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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TAL. 59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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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규 구 묘
윤영규(1882 - 1926)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김포군 월곶면(月串面)에서 인근 마을인 갈산리(葛山里), 조강리(祖江里) 등의 주민 수백 명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군하리(郡下里)에 있는 공자묘(孔子廟)와 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에서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게 붙잡혔으며, 그해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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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우 구 묘
임용우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9일 월곶면 갈산리(月串面葛山里)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고 1919년 4월 9일에는 덕적도(德積島) 해변에서 명덕학교(明德學校) 운동회를 개최하여 만세를 부르며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등 애국활동을 하다가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잔인한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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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용우 묘
임용우(1884 - 1919)는 1884년 9월 월곶면 개곡리에서 태어나 창신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3년간 봉직한 후, 옹진군 덕적도에 명덕학교를 설립하여 8년간 봉직하였다. 동시에 일제에 항거하며 민족 해방을 계획하였으며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후, 김포시 월곶면 등지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시위행진을 주도하며 일본에 저항하였다. 그해 5월 일본군에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모진 고문 끝에 35세를 일기로 옥사하였다. 서대문 형무소 순국선열 현충사 내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1991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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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살눔의 묘
김포시 월곶면 고막리 푸른언덕교회 입구에 있는, 이살눔(이경덕)을 추모하는 기념비이다. 이살눔(이명 이경덕, 1886 - 1948)은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성서학교(聖書學校) 학생으로 김포군 월곶면(月串面) 고양리(高陽里)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고, 3월 22일 군하리 장터에서 수백 명의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배부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행진을 하다 피체되어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이살눔은 1948년 8월 13일에 62살을 일기로 숨을 거두었으나 친혈육은 없이 슬하에 양아들 유씨와 며느리가 있었으며 미처 묘소를 챙기지 못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포시 누산교회의 박흥규 목사가 주도하여 기념비를 세운 것이 본 사적이다. 한편 누산교회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1904년 세운 교회로 오라리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독립운동가들을 여럿 배출한 김포시의 교회이며 푸른언덕교회는 이살눔 지사의 며느리가 다니던 교회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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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곶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월곶면사무소 3.1운동 만세 시위지는 김포군 월곶면 주민 수백 명이 모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다. 1919년 3월 22일에 임용우, 윤영규, 조남윤 등은 통진 장날 장터에 있던 200여 명의 주민을 모아 시위를 벌였다. 또한 3월 29일에는 조남윤과 당인표 등이 주민 400여 명을 이끌고 향교와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임용우는 4월 9일에 시위를 전개하다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고문으로 옥사하였다. 조남윤도 체포된 뒤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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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환 구 묘
백일환(1884 - 1969)은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2일 김포군 월곶면 군하리(月串面 郡下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그 진행을 주도하였다. 군하리 장터에 나아가 3백여 명의 시위군중을 인솔하여 월곶면 사무소로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그해 10월 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백일환의 묘는 2013년 5월 29일에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474로 이장되었으며, 이곳에는 구 묘비가 남아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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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곶면민 만세운동 유적비
1919년 3월 22일은 오후 2시경 임용우, 윤영규, 조남윤, 최우석, 이병린 등의 주도로 장터에 있던 약 200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군중은 옛 통진읍인 군하리로 행진하여 향교, 보통학교, 면사무소 앞을 차례로 돌며 만세시위를 했다. 이날 군하리 출신 박용희의 주도로 성태영, 백일환, 이살눔은 4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통진향교, 면사무소, 주재소 등지로 시위행렬을 이끌었다. 성태영은 단 위에 올라가 독립연설을 하고 백일환은 이를 저지하던 일본 순사를 폭행하였다. 또한 이들은 한국인 순사보들에게 만세를 부르라며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일주일 후인 29일에 다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29일 오전 11시경 마을주민 400여 명이 읍내에 모이자, 조남윤은 당인표 등과 함께 이들을 지휘하여 향교와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한편 월곶면의 임용우·최복석은 29일 정오경 갈산리에 모였다가 군하리 공자묘와 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에 앞서 28일 밤 정인교·윤종근·민창식은 마을 주민 수십 명과 함께 마을 인근 함반산 꼭대기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후 덕적도의 명덕학교 교사였던 임용우는 4월 9일 학교 운동회에서 이재관·차경창 등과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 받고 옥고를 시르던 중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인해 같은 해 5월 10일 옥사하였다. 조남윤, 최우석, 정인교, 윤종근, 최복석, 이병린은 각각 징역 1년, 윤영규는 징역 8월, 이살눔, 정인교, 민창식은 징역 6월을 선고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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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관수 묘
신관수(1884-1922)는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08년 4월 이후 정용대(鄭容大) 의병장 휘하에서 통진군(通津郡) 교하면(交河面), 풍덕면(豊德面), 강화(江華)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 후 1909년 6월 강화도 고도(高島) 해안에서 선박을 습격하여 군량을 확보하는 등의 활동을 벌이다가 붙잡혔으며, 같은 해 7월 15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신관수의 묘는 대곶면에 있었으나 지역개발로 이전하면서 가족 합동 묘의 형태로 조성되었으며, 구 묘비는 오라니 장터 3.1운동 기념공원으로 옮겨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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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순 묘
전태순(1896-1963)은 경기도 김포(金浦) 사람으로, 1919년 3월 23일 김포군 양촌면(陽村面)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가하여 격문과 선언문 10여 매를 작성하여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배부한 후, 이날 양곡(陽谷)장터에 모인 수백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다가 피체되었으며, 같은 해 5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6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태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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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광장, 역사박물관 REMEMBER 1910
이석영 광장과 REMEMBER 1910은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석영 선생 6형제의 애국심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억하는 역사 문화공간으로, 특히 전 재산을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석영의 독립정신을 알리기 위해 조성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이석영(1855-1934)은 남양주시 화도읍 가곡리 일대 토지 등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40만 원(2021년 현재 가치 2조 원 이상)을 조국 독립을 위해 바쳤는데, 우리나라 무장 항일운동의 산실이자 광복군의 초석이 된 신흥무관학교 조성 및 운영에 사용됐다. 이석영 광장에는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석영 선생 6형제가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상징하는 표지석과 6개의 돌, 이석영 선생이 만주로 망명할 당시 건넌 압록강을 상징하는 바닥분수가 조성되어 있으며, 역사체험관으로 꾸며진 REMEMBER 1910 역사 전시관은 남양주 출신 독립운동가 102명의 이름이 벽돌에 새겨져 있는 독립의 계단을 비롯하여 역사 법정, 서대문 형무소, 뤼순(旅順) 감옥을 재현한 친일파 수감감옥 체험 공간과 이석영 6형제, 신흥무관학교 등을 다룬 전시시설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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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영 선산
이석영(1855-1934)은 1855년(철종 6년)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서른 살이 되던 1885년에 영의정을 지낸 거물급 관료이자 한양 인근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자였던 친척 이유원의 양자(養子)로 입적되었다. 연로한 양부 이유원은 3년 뒤 세상을 떠났고, 양부의 재산은 대부분 이석영에게 상속되었다. 구한말 10대 부자, 한양 3대 부자로 꼽히던 이유원의 재산을 상속받은 이석영은 자연히 거부가 되었다. 1910년, 완전히 국권을 빼앗긴 뒤인 9월의 어느 날, 회의에서 여섯 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해 일가 전체가 만주로 떠나기로 결의한다. 일제의 눈을 피해 헐값에 처분한 재산은 약 40만 원으로, 이 재산의 대부분은 이석영 선생이 소유하던 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석영은 많은 재산을 독립군 자금으로 내놨고 그 돈이 씨앗이 되어 서간도 삼원포에 경학사가 창립되고, 신흥무관학교(신흥강습소)가 설립됐으며,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동포들이 안전하게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에게 1991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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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건 기념비
김중건(金中建, 1889~1933)은 함남 영흥 사람으로 1908년 고향에서 연명(鍊明)학교를 설립하여 교육활동을 하였으며, 1913년 만주로 건너가 건원학교, 도전학교, 덕수학원, 쟈피구학원, 이도구학원, 팔포강학원 등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힘썼다. 1920년 11월에는 만주 안도현에서 대진단(大震團)이라는 독립군 부대를 조직하여 활약하였으며, 1928년 이후에는 만주 지역 동포사회에서 조선민사(朝鮮民社), 농우동맹(農友同盟), 진우회(震友會) 등을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3년 3월, 그를 시기하던 공산주의자에 의해 피살되었다. 소래 김중건 기념 사업회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83년 10월 16일 이 비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