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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만 의병부대 주둔지
기우만(1846-1916)은 개항기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의분하여 기삼연(奇參衍) 등과 합세하여 호남창의 총수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이며 전라남도 장성 출신이다. 참봉 벼슬을 하였으므로 기참봉으로 불렸다. 호남에서 이름에 높았던 참판 기정진(奇正鎭)의 손자로서 학업을 이어받아 일찍이 문유(文儒)로 추앙받았다. 1894년 동학운동 당시에 유생들이 동학에 가담한 사실을 유생의 수치로 여겼으며, 1895년 나주에 세워진 동학당 토평비의 비문을 짓는 등 동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머리를 깎는 욕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더한 일이라며, 머리를 깎고 사느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통분의 상소를 하였다. 1896년 3월 광주향교(光州鄕校)에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규칙을 정하고 전략을 의논하는 등 준비에 철저를 기하였고 장성의 기삼연이 장정과 군사 300명을 이끌고 와 합세하게 되자 그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 이로써 사실상의 호남창의 총수가 되었다. 기우만은 각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모든 의진을 일제히 광주로 모이도록 하고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았다. 그러나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해산시키라는 명으로 파견된 선유사주 신기선(申箕善)의 설득으로 해산하고 말았다. 5월에 장성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으나 10월 16일 왜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르고 1897년(고종 34) 4월에 석방되었다. 1908년 2월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동지 · 문인들과 재거사를 꾀하던 중에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통곡한 후 해산하고 은둔하였다. 유저로는 『송사집(松沙集)』이 있으며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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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향 기념동산
최수향(이명 최현숙(1903~1984)은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서 태어나 광주 수피아여학교[지금의 광주수피아여자고등학교] 학생이었다. 1919년 3월 10일 부동교 아래 작은 장터에서 일어난 광주만세에서 직접 제작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나누어주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으며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독립만세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 중 최연소자(당시 16세)로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야학을 지도하며 청소년에 대한 계몽과 독립정신의 고취에 이바지하였으며, 1928년부터 1940년 8월까지 『동아일보』 광주지국 총무 겸 기자로 임명되어 민족정신 계몽과 민족지 보급을 위해 활동하였다. 최수향은 1984년 7월 25일 사망하였다. 부군은 방원 김용환(方圓 金容煥, 1900-1969) 이다. 1984년 3남인 김양균이 조선총독부 판사에게 재판을 받았던 1919년 재판 판결문을 발견한 뒤 1986년 애국지사 표창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고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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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환 묘
최수향(이명 최현숙)의 부군이며 제 5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방원 김용환(1900-1969)의 묘이다. 방원 김용환은 광주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던 흥학관(동구 광산동)의 중심 인물이면서 동아일보 광주 지국의 기자였다. 현진 최현숙 여사와는 흑학관에서 만나 3년의 열애 끝에 1924년 8월 결혼하여 슬하에 11남매를 두었다. 김용환은 최현숙의 뛰어난 문장력을 보고 기자가 되기를 권하여 1928년부터는 부부가 함께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동하였다. 방원 김용환은 한국민주당 전남도당을 창당하고 이후 광주에 상주하면서 국민당 전남도당, 민주국민당 전남도당, 국민회 전라남도본부, 민주당 전남도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1960년 7·29 총선 때 제 5대 광주 을구 제5대 민의원 선거(현 국. 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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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일학교
숭일학교(崇一學敎)는 수피아여학교와 함께 광주 최초의 중등학교로 꼽힌다. 숭일학교는 1907년 3월 5일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인 유진 벨(Eugene Bell)이 설립한교육기관으로 설립 초기에는 비인가 학교였으나, 1908년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4년제 소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고, 초대 교장으로 프레스턴(John F. Preston)[변요한(邊約翰)]이 취임하였다. 1910년에는 전라남도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66번지] 일대에 광주 지역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3층의 교사(校舍)를 준공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고등과를 4년제 중학교로 개편하여 중등학교 교육 과정을 마련하였다. 숭일학교의 교사진과 학생들은 민족주의 성향이 매우 강하였으며, 중등과 설립 초기부터 일제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고 있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일본 도쿄[東京]의 유학생들 주도로 2.8독립선언이 일어났고, 유학생 정광호를 통해 「2.8독립선언서」가 광주에 전달되었으며, 광주에서의 독자적 만세운동이 기획되던 중 서울에서 진행된 3.1운동 관련 정보들이 알려졌다. 당시 광주 3.1운동을 준비하던 그룹 내에는 개신교인들의 비율이 높았고, 김강·최병준 등의 숭일학교 교사들도 중점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작은장터에서 시작된 광주 3.1운동 당시 숭일학교 학생들은 수피아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광주천을 따라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면서 시민과 학생들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광주경찰서 앞까지 진출한 뒤 해산될 때까지 선봉에 섰다. 이튿날인 3월 11일에도 숭일학교 학생들은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 행진을 진행했다. 광주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에 의해 숭일학교 학생과 교사 28명이 체포되었고, 학생 송광춘은 대구감옥에서 옥사하는 등 숭일학교의 피해는 극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숭일학교 내에서의 민족적 분위기는 매우 고조되어 1929년에 발생한 광주학생운동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고, 일제는 이를 빌미로 1931년 7월 31일 숭일학교를 폐쇄하게 된다. 1931년 숭일학교 폐쇄 이후, 남아 있던 숭일소학교도 1937년 신사 참배 거부로 폐교되었다. 숭일학교는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1일 복교되었고, 1946년 5월 31일 숭일중학교로 정식 인가되었다. 1951년 학제 변경에 따라 숭일중학교와 숭일고등학교로 분리되었다. 1971년 광주광역시 북구 운암동으로 이전하였다가, 1993년 다시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으로 이전하였다. 기존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지역은 매각되어 교사 등은 철거되었고, 여러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현재는 주거지와 상업지구로 이용되고 있다. 광주광역시는 2019년 12월 17일 3.1운동 100주년과 광주학생운동 90주년을 맞아 전라남도 광주 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중 대표적인 곳 중 하나인 '옛 숭일학교 만세 모의 장소'에 사적지 표석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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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기념관
최흥종(1880-1966)은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 신간회 광주지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사회운동가·목사이다. 본관은 탐진(耽津), 호는 오방(五放), 본명은 최영종(崔泳琮)이다. 1907년 세례를 받고 ‘흥종(興宗)’으로 개명하였다. 최흥종은 1904~1905년 사이에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김윤수(金允洙)와 함께 양림리교회(楊林里敎會)를 중심으로 광주지역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1905년 순검(巡檢)이 되었으며,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서병기(徐丙冀)와 함께 대동의상회(大同義償會)를 조직하여 광주지역 국채보상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한 순검으로 있으면서 일경에 체포된 광주·전남지역 의병들을 몰래 풀어주거나 사전에 정보를 알려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1919년 3월 2월 김필수(金弼秀)·김철(金鐵)과 함께 서울에서 김범수(金範洙)를 만나 광주지역 만세시위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어 3월 5일 남대문 역전에서 인력거 위에 올라가 『신조선신문(新朝鮮新聞)』을 나눠주며 연설하였다. 이어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혐의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1920년 6월 출옥하여 8월에 창립된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었다. 1921년 9월 광주청년회(光州靑年會) 의사원에 선임되었으며, 이 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후 광주 북문밖교회(지금의 광주 중앙교회) 초대목사로 부임하였다. 시베리아선교를 시도하였다가 좌절된 후 1923년 광주소작인연합회(光州小作人聯合會)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4년 광주기독교청년회(YMCA) 회장에 취임하였다. 아울러 광산회 총무(1923), 서선수해구제회 집행위원장(1923), 광주 금정교회 목사(1924~1925), 광주수해구제회 위원(1925), 광주여고보창립 기성위원(1926), 광주협회 위원(1926) 등을 역임하였다. 1927년 1월 다시 시베리아 선교에 나섰으나 소련 당국의 탄압을 받아 일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4월 귀국하였다. 이어 10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장에 선출되어 민족운동을 재개하였고, 재만동포옹호동맹 위원(1927), 광주교육보급회 이사(1928), 광주보통학교유지회 위원(1928), 광주철도기성회 상임위원(1928) 등을 역임하였다. 1929년 7월 제주도 모슬포교회 목사로 부임하였으며, 1931년 7월 사직하고 이후 조선나병환자구제회(朝鮮癩病患者救濟會)를 창립하면서 구라사업(救癩事業)과 빈민구제사업에 헌신하였다. 1937년 1월 모든 외부활동을 중단하고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 칩거하며 병자·빈민들과 함께 활동하다 해방을 맞았고, 8월 17일 전남건국준비위원회(全南建國準備委員會) 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 호남신문사 초대사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임하였다. 1964년 12월 「유언장」을 작성하고, 1966년 2월 단식과 절필을 선언한 후 5월 14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최흥종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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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연준 순교시비
손연준(1902-1950)은 해방 이후 순천반란사건과 관련된 목사로 호는 산돌이며 경상남도 함안에서 출생하였다.아버지 손종일(1871-1945)은 독실한 기독교(개신교) 장로였으며 경남 함안군(咸安郡)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러 2006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손양원은 1915년 칠원보통학교 재학 중 궁성요배를 거절하여 퇴학을 당했으나, 선교사 맥레이(Macrae, L.)의 항의로 복교되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아버지가 마산형무소에 수감되자, 학업을 중단한 후, 1921년 일본으로 건너가 스가모 중학교(巢鴨中學校)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경남성경학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부산 나병원교회, 울산 방어진교회·남창교회 및 양산의 원동교회 등에서 전도사로 활동하였고, 동양선교회에서 일하던 중 초량교회의 목사 주기철(朱基徹)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손양원은 1938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여수의 나병환자 요양원인 애양원(愛養院)의 교회에서 봉사하였으며 신사참배의 강요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1940년 체포되어, 광복이 되어 출옥하였다. 그 뒤 애양원교회에서 다시 일하다가 1946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반란사건 당시 두 아들이 공산분자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계엄군에 의하여 살해자가 체포되어 처형되려는 순간에 구명운동을 전개하여 안재선이라는 살해범을 살려내고 양아들로 삼았으나 곧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공산군에 체포되어 미평에서 그들의 총탄을 맞고 순교하였다수정하기.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일대기가 출판되어 영어와 독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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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림동 역사인물거리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일대에 조성된 역사인물거리이다. 양림동 사직도서관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광주의 근대 역사적 인물에 대해 안내판들이 마련되어있다. 한쪽 벽면에는 먼저 서양인 선교사들의 기록을 볼 수 있다. 광주기독병원을 운영하며 지역내 고아원 사역을 시작했던 우월순 선교사(Robert Wilson), 목포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한 오기원 선교사(Clement Owen), 1919년 한국 YMCA를 조직하여 사회활동을 했던 고든 어비슨 선교사(Gordon Avise)를 볼 수 있다. 맞은편 벽면에는 부은 정율성 선생, 이강하 예술가, 조아라 선생, 오방 최흥종 선생, 배동신, 김현승 시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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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3.1 운동 기념 동상(광주 수피아 여학교)
수피아 여학교 3·1운동 만세시위 준비지광주 수피아 여학교(현 광주광역시 남구 양림동 256 수피아여자중·고등학교)는 1919년 3월 10일 광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 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이 만세 시위를 준비한 장소이다. 현재 수피아여자고등학교는 국가보훈처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있다. 특히 교내에는 1911년에 건축되어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는 수피아홀(등록문화재 제158호)이 있다. 이 건물의 1층은 건축 초기부터 학생 기숙사로 사용하였다. 따라서 홍순남을 비롯한 수피아 여학교 학생들이 밤새도록 기숙사 지하실에서 태극기를 제작한 곳도 수피아홀의 지하 1층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수피아여자고등학교의 수피아 대강당 앞에는 1995년 수피아여중·고 총동창회가 건립한 <광주3•1만세운동> 동상이 있다. 무궁화가 새겨진 대현 화강암 기단 위에는 당시 교복 차림의 여학생 네 명이 태극기를 치켜들고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는 형상을 조각한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동상 앞부분 하단에는 ‘광주3•1만세운동기념동상’이라는 제목의 표석이 놓여 있고, 동상 설립 경위와 당시 옥고를 치른 2명의 교사와 21명의 학생 명단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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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아라 기념비
조아라는 학생독립운동, 여성 및 아동의 교육과 인권을 위해 평생 헌신한 교육가이자 사회운동가이다. 조아라는 1912년에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장로인 아버지가 설립한 사설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1927년 광주 수피아여학교에 입학하고 당시 교사이자 YWCA 창립자인 김필례를 만난다.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1930년경에 수피아여학교 동기 10여 명과 ‘백청단’이란 비밀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그는 단원들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문맹퇴치와 아동교육에 힘쓴다. 1931년 수피아여학교를 졸업한 후 서서평(徐徐平)이 운영하던 이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한다. 그러나 1933년 1월에 ‘백청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개월 후 석방되지만, 학교에서는 강제해직을 당한다. 1935년부터 총독부가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신사 참배를 강요하자 1937년 수피아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의미로 자진 폐교를 한다. 수피아여학교가 폐교하자 일제는 동창회장이라는 이유로 조아라를 검거해 1개월간 수감한다. 출소 후 1935년에 혼인한 남편 이태규가 있는 평양에 가 함께 평양신학교를 다닌다. 1938년 평양 교단이 일제의 신사참배를 받아들이자 부부는 광주로 돌아온다. 해방 후 조아라는 스승 김필례와 함께 신사참배로 폐교된 수피아여학교와 해체된 광주 YWCA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한다. YWCA를 재건한 후 조아라는 광주 YWCA에서 여성 인권과 여성 인재 양성에 애쓴다. 1952년 7월, 광주 YWCA에 ‘성빈여사’를 만들어 전쟁 여자 고아를 수용한다. 야간 중학교 ‘호남여숙’을 설립해 성빈여사의 학생들과 저소득층 소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한다. 1962년에는 ‘별빛학원’을 설립하고 일하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아 권익을 지킬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성매매여성의 재활센터인 ‘계명여사’을 열고 10대 성매매 여성의 자립을 위한 직업훈련을 시킨다. 1973년 광주 YMCA 회장으로 취임한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때 수습대책위원으로 활동하다 내란음모죄로 3년 형을 받고 6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평생을 여성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던 조아라는 2003년 7월, 92살 일기로 숨을 거둔다. 장례는 광주시 사회장으로 치러지고 국립 5·18민주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조아라에게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하였고, 2018년에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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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독립 광주신문 제작지
조선독립광주신문(朝鮮獨立光州新聞)은 광주에서 있었던 3.10만세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민중 계몽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황상호(黃尙鎬)가 서울의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본따서 발행한 신문이다. 제4호까지 발행되었고, 주동자들은 징역을 언도받았다. 황상호 등 제중원 직원들은 광주 3.1운동을 준비하면서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과 「2.8독립선언서」 등을 미리 접하고 있었고, 일제의 탄압을 극복하고 독립운동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광주와 전라남도에도 3.1운동의 필요성과 움직임을 알릴 매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선독립 광주신문 1호는 9절지 크기의 종이 2장으로 만들어졌다. 제4호까지 간행되었는데 제1호의 경우 1면에는 서울에서 발행된 『조선독립신문』의 내용이 간추려 들어갔고, 2면에는 1919년 3월 10일 일어난 3.10만세운동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되었다. 이밖에도 고종 독살설, 미국 월슨(Woodrow Wilson)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등이 포함되었다.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이후 제중원의 회계 직원이던 황상호와 간호사 홍덕주(洪德周), 약제사 장호조(張鎬祚) 등에 의해 제1호 300부가 제작되었다. 1호는 3월 13일 광주 큰 장[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 광주교 부근], 광주시내, 제중원 등에서 배포되었다. 2호는 1919년 3월 18일 광주 큰 시장에서 지역민에게 배포되었다. 이후 황상호 등은 일제에 검거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장호조, 홍덕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조선독립 광주신문은 광주지역에서 발행된 최초의 신문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또한 현재 원본은 1호만 보전되고 있는데, 이 원본이 1983년 전라남도 목포시 목포정명여자고등학교의 선교사 사택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조선독립광주신문』이 광주와 전라남도의 만세 운동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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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길(아리랑고개 벽화)
광주 남구 양림동 3·1만세운동길에 위치한 나무 벽화이다. 양림의원 골목을 시작으로 양림교회를 지나 정율성 거리 앞까지 이어져 있다. 1970년에는 이곳을 아리랑 고개라 불렀으나 현재는 신도로명 주소 정책에 따라 3·1만세운동길로 명명하여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아리랑 고개라고 불린 까닭은 수피아 여학교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이 이 곳 언덕길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아리랑을 불러, 그날 이후 이곳이 '아리랑고개'로 불렸다고 한다. 벽화에는 광주의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김마리아 여사, 김함라 여사, 김철, 남궁혁, 비밀독서모임, 박애순 여사, 윤형숙 여사에 대한 일화가 묘사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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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언덕(광주 3.1운동 발상지)
광주양림교회 옆 양림 휴먼시아 2단지 어린이 놀이터 조경 부지에 만든 테마공간에 조성된 3·1만세운동 발상지이다. 이곳은 1919 년 광주지역의 3·1운동을 최초 모의했던 남궁혁 선생의 집터가 있던 곳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있어 '기억의 언덕'이라는 이름의 테마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1919년 독립선언에 참여한 김마리아가 독립선언서를 숨겨 광주 언니네로 가져와 독립선언에 관해 알렸고 광주의 3·1만세운동은 최흥종이 서울에서 체포되자 김철을 중심으로 교인들과 비밀 독서모임 회원들이 모여 거사를 계획하고 역할을 분담하여 만세 물결을 시작하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