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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장터3.1운동기념비
1919년 3월 29일 구포장터에서 일어났던 3.1만세운동을 기념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한 선열들의 민족혼을 기리기 위하여 광복 50주년인 1995년 8월 15일 조성하였다. 구포장터 3.1운동은 1919년 3월 29일 구포 장터를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양봉근이 내려와 구포면 서기 임봉래와 상의하고 다음날 윤경(尹涇)과 유기호(柳基護)와도 만나 거사를 당부하고 상경하였다. 임봉래·유기호·윤경·김옥겸(金玉兼)·김윤길·허정·김용이 등은 1919년 3월 27·28일 박영초(朴永初)·이수련 집에서 논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 구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교대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의거 전날 밤 큰 태극기 하나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晉泰)·김장학(金章鶴)·이몽석(李夢石)·양태용(梁太溶)·김영길·정치호(鄭致浩)·권용학(權龍鶴)·안화중(安華重)·허희중(許希中) 등 청년 동지들과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고 장꾼 1,000여 명과 시위에 들어갔다. 일부는 시위를 위하여 시장 철시를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고, 김윤길 등은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에게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치고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후 김옥겸 외 11명의 주도 인물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자 임봉래·윤정은(尹正殷) 등은 1,2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석방을 요구하며 구포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과정에서 일본 군경 3명과 한국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 군중들은 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42명으로 대부분이 20~30대의 청년들이었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부산부와 동래읍 시위가 학생들이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노동자, 농민, 상인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데 큰 특징이 있다. 따라서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1920년대 구포 지역 청년 운동 및 농민 운동 등 사회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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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만세역사 테마거리
구포만세역사테마거리는 구포장터에서 일어났던 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2014년 만들어진 역사테마거리이다. 구포장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9일 구포 장터를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 양봉근이 내려와 구포면 서기 임봉래와 상의하고 다음날 윤경(尹涇)과 유기호(柳基護)와도 만나 거사를 당부하고 상경하였다. 임봉래·유기호·윤경·김옥겸(金玉兼)·김윤길·허정·김용이 등은 1919년 3월 27·28일 박영초(朴永初)·이수련 집에서 논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9일 구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이들은 교대로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만들고, 의거 전날 밤 큰 태극기 하나와 ‘대한 독립 만세’라고 크게 쓴 현수막도 만들었다. 3월 29일 정오 박덕홍(朴德弘)·손진태(孫晉泰)·김장학(金章鶴)·이몽석(李夢石)·양태용(梁太溶)·김영길·정치호(鄭致浩)·권용학(權龍鶴)·안화중(安華重)·허희중(許希中) 등 청년 동지들과 비밀리에 독립 선언서와 태극기를 나누고 장꾼 1,000여 명과 시위에 들어갔다. 일부는 시위를 위하여 시장 철시를 호소하면서 장꾼을 지휘하였고, 김윤길 등은 구포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에게 민족적 양심으로 뉘우치고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후 김옥겸 외 11명의 주도 인물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자 임봉래·윤정은(尹正殷) 등은 1,200여 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석방을 요구하며 구포주재소로 돌진하였다. 일제 경찰들은 시위 군중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 과정에서 일본 군경 3명과 한국인 경찰 1명이 중상을 입었고, 시위 군중들은 9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재판에 회부된 인물은 42명으로 대부분이 20~30대의 청년들이었다.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부산부와 동래읍 시위가 학생들이 중심이었던 것과 달리 노동자, 농민, 상인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데 큰 특징이 있다. 따라서 구포 장터 3·1 만세 운동은 1920년대 구포 지역 청년 운동 및 농민 운동 등 사회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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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기 추모비
김형기(1896-1950)의 호는 동산이며,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의사, 『대중 신문』 발행인으로 활약한 언론인이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천석꾼이었던 아버지가 개화 바람을 타고 광산업에 종사하다 실패하면서 사상의 땅과 가산을 모두 탕진하였다. 결국 집안은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로 옮겨갔다. 1911년 16세에 사상의 지주인 지씨(池氏)의 딸과 결혼하고 처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사립명진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김형기는 재경 유학생 회장으로서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여했는데, 당시 민족 대표 33인과 연결하여 학생들을 규합하고 서울 파고다 공원[현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우여곡절 끝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울산과 기장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기장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약수(金若水), 곽상훈(郭尙勳) 등과 교우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1926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 동산의원(東山醫院)을 개원하였다. 동산의원에는 최천택(崔天澤), 박희창, 이기주, 오상순 등 일제 강점기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에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 자주 출입하였다. 해방 3년 전인 1942년에 중구 대청동 남일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병원을 옮겨 해방 이후까지 같은 장소에서 병원을 운영하였다. 김형기는 병원 수입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당시 동산의원은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김형기는 서상권, 김칠성(金七星), 김재준(金在俊) 등과 함께 미군정청 경상남도 경남도고문회의 고문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가 귀환 동포를 구호하기 위해 조직한 ‘귀환동포경남구호회’의 위원장을 맡아 구호 활동도 전개하였다. 1945년 12월 5일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에서 『대중 신문』을 창간하여, 1년 6개월간 발행인으로서 언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대중 신문』은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논지는 중도 노선에 속하였으나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의 정치 상황 속에서 김형기는 사찰 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다. 결국 ‘향후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본분인 의사로서 충실할 것’이라는 자신 명의의 성명서를 신문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46년에는 신탁통치배격위원회 재무부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도 선출되었으며, 조선민족혁명당 경상남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4월 9일에는 군정 법령 제55호 ‘정당 등록법’ 위반 혐의로 수사 기관에 잡혀가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활발한 정치·사회 활동을 벌이던 김형기는 6·25 전쟁 중 좌익계로 분류되어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의 사촌 동생 집에서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 김형기는 일제 강점기 3·1 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의사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공간에서 양심적이고 민족주의적 길을 추구하였던 행적이 이념 대립의 와중에 좌파 인물로 몰려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1990년 8월 15일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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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기 기념관
김형기(1896-1950)의 호는 동산이며, 일제 강점기와 현대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의사, 『대중 신문』 발행인으로 활약한 언론인이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천석꾼이었던 아버지가 개화 바람을 타고 광산업에 종사하다 실패하면서 사상의 땅과 가산을 모두 탕진하였다. 결국 집안은 경상남도 양산군 상북면 외석리로 옮겨갔다. 1911년 16세에 사상의 지주인 지씨(池氏)의 딸과 결혼하고 처가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사립명진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에는 동래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였다. 김형기는 재경 유학생 회장으로서 경성의학전문학교 4학년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여했는데, 당시 민족 대표 33인과 연결하여 학생들을 규합하고 서울 파고다 공원[현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서를 배포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우여곡절 끝에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울산과 기장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기장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김약수(金若水), 곽상훈(郭尙勳) 등과 교우 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1926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 동산의원(東山醫院)을 개원하였다. 동산의원에는 최천택(崔天澤), 박희창, 이기주, 오상순 등 일제 강점기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에서 항일 활동을 하던 인물들이 자주 출입하였다. 해방 3년 전인 1942년에 중구 대청동 남일초등학교 정문 앞으로 병원을 옮겨 해방 이후까지 같은 장소에서 병원을 운영하였다. 김형기는 병원 수입으로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당시 동산의원은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거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방 후 김형기는 서상권, 김칠성(金七星), 김재준(金在俊) 등과 함께 미군정청 경상남도 경남도고문회의 고문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남본부가 귀환 동포를 구호하기 위해 조직한 ‘귀환동포경남구호회’의 위원장을 맡아 구호 활동도 전개하였다. 1945년 12월 5일 부산광역시 중구 동광동에서 『대중 신문』을 창간하여, 1년 6개월간 발행인으로서 언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대중 신문』은 타블로이드판 2면으로 논지는 중도 노선에 속하였으나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당시의 정치 상황 속에서 김형기는 사찰 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받았다. 결국 ‘향후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본분인 의사로서 충실할 것’이라는 자신 명의의 성명서를 신문에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1946년에는 신탁통치배격위원회 재무부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으로도 선출되었으며, 조선민족혁명당 경상남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6년 4월 9일에는 군정 법령 제55호 ‘정당 등록법’ 위반 혐의로 수사 기관에 잡혀가기도 하였다. 이상과 같이 활발한 정치·사회 활동을 벌이던 김형기는 6·25 전쟁 중 좌익계로 분류되어 부산광역시 중구 부평동의 사촌 동생 집에서 정보기관에 연행되었다. 6·25 전쟁의 와중에서 이승만(李承晩) 정권은 비판적 지식인을 불법으로 감금하고 학살하였는데, 특히 1950년 여름 낙동강 전선을 사이에 두고 전투가 치열했을 때 탄압이 극에 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보기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한 후 행방불명되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였다. 김형기는 일제 강점기 3·1 운동을 주도하다가 옥고를 치르는가 하면 의사로서 수많은 독립운동가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공간에서 양심적이고 민족주의적 길을 추구하였던 행적이 이념 대립의 와중에 좌파 인물로 몰려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 1990년 8월 15일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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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복기념관
부산 광복 기념관은 1876년 부산항 개항 이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까지의 일본의 침략상과 부산 지역의 항일 독립 투쟁에 관한 역사적 유물을 전시함으로써, 선인들의 민족정신과 광복 활동을 기려 전승하고, 후손들에게 올바른 국가관을 세워 주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1997년 8월 15일 기본 계획을 구상하여, 1998년 2월 12일 설계 현상 공모 당선작을 결정하고, 9월 12일 기본 및 실시 계획을 완료하였다. 1999년 6월 6일 준공하여, 2000년 1월 1일부터 부산광역시 시설 공단에서 수탁 관리하게 되었다. 2000년 8월 15일 광복절 제55주년을 맞이하여 부산 광복 기념관을 개관하였다. 1층에는 사무실과 안내실, 로비가 있고, 2층에는 로비와 전시관이 있다. 전시실은 ‘개항과 부산인의 독립 정신’, ‘애국 계몽 운동의 전개’, ‘3·1 운동’, ‘일신 여학교의 독립운동’, ‘1920~1930년대 노동 운동의 전개’, ‘일제 말기 학생들의 독립운동’, ‘사회 문화 운동’, ‘광복의 환희’ 등 총 8개의 주제로 구성되어 있다. 실제 의병장이 사용한 장총 등의 유물과 다양한 사진 자료, 디오라마 등을 통해 부산에서 일어났던 다양한 항일 독립운동의 실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지하 1층에는 주말에 영화 상영이 이루어지는 홍보관[120석 규모]이 있다. 2007년에 순국선열과 애국 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설치된 위패 봉안소에는 2012년 11월 현재, 순국선열 지사 39위, 외국 지사 35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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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석 집
한형석(1910-1996)의 이명은 한유한이며, 일제강점기 중국 상하이 신예예술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하며 항일 가곡 등을 작곡한 독립운동가이다. 1939년 10월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결성될 때 이에 합류하였다. 전지공작대 예술조장을 맡은 한형석은 다양한 독립군가와 연극을 창작하였다. 군가인 「한국행진곡(韓國行進曲)」, 「항전가곡(抗戰歌曲)」 등을 작곡하였으며, 「국경의 밤」, 「아리랑」 등을 공연하여 중국군과 일반 대중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40년에는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에서 교관을 역임하였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으며, 한형석은 『광복군가집』 1, 2집을 발간하고 「국기가(國旗歌)」,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 항일 가곡을 작곡하였다. 1944년 10월 한형석은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에 선임되어 복무하면서 작곡 및 가극 활동으로 침체된 항일 정신을 고취하고 광복군과 중국군 연합전선을 한층 견고히 하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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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일학생의거 터 표지석
부산항일학생의거는 노다이사건이라고도 불리며, 1940년 부산에서 열린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에서 일본인 심판 노다이의 부당 행위에 항의하여 일어난 항일학생운동이다. 일제는 1940년 11월 21·22일 양일간 경남의 부산·마산·진주 지역의 갑종 중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제2회 경상남도지구 갑종중학교 합동야외훈련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훈련대회를 위해 일제는 학생들을 동군과 서군으로 편성하였다. 동군에는 부산제2상업학교, 부산중학교[일본인 학교. 이하 (일)로 표기], 부산제1상업학교(일) 등을 편성하고, 서군에는 동래중학교, 마산중학교(일), 진주농업학교 등으로 편성하였다. 동군은 구포에서, 서군은 진영에서 출발하여 김해 한림정에 도착하는 모의 군사훈련으로서 승부가 걸린 대회였다. 이 훈련의 총책임자는 경남 지구 위수사령관 및 부산 지구 병참사령관 노다이(乃台兼治) 육군 대좌였다. 노다이 대좌는 일본인 학교가 승리할 수 있도록 진군·휴식·야영·보급품 지급 등에서 조선인 학교에 대해 노골적으로 차별하였다. 2일간 모의 전투 훈련을 마친 후 11월 23일 일제는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경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는 진주중학교, 마산중학교, 동래중학교, 부산중학교(일), 부산제2상업학교, 부산제1상업학교(일), 진주농업학교, 울산농업학교 등의 5학년제 중학교, 동래고등여학교, 부산항고등여학교[경남여고 전신], 부산고등여학교(일), 삼도고등실습여학교(일) 등의 여학교, 3년제 을종학교인 김해공립농업학교, 밀양농잠학교, 마산상업학교, 통영공립수산학교, 입정상업학교, 초량상업학교 등이 참여하였다. 대회 종목은 100m·400m 릴레이, 80m 장애물, 넓이뛰기, 높이뛰기, 턱걸이 등의 육상경기, 씨름, 줄당기기, 견인 경주, 담가 운반 등의 단체경기, 수류탄 던지기, 토낭 운반, 비상 소급, 무장 행군 등의 군사 경기 등으로 구성되었다. 주최측은 1회 대회 우승팀인 동래중학교를 비롯한 조선인 학교의 우승을 막고, 일본인 학교가 우승할 수 있도록 민족 차별적으로 대회를 운영하였다. 대회 입장 순서에서 일본인 학교에 이어 조선인 학교를 입장시켰고, 대회 운영도 일본인 학교에 유리하도록 편파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하여 노다이 대좌에 의해 우승이 동래중학교에서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교로 뒤바뀌어 발표되었다. 이에 조선인 학교 학생들은 대회 폐회식에서 일장기 하강을 외면하고, 일본 국가를 거부하였다. 대회 폐회 선언 뒤 학생들은 노다이 대좌를 비롯한 일본인들을 공격하였다. 부산공설운동장부터 시내까지 시위행진을 벌이면서,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 ‘너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무엇이 내선일체(內鮮一體)냐’ 등의 구호를 외쳤다. 또한 경남 지구 위수사령관으로서 대회 총책임자인 일본군 대좌 노다이의 관사를 습격하고, 그를 구타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인 학생 200여 명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주모자로 지목된 15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재판에서 14명이 징역 8개월 및 징역 8개월·집행유예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또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는 교내 자체적으로 퇴학 21명, 정학 44명, 견책 10명 등의 징계를 실시하였다. 부산항일학생의거는 일제강점기에 전개된 부산 최대의 항일 학생 의거였다. 동래중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를 중심으로 부산 지역뿐 아니라 마산과 진주 등 경남 지역 학생들이 함께 참여하였다. 부산항일학생의거는 일제말 전시체제하에서 전개된 대규모 학생 투쟁으로서 일제의 전쟁 동원 정책에 저항하여 민족 독립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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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모 흉상
신성모(1891-1960)의 호는 소창이며, 부산 한국해양대학[현 한국해양대학교] 학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신성모는 1910년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 지방에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안희제(安熙濟) 등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일하였던 신성모는 이승만(李承晩)이 미국 정부에 위임 통치 청원서를 제출한 데 분개하여 이승만을 탄핵하는 입장에 섰다. 1923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비밀 연락처였던 백산상회 독립 자금 전달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석방 후 영국 런던항해대학에서 수학하고 1927년 1등 항해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이후 영국 상선 항해사 및 영국 런던과 인도를 왕래하는 정기 화객선의 선장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인도 상선 회사의 고문으로 봄베이에 체류하였다. 1948년 11월에 귀국한 신성모는 그 해 12월에 결성된 우익 청년 단체인 대한청년단의 초대 단장을 지냈다. 제2대 내무부 장관을 지냈고, 1949년 3월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국방부 장관 재임 시에 6·25 전쟁이 발발하였는데, 그해 4~11월 국무총리 서리를 지내기도 하였다. 1951년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국방부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신성모는 대통령 자문 기구인 해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평화선 선포, 해양경찰대 창설, 해무청 설치 등에 깊이 간여하였다. 이후 1956년 11월 28일부터 1960년 5월 29일까지 제8대 한국해양대학 학장으로 재임하였다. 그는 당시 한국해양대학이 해군사관학교와 통합되는 것을 막아 한국해양대학을 존속하게 하였다. 또한 해군 예비원령 제정 시행, 실습선 반도호 확보, 대학원 개설, 교과서 발간 등 후학 양성과 해양 한국 건설의 초석을 닦았다. 1960년 5월 29일에 사망하였다. 1990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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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 폭탄투척 의거지(구 부산경찰서 터)
박재혁(1895-1921)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에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도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이다.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무역상회의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1917년경부터 상해 등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에 종사하였으며, 중국에서 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교유를 가졌다. 1920년 8월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의 연락으로 상해로 가 의열단에 입단하고, 9월 상순 고서(古書) 짐 속에 폭탄을 숨겨 일본 나가사키[長崎]를 거쳐 13일 부산에 돌아왔다. 이튿날 부산경찰서로 찾아가 평소 안면이 있던 서장 하시모도[橋本秀平]를 만나 진기한 고서를 보여준다며 봇짐을 풀고 짐 속에 있던 폭탄을 꺼내어 서장을 죽이려는 의도를 밝힌 다음, 폭탄을 던졌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두 사람 모두 중상을 입었다. 중상을 입고 붙잡혀, 1921년 3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사형언도를 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과 폭탄으로 인한 상처로 고통을 겪다가 단식을 하던 중 옥사하였다. 1962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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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택 기념비
최천택(1897-1962)은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다. 1896년 6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에서 2대 독자로 태어났다. 부산공립상업학교 2학년 때인 1912년 당시 금서였던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절친한 학우들인 박재혁(朴載赫)·김병태(金鉼泰)·김흥규(金興奎)와 돌려 가며 읽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돌린 것이 발각되어 10여 일간 구속되었다. 윤독회를 통해 결속을 다진 학우들과 함께 북로 군정서의 국내 연락을 담당하고 유사시 항일 비밀 결사대로 전환한다는 목적 아래 1913년 비밀 결사인 구세단(救世團)을 조직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과거 구세단 동지를 통해서 정보를 입수하여 울산, 경주, 포항 등지에 3·1 운동 상황을 알렸다. 부산에서 다시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서울에서 지하 신문으로 발행되던 『독립신문』을 등사해 집집마다 뿌리면서 3·1 운동을 다시 선동하였다. 또 1920년 과거 구세단의 동지였던 의열단원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을 함께 모의하였으며, 1920년 12월 최수봉(崔壽鳳)의 밀양경찰서 폭파 사건과 1923년 강홍렬의 의열단 군자금 모집 사건에도 연루되어 일본 경찰의 혹독한 취조에 시달렸다. 이와 같이 최천택은 의열단원의 국내 활동에 상당한 연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1920년 부산청년회가 결성되었을 때 부산진구락부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1921년 8월 노동자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하고자 백산상회의 안희제(安熙濟)와 김철수(金喆壽)[해방 후 경남도지사] 등과 함께 주택 구제 부산 시민대회를 개최하였으며, 일본으로 건너가는 도항민(渡航民)을 위한 권익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24년에는 김국태와 시대일보사 부산지국을 설치해 언론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친일 종교 단체인 보천교(普天敎)에서 시대일보사를 인수하려 하자 전국 지국의 단결을 조성하여 이를 무산시켰다. 청년 운동 단체의 통일이 시도되면서 부산에서 부산청년연맹과 부산부청년연맹이 대립할 때, 최천택은 노건상 그룹의 부산청년연맹에서 집행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부산의 청년 단체들이 단일의 부산청년동맹으로 통일될 때 최천택은 30세가 넘은 나이 때문에 활동 공간을 신간회(新幹會)로 옮겼다. 1927년 7월 신간회 부산지회가 결성되었을 때 상무 간사로 활동하면서, 1928년 부산보통학교 일본인 교사의 여학생 능욕 사건에 대한 규탄 대회에 앞장섰다. 1929년 2월 신간회 부산지회장이 된 후, 11월 광주 학생 운동이 일어나자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과 접촉하며 시위를 확산시키려 하였다. 이후 신간회 해소론이 등장할 때까지 신간회 부산지회의 회보 발간, 신간회 경남연합회 발기 등을 추진하였다. 1941년에는 장건상(張建相) 해외 탈출 사건과 소설가 김동리(金東里)의 형인 김범부(金凡夫)의 해인사(海印寺)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 동안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해방 후에도 왕성하게 사회 활동을 하였다. 1946년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 경남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1948년 민주중보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1950년 5월 2대 제헌 의원 선거 때 부산시 동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혁신 성향의 장건상 선거 본부의 사무장을 맡아 당선시켰다. 6·25 전쟁이 일어나자 좌익계로 분류되어 해방 직후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남위원장이었던 김동산(金東山)과 함께 육군 특무대에서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6·25 전쟁 이후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정발(鄭撥) 장군의 정공단(鄭公壇)을 개수하고 봉제(奉祭)하면서 자유당 정권의 붕괴를 지켜보았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혁신동지총연맹의 최고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부산시 동구 을구에 출마하였으나 혁신계의 난립으로 낙선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군사 정권이 들어서자 서면 육군형무소에서 수개월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육군형무소에서의 후유증 때문인지 1961년 11월 부산광역시 동구 좌천동 자택에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하였다. 2003년에 건국 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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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근호 기념비
강근호(1888-1960)는 일제강점기, 청산리 대첩에 참전한 독립운동가이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 함흥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6년 ‘반일학생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촌〔龍井村〕에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그해 5월 신흥학교를 확대 개편해 설립한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 후에는 무장 독립운동 조직인 북로군정서의 사관양성소에서 제1학도대 제3구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金佐鎭, 1889~1930)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제1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부대원들과 함께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러시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1921년 6월 러시아 적군이 사할린의용대를 공격하는 자유시사변이 일어난 이후 고려혁명군에 소속되어 이르쿠츠크(Irkutsk)로 이동한 후 러시아 적군에 예속(隷屬)되었다. 그해 10월 이르쿠츠크에서 고려혁명군이 장교와 사병을 양성하고자 세운 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1922년에 반공 투쟁을 벌여 이르쿠츠크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돌아왔다. 만주에서는 룽징촌 영신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43년에는 허룽현 명월구에서 애국동지회 청년군사훈련 교관으로 근무하였다. 광복이 되자 귀국하여 수원의 대한민족청년단 중앙훈련소 교관으로 근무하였고, 1949년 2월에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해 소위로 임관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장교로 참전하였으며, 1956년 중령으로 전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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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 항일 촛불의거
동래고보 항일운동사의 첫 장을 기록한 장산 항일촛불의거는 부산의 학생항일운동의 근원지이다. 1926년 2월, 음력 섣달 그믐날 밤 동래고보 기숙사 이모학생이 사감 선생께 "선생님 1년 마지막밤이라 몹시 쓸쓸하니 빵이라도 좀 사주세요"라고 했다. 당직 사람인 마쓰다는 대뜸 "조선인은 걸인 근성이 있다"면서 노하여 크게 꾸짖었다. 이 말이 정인섭 사감 선생께 들어가자 분개하여 마쓰다 사감을 찾아가서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이거늘 너도 교육자냐?"하고 "학생 면에서 민족을 모욕하는 말을 함부로 한단 말인가?" 하고 막대기를 휘두르자 놀란 마쓰다 사감은 도망을 쳤다. 이 소문이 전교생에게 퍼지가 학생들은 격분하여 2월 어느 날 밤 22시를 기하여 장산 절골(폭포사 이전 고찰이 있어 절골이라 하였음) 계곡에 모여 촛불을 밝혀 들고 마쓰다 배척 운동을 결의한 후 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