월 1일 원곡의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원곡면사무소에 모여서 만세 시위를 벌이고, 양성으로 옮겨가 양성면민과 합류하여 양성주재소 앞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를 파괴하는 등의 격렬한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건조물 소훼·소요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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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화 활동근거지(칠장사)
정철화(1878 - 1943)는 경기도 용인 출신으로.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국군의 강제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의 항전이 격화되던 1907년 하반기에 유생 신분으로 거의(擧義)하였다.이후 안성군 이죽면 칠장사에서 30여 명의 소규모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안성·충주·청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서울 외곽에 은거하던 중, 1907년 9월 30일 체포되어 내란죄로 15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 뒤 1913년 9월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일원으로 활동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