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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순국열사비(포충사)
호남순국열사비가 위치한 포충사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충렬공 고경명(忠烈公 高敬命)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고경명의 아들 고종후(高從厚)·고인후(高因厚)와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을 함께 배향하였으며, 1603년 사액을 받았다. 호남순국열사비는 포충사 구사당 앞에 있는데, 이 비석은 높이 190cm, 폭 50cm로 앞면은 호남순국열사비 뒷면은 고광순, 황현 선생 등 한 말 의병장 2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석은 이혁 전 전남대 교수 등이 참여한 호남순열모의계가 1951년 세운 것이다. 조선 시대 말기~대한제국기의 항일 의병활동을 한 호남지역의 순국열사를 추모하기 위해서 세운 비이다. 호남순열모의계가 광복 이후 한말 의병 자료를 수집하던 중 6·25전쟁이 터지자 서둘러 비석을 세우고 사업을 중단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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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
1894년에 고광문·고광인·고광룡 3 형제가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공원이다. 고광문(高光文, 1860.∼1898.5.8.)은 고경명(高敬命) 의병장의 12대손으로, 고경명의 다섯째 아들인 해사공 고유후(高由厚)의 후손이었다. 고광문의 두 동생은 고광인(高光寅, 1862∼1936, 자는 응선(應善), 고광룡(高光龍, 1867∼1938, 자는 응오(應五)이었다. 20대 말, 30대 초중반 나이 세 형제가 모두 2차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고광문이 35세, 고광인이 33세, 고광룡이 28세 나이였다. 고광문은 동학군에 전 재산을 바치며 1백여 병력의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고 광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손화중·최경선의 부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894년 12월에 손화중은 부대를 해산하였으나 고광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열여섯살이 된 아들 고재언과 함께 곡성군 옥과면 용머리로 피신하여 은둔하다가 3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고광문의 후손은 이렇다. 고광문→고재언(高在彦, 1879∼1942)→고흥석(高興錫, 1910∼2000)→고영두(高永斗, 1930∼2006)→고병삼(高秉三, 1976년생, 생존)으로 이어졌다.고광문의 증손인 고영두가 선대의 유훈인 충정(忠貞)과 근면으로 집안을 일으켜 세웠다. 고영두는 동학농민혁명유족회 부회장과 광주·전남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회의 고문으로 활동하면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명예회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영두의 아내 정영숙과 아들 고병삼은 광주시 남구 이장동 216번지 일대에 있던 고영두의 땅 1500평을 국가에 기증하여, 광주 동학농민혁명 기념공원의 조성에 이바지하였다고 한다. 이 기념공원은 2017년에 완성되었다. 동학 3형제 가운데 고광문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로부터 심의를 거친 뒤에, 아래와 같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등록되었다. 아울러 고광문의 후손들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유족 등록이 이루어졌다. 전라도 광주지역과 그 주변 일대 동학농민혁명 참여자(45명) 명단은 아래와 같다. 강봉희, 강영희, 고광룡, 고광문, 고광인, 곽윤중, 김덕구, 김복환, 김용택, 김종태, 노병철, 문달현, 박병옥, 박용운, 손상옥, 오권선, 유광화, 윤주은, 윤태한, 이겸호, 이춘영, 이몽근, 이병기, 이성호, 이수갑, 이응범, 이의호, 이인숙, 이중전, 장경삼, 장공삼, 장옥삼, 전유창, 정일채, 정평서, 조승현, 조영운, 채봉학, 최성칠, 최윤주, 최장현, 최평집, 한달문, 허원, 홍자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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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촌 유래비
광복촌은 1976년 정부가 주월동 소재의 과수원 부지를 매입하여 무주택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들을 위해 조성한 마을이다. 당초에 원호주택(광복촌)이란 이름으로 기공식을 가졌으며 이태리식 주택(대지 약 165.2㎡, 건물 약 79.3㎡)으로 하나의 설계도로 열두 채를 지어 집 모양들이 비슷했다. 당시 집을 짓는 비용 200만원 중 정부에서 50만원을 지원하고 100만원은 융자, 50만원은 자부담이었다. 당시로써는 고급주택으로 분류돼 형편이 어려운 일부 독립유공자들은 건축비용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팔기도 했다. 광복촌에 살았던 독립유공자는 광복군과 임시정부의 연락 활동을 했던 최봉진 선생을 비롯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윤창하‧송동식·조길룡 선생 등이었다. 또 한말 의병장인 심남일 선생과 일제항거 비밀결사 ‘다혁당’(茶革黨)을 조직한 이홍빈 선생, 3‧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김동훈 선생 후손도 광복촌에서 함께 생활했다. 현재 광복촌 자리에는 윤창하 선생의 주택이 유일하게 보존돼있다. 2021년 광주광역시 남구는 광복마을과 독립유공자에 대한 사료 조사와 연구 용역을 거쳐 그 유래를 알리는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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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기 공적비
윤영기 (1880-미상)은 전라남도 창평에서 모병하여 의진을 편성한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자는 경안(京安)이고 호는 정재(貞齋), 이칭으로는 영기(泳琪), 영기(泳祺)가 있다. 전라남도 광산 출신. 윤석준(尹錫峻)의 아들이다. 1906년 7월에 고광순(高光洵)을 찾아가 전라남도 창평에서 거의하여 호군으로 추천되었다. 병력을 강화하고자 광주에 나와 해산군인 40여명을 모으고, 전라남도의 순천·석곡 등지에서 병력 및 무기를 증강하며 왜적과 싸우면서 광양에 이르렀다. 1907년 구례로 행군하기에 앞서 고광순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화개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산포수(山砲手) 수백명을 거느리고 함양의 소정(小井)·백모(白毛) 두 산골짜기에 이르러 전력을 강화하며, 60명이 넘는 강화의 해산군인과 합세하였다. 1908년 화개로 진군하다가 의신동에서 접전하여 30여명의 적을 섬멸하였다. 다시 운봉과 함양·엄천에서 적과 격전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부득이 물러서게 되고 10여년을 숨어 지냈다. 그러다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광주지역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였다. 이듬해에는 서울의 애국지사들과 연락하면서, 광주 등지에서 상해임시정부의 군자금모금활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1921년에 7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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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학관
흥학관(興學館)은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광주 지역 청년의 사랑방이자 지역민의 문화, 체육, 교육, 집회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광주광역시는 2019년 12월 17일 3.1운동 100주년과 광주학생독립운동 90주년을 맞아 광주 지역 내의 독립운동 사적지 중 대표적인 곳 중 하나인 '흥학관 터'에 사적지 표석을 설치하였다. 1921년 광주의 부호 최명구(崔命龜)가 희사한 돈으로 최명구의 동생인 최종윤이 지역 청년들의 문화, 체육 활동 진흥을 위해 세운 건물이다. 최종윤은 1920년 광주청년회 설립을 주도하였고, 1921년부터는 『동아일보』 광주지국의 총무와 기자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당시의 흥학관은 실내 체육과 강연 등 문화 행사가 가능한 흥학관 건물과 건물 앞의 너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흥학관 내부는 유도나 권투 교습의 체육 활동을 비롯 광주청년회, 신간회 광주지회, 조노동공제회 광주지회, 광주청년학원 등의 사무실과 집회 장소 등으로 활용되었다. 그 외에도 광주여자청년회 주도의 여자 야학 및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가 진행하는 야학도 흥학관에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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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주역들의 터 동판(광주 YMCA)
광주YMCA가 창립되기 전에는 학생YMCA가 있었으며 1911년 광주 숭일학교에 조직되었다. 숭일학교는 1908년 유진 벨(Rev. Eugene Bell) 선교사가 광주남학교로 개교한 학교였다. 숭일학교YMCA가 활동하는 것을 듣고 서울에서 이상재, 김필수, 신흥우가 광주YMCA 설립을 지원하면서 광주YMCA가 창립되었다. 광주 YMCA는 1920년 7월 29일 전라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현재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에 있는 오웬 기념각에서 창립되었다. 당시 광주의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지도자였던 최흥종 목사가 3대 회장을, 최영균이 총무가 되어 30여 명의 기독교 청년들이 함께하였다. 광주제중병원 직원과 광주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의 직원들이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초대 회장에는 광주숭일학교 교사였던 20대 청년 최병준이, 총무에는 광주 3.1운동의 주역이었던 독립운동가 김철이 선임되었다. 광주 YMCA의 초창기 주요 사업은 지덕체 운동을 목표로 했으며, 하기순회전도대회를 실시하고, 광주유치원을 개원하고, 서북여자야학을 개학하고, 광주숭일학교에서 노동야학을 개시했으며, 농촌사업을 시작하였다. 당시에 회관이 없어 북문밖 교회나 오웬기념각, 흥학관, 숭일학교공업부과 체육관, 유치원, 부동교 건너편 녹성구락부 등을 활용하였다. 1924년 광주YMCA는 최흥종 목사가 3대 회장이 되고, 최영균이 총무가 되어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인준을 받았다. 광주YMCA는 최흥종 목사가 시무하던 북문밖교회의 유치원에 간판을 달았다. 1933년 고든 어비슨(Gordon Avison) 선교사의 집(현 백운동)에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광주YMCA농업 실습학교를 세웠다. 광주YMCA는 1938년에 조선기독교청년회가 일본기독교청년회 산하에 예속되면서 모든 활동이 중단되었으며, 1944년 12월에 자진 폐회하였다. 광주YMCA는 창립 이후부터 일제의 탄압으로 자진 폐회할 때까지 광주의 정신과 문화 경제, 사회의 발전을 위해 선도적 역할을 했으며, 회원 대부분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으며 그 후로도 계속 민족 운동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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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권 문방구점, 장재성 빵집
독립운동가 김기권이 운영하던 문방구 점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던 장재성의 빵집이 있던 옛 터이다. 김기권(金基權)은 1926년 전라남도 광주 지역의 항일 학생운동 조직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인물로 1928년 광주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김기권은 성진회가 해산된 이후 전라남도 광주 지역 내에 독립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1929년 학생소비조합 형태의 문방구점을 지금의 금남로공원 자리에서 운영하였다. 한편, 김기권과 함께 활동하던 장재성(張載性)도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인근에 빵집을 열었다. 김기권 문방구점과 장재성 빵집은 성진회 해산 이후 광주학생운동의 핵심 기구가 된 독서회중앙본부(讀書會中央本部)의 연락 및 비밀 모임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운영에서 나오는 소득은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활용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김기권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1년형을 언도받고 복역하게 되었고 문방구점도 폐업하게 된다. 1969년 김기권이 운영하던 문방구점 자리에는 한국은행 광주지점 건물이 세워졌다. 이후 2003년 한국은행 광주지점이 상무지구로 이전하게 되자, 광주광역시가 부지를 매입하여 금남로공원을 조성하여 2006년 시민들에게 개방하였다. 현재 금남로공원 출구 방향에 있으며 금남로공원 조성 이후 이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별다른 시설이 없었으나, 2019년 광주광역시에서 김기권 문방구점과 장재성 빵집의 위치를 알리는 표지석을 설치하여 그 뜻과 의미를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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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광주지방재판소 표지석
'옛 광주지방재판소 터'는 광주광역시에서 2019년 12월 17일, 3.1운동 100주년과 광주학생운동 90주년을 맞아 설치한 표석이다. 1907년 광주지방재판소라는 이름으로 설치되었으며 1912년 광주지방법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한말 의병에 대한 재판부터 3.1운동과 광주학생운동 등 일제에 저항하는 인사들에 대한 1심 재판이 진행되던 곳이다. 대한제국은 1907년 통감부(統監府)의 강요에 의해 근대적 재판제도의 운영을 위한 재판소 설치와 관련된 법률을 개정하였는데 이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관할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광주지방재판소이다. 1907년 12월 23일 설치되어 1908년부터 운영하였다. 1912년 일제는 재판소를 법원으로 개칭하였는데, 이에 따라 1912년 3월 18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광주지방법원으로 개칭하였다. 당시 광주지방재판소는 단층 목조 건물이었으며 20년 넘게 여러 차례 증축을 거쳐 사용되었는데, 1929년 본관을 2층 콘크리트 슬라브 구조의 건물로 개축하였다. 1952년 광주고등법원이 설치되었고, 1969년 전라남도 광주시 지산동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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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성, 장매성 집 터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주역이었던 장재성·장매성 남매의 집 터이다. 장재성은 1908년, 장매성은 1911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회계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장원용과 어머니 최예언 사이에서 태어나 두 사람은 안정되고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장재성은 운동도 잘해서 학교 야구팀의 주전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6년 11월 당시 광주고보 5학년이었던 장재성은 광주고보생·농고생과 함께 ‘성진회(醒進會)’라는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총무는 왕재일, 회계는 장재성, 서기는 박인생이 맡았다. 하지만 성진회는 활동 5개월만인 1927년 3월 자진 해산했다. 1927년 초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던 장재성은 1929년 6월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돌아온 장재성은 ‘조직적 단결을 통한 사회주의의 연구와 실행’을 위해 독서회중앙부를 결성했다. 광주 시내에는 ‘장재성 빵집’, ‘김기권의 문방구’가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각 학교별로도 독서회중앙부와 유사한 독서회를 결성해 중앙부와 연락이 통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전남사범학교에서 독서회가 결성되었다. 광주여고보에서는 장재성의 누이동생 장매성을 중심으로 한 독서회가 결성되었다. 1927년과 1928년에 걸쳐 전국 곳곳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날 때 전라남도 광주에서도 치열한 맹휴가 일어났다.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그리고 여학교인 광주여고보에서 맹휴가 잇달았다. 1928년 11월 광주여고보에서는 독서회가 조직되었는데, 소녀회라고도 불렸다. 장재성과 장매성은 독서회중앙부의 조직을 통해 학생을 동원하고 격문을 배포하였으며 광주학생운동을 지도하는 책임을 맡았다. 또한 서울에서 내려온 신간회를 비롯한 사회운동 단체에게 연대와 지원을 요청했다. 1928년 11월 12일 시위가 준비되었다. 장매성은 흥학관의 등사판으로 수천 장의 격문을 인쇄하는 일을 맡았다. 이날 장재성을 비롯한 투쟁본부 간부 대부분이 체포되었고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교문에서 제지당해 11월 12일 시위에는 동참하지 못했으나 이틀 후인 11월 14일에 본격적인 시위에 참여했다. 1930년 1월에는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석방되기 전까지 시험에 응하지 말자고 한 백지동맹에 나선 광주여고보 학생 12명이 경찰에 검거되었다. 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결과 장재성은 1931년 6월에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장매성은 1931년 10월에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장매성은 1년 2개월 14일의 옥고를 치르고 1932년 1월 22일에 가출옥했고, 장재성은 1934년 4월 만기 출옥했다. 장재성은 출옥 후 일본으로 가서 니혼대학(日本大學) 상경과를 졸업, 재동경조선인유학생연합회 결성에 참가하여 활동했다. 귀국 후 광주학생독립운동 참가자들과 함께 비밀리에 조직을 모색하던 중 1938년 2월 재차 검거되었다. 한편 장매성은 1938년에 광주고보생으로서 독서회 사건으로 검거되었던 정석규와 결혼했다. 1945년, 광복 직후 장재성은 건국준비위원회 광주지부 위원, 전남지부 조직부장을 역임하고 광주청년동맹 의장이 되었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에 전남 대표로 참석했으며, 같은 해 3월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 전남지부 결성준비회의 총무부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1948년 검거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광주형무소에서 수감생활 중 6·25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처형당해 43세의 삶을 마감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소녀회 관계자인 장매성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 반면 장재성은 광복 이후의 활동과 행적 때문에 국가공훈자로 선정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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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광주역 표지석(광주학생운동 시위지)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본 표지석이 놓인 광주역 터에서 일어났다. 당시 광주는 통학하는 지방 학생들이 오고 가는 장소였으므로 한일 학생들 간의 충돌이 여러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1929년 11월 3일 메이지절, 개천절(음력), 그리고 광주 학생들의 독서회원에게 전신이 되는 성진회 창립 3주년을 기하여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적극적인 항일투쟁에 들어가기로 작정한 참이었다. 그런데 이날 오전 11시 경 일본인 중학생들과 광주고등보통학교의 학생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최상현이 단도에 찔려 코와 안면에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학생들이 전체적인 투쟁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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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광주감옥 터
본 표지석이 놓인 곳은 한말의병,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어 고초를 겪었던 곳이다. 1908년 광주감옥이 설치된 이래로 1923년에는 광주형무소, 1961년에는 광주교도소로 이름이 바뀌어 1971년까지 유지되었다. 현재 광주광역시에 의해 동구 동명동 200-12에 독립을 향한 치열한 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이 고초를 겪었던 곳을 표시하는 표지석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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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시위지, 기삼연 의병장 순국지
본 사적이 놓인 곳은 광주 3.1 운동 만세 시위지이자 기삼연 의병장의 순국지이다. 광주 3.1운동 만세 시위란 1919년 3월 10일에 양림동의 기독교인,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 농업학교의 학생들, 그리고 일곡을 비롯하여 각지에서 온 시민 등 1천여 명이 부동교 밑 광주천변으로 모여 '대한 독립 만세'를 불렀던 사건이다.한편, 의병장 기삼연(1851 - 1908)은 1907년에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여 한말 호남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던 인물로, 1908년 2월 2일 순창에서 체포되어 광주로 호송된 후 재판없이 총살되었다. 이곳 광주천변 모래사장이 기삼연이 총살된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