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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비(월곡역사공원)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 위해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서한을 작성한 사건을 기념하는 비이다.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자 유림측에서도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는 강화회의에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장문의 서한을 작성하였다. 이 사건은 전에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호서지방의 유종(儒宗)인 전 승지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등에 의해 이뤄졌다. 그들이 작성한 서한은 현존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호서지방 유림들의 활동이 전개되고 있을 때,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 뒤 영남유림은 이런 사실을 알고 영남본(嶺南本)을 전용학(田溶學)에게 주며 홍성으로 가서 호서본(湖西本)과 비교, 검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교정본이 작성되기 전에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시급히 상해(上海)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유림들은 영남본이나 호서본의 내용이 서로 뜻이 같으나, 영남본이 호서본보다 포괄적이면서도 뜻이 명확하다는 여론에 따라 김창숙에게 영남본을 주어 출발시켰다. 그리고 장서 말미에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으며, 대표파견 경비는 황일성(黃佾性)이 조달하였다. 그러나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런데 같은 해 4월 12일경상북도 성주의 만세시위운동에 관련되어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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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하교 구 묘
우하교(1872~1941)는 1872년 5월 1일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1913년 음력 정월 대보름날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결성된 재건 달성 친목회[조선 국권 회복단 중앙 총회]에 참여하였다. 달성 친목회는 민족 독립을 위해 결성된 비밀 결사였고, 혁신 유림, 지식인, 경제인, 은행원 등 다양한 성향의 인물들이 참여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또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는 등 민족 독립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전개된 달성 친목회의 만세 운동 확산 노력과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적극 참여하였다. 유림계의 파리 강화 회의 독립 청원서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장석영(張錫英)을 찾아 파리 강화 회의에 보낼 조선 독립 청원서 초안을 써달라고 부탁하였다. 독립 청원서의 초안을 첨삭한 뒤 김응섭(金應燮)이 영문으로 번역하였다. 그 뒤 조선 총독부 총독 및 파리 평화 회의에 제출할 청원서를 칠곡의 이수목(李壽穆)을 통해 전달받았다. 번역된 독립 청원서는 김응섭(金應燮)과 남형우(南亨祐)를 통해 중국 상하이에서 배부되었다. 그러나 독립 청원서 활동이 일제 당국에 발각되어 1919년 8월 윤상태(尹相泰)가 피체되자, 예심에서 증인으로 불려나가 독립 청원서 관련 사실을 부인하였다. 1919년 10월 대구 지방 법원에서 위증죄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 복역하였다. 1983년 대통령 표창, 1990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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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욱 송덕비
김병욱(1888 - 1925)은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광정단(大韓獨立光正團)에 소속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독립광정단은 중국 장백현(長白縣)에서 성립된 통합 독립군단으로 1922년 4월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대진단(大震團),태극단(太極團),광복단(光復團)의 일부가 통합하여 조직하였다. 임강현(臨江縣),무송현(撫松縣) 등 압록강 주변 지역을 근거지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는 것과 함께 이주한인의 산업발전을 도모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광정단은 1924년 초부터 조직의 체제를 위원제로 바꾸고 이주한인을 대상으로 한 자치활동에 치중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다는 방침 하에 통의부(統義府),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성단(義成團),고본계(固本契) 등 7개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운동을 전개해 1924년 11월 군정부(軍政府)인 정의부(正義府)에 합류하였다. 김병욱은 1921년 12월 봉천성(奉天省) 장백현(長白縣)에서 광복단(光復團) 장백지단장(長白支團長)을 역임하고, 동단(同團) 대표로 1922년 1월 신한청년회(新韓靑年會) 조직 논의에 참여하였다. 1924년 대한독립광정단 장백지단(長白支團) 지방대장(地方隊長)으로 활동하였으며, 1925년 동단(同團) 총무(總務)로 활동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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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 묘
이준석(1896 - 1955)은 경상북도 영일(迎日) 사람이다. 1919년 3월 22일의 청하면 덕성리(淸河面德城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이곳은 윤영복(尹永福)·오용간(吳用干)·윤영만(尹永滿) 등에 의해 독립만세운동이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덕성리 장날인 3월 22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대형 태극기 1개, 소형 태극기 20여개를 만들고 시위군중을 동원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윤영복으로부터 이같은 거사 계획을 전해들은 그는, 3월 22일 오후 1시경, 윤영복·오용간·윤도치(尹道致)·안천종(安千鍾)·안상종(安尙鍾)·이준업(李俊業)·이영섭(李泳燮)·안덕환(安德煥)·김만수(金萬守)·김유곤(金有坤)·정백용(鄭伯用) 등과 함께 장터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친 후, 덕성리 일대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8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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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범 구 묘
김재범(1900 - 1931)은 경북 의성(義城) 사람이다. 그는 1919년 당시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3학년에 재학중 이었다. 그는 서울·평양(平壤) 등지의 만세시위 상황을 전해들은 계성학교 교사 백남채(白南採)·김영서(金永瑞) 등의 지도를 받아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신명여학교(信明女學校)·성경학교(聖經學校)등과 제휴하여 연합만세시위를 펴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여 준비를 갖추어 갔다. 드디어 1919년 3월 8일 거사일에 각 학교 학생들과 주동이 되어 대구 시내를 행진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날 대구의거는 영남 3·1독립운동의 효시가 될 뿐아니라 그 후에도 지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는 이해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그 후 1928년 4월부터 1931년 3월까지 향리에서 농촌계몽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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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필주 영세불망비
홍필주(1857 - 1917)는 대한제국기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규탄선언서를 발표한 항일운동가. 관료, 애국계몽운동가이다. 군수를 역임하였으며, 1904년 6월 일본이 조선에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는 공문과 10개조로 되어 있는 황무지개척권위임계약안을 제시하고, 일본인 나가모리[長森藤吉郎]에게 50년간 조선 전국토의 3할이나 되는 황무지의 개척 및 일체의 경영권을 넘기도록 강요하였다. 이에 이건하(李乾夏)·박기양(朴箕陽) 등과 함께 신사소청(紳士疏廳)을 설치하여 상소를 올리고, 규탄선언서를 발표하여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에는 을사조약 이후 깊어지는 민족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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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 구 묘
이윤재(1888~1942)는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국권회복을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김해서 합성학교의 교사가 되어 구국교육운동을 전개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마산의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에서 국사와 국어를 교육하고 마산의 예수교 청년면려회 회장과 유년주일학교 교장으로 활동했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지방의 3·1운동에 앞장서서 주동적 역할을 하다가 동지들과 함께 일경에게 붙잡혀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 출옥하자 중국으로 망명하여 신채호(申采浩) 등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보고 1924년 9월에 귀국하여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교육에 종사했다. 1925년에 안창호(安昌浩)가 조직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4월부터 협성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담당하여 교육하면서 허무당 선언서 발표에 관여하였다. 1927년 8월에 조선어연구회의 동지들과 함께 국어사전 편찬의 준비활동을 시작하였다. 또한 이해에 민족정신과 민족문화의 발굴·보존·계승을 위한 잡지인 『한빛』을 창간하여 편집 겸 발행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이 잡지는 역사, 사회, 전기, 한글 연구논문과 기행문, 수필문 등을 수록하여 민족문화 보급운동을 통해서 독립사상을 고취한 잡지였다. 1929년 10월 31일에 한글 기념식을 거행하게 되는 날을 택하여, 조선교육협회간에 모인 각계 유지 108인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하고 국어사전 편찬을 위한 편찬위원회 집행위원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 해에 사전편찬의 일로 중국 상해에 망명중인 김두봉을 만나러 다녀왔다. 1930년에는 혼란에 빠진 국문법의 확립과 맞춤법의 통일의 위해 권덕규(權悳奎)·최현배(崔鉉培)·김윤경(金允經) 등과 함께 한글맞춤법 통일안 작성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1년에는 종래의 조선어연구회를 조선어학회로 개칭했으며, 조선어학회에서 베푼 하기(夏期) 한글강습회 일로 전국을 순회하였다. 1932년에 조선어학회의 기관지로서 『한글』을 간행하고 그 편집 겸 발행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1933년 10월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완성하여 발표하고 그 보급운동에 힘썼다. 1934년에는 국학 및 사학자 동지들과 함께 역사 연구단체인 진단학회를 창립하는데 참가하고, 11월에 기관지 『진단학보』를 발간하는 일에도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1935년 1월에 조선어 표준어사정위원회를 개최하여 그 책임자로 활동했으며, 1936년에는 그동안 주관해서 정리해 오던 조선어 표준말 사정을 완성하여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발표하였다. 또한 1936년에는 조선어학회 전담으로 사전편찬의 신규사업을 시작하여 상임편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6월에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경에 붙잡혀 1940년 8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고 상고하여 1941년 11월 17일 고등법원에서 무죄 방면되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운동으로 최현배·김윤경 등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경에 붙잡혀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다. 1943년 12월 8일 일경의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감방에서 옥사하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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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해 공덕비
곽종해(1891 - 1946)는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그는 1920년 7월 3일 고향에서 백여명의 청년들을 규합하여 현풍청년회(玄風靑年會)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동회를 이끌었다. 그런데 동년 8월 10일경 임시정부에서 특파된 이현수(李賢壽)가 항일민족의식의 고취와 군자금 모집의 사명을 띠고 경고문·최급경고문(最急警告文)·자유신보(自由申報)·물품불구매고지서(物品不購買告知書)·납세거부서·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인정서 등을 휴대하고 귀향하였다. 그는 이현수를 도와 이 문서들을 복사한 후 1921년 2월말에 이르기까지 서장환(徐章煥)·정팔진(丁八鎭)과 함께 경상북도 일대의 관공리·부호들에게 우송하는 한편 대구시내 상점과 도로상에 살포하였다. 이들은 다시 임원조(林元祚)를 영천군(永川郡), 이상철(李相徹)을 달성군 교통사무지국장, 박기석(朴奇石)을 안동군(安東郡) 교통사무특파원으로 삼고 안동·영천·대구·경주지방의 관공서와 도로상에 이 문서들을 살포하여 민족의식의 고취에 힘썼다. 또한 이들은 일제식민통치의 부당성을 알림으로써 세계 각국의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1923년 워싱턴에서 열리는 군축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대구·평양·전주 등지의 외국인 선교사와 부산에 거주하는 외국인 인사 아벤에게 독립청원서를 우송하고 워싱턴회의에 즈음하여 독립운동을 촉구하는 내용의 자유지(自由誌)를 인쇄하여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및 국내 각지에 배포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을 펴던 중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23년 1월 일경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1945년 봄에는 달성군 현풍면의 신사(神社)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으로부터 가혹한 고문을 당하였다고 한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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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백 묘
이상백(1886 - 1965)은 경상북도 칠곡(漆谷) 사람이다.1919년 3월 12일 인동면 진평동(仁同面眞坪洞)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인동교회의 목사로서 대구(大邱) 서문외(西門外) 시장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3월 7일 이곳에 온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학생인 이영식(李永植)과 만나 독립선언서 20매를 전해받고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그는 자기의 집에서 이영식·이내성(李乃成)·이범성(李範成)·이영래(李榮來)·임점석(林占錫)·임용섭(林龍燮)·박명언(朴明彦)·권영해(權永海)·허도언(許道彦) 등과 다시 만나, 3월 12일 오후 8시로 거사일을 정하고 사전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는 권용섭(權龍燮)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필사로 제작하고, 3월 11일에는 자기집에서 이영식·이영래·임점석과 함께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2일 오후 8시, 동리 뒷산기슭에 3백여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그는 이영식과 교대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곧 독립될 것이라는 사실과, 또 이를 앞당기기 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역설한 후,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이날의 독립만세시위는 밤이 늦도록 전개되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경찰에 의해 주동자 8명이 체포되었다. 그는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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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영박 정사(수봉정사)
문영박(1880 - 1930)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자는 장지(章之), 호는 수봉(壽峯). 일명 문박(文樸). 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이다.영남의 거유(巨儒)로서 1919년부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전국 각지를 내왕하면서 군자금을 모금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계속해서 송달해주어 임시정부를 크게 고무, 진작시켰다.이에 보답하기 위하여 임시정부에서는 문영박의 사망에 즈음하여 1931년 10월 임시정부 일동 명의로 특발(特發)과 “대한국춘추주옹문장지선생(大韓國春秋主翁文章之先生)”이라는 조문(弔文)을 발송하였다.수봉정사는 수봉 선생이 돌아가신 후 다섯 자제분들이 수봉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협력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애국지사 문영박 선생의 생가이기도 하다.1980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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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화 묘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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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정 묘
이상정(1896 - 1947)은 일제강점기 충칭육군참모학교 교관, 신한민주혁명당 중앙위원 , 군사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월성(月城). 별명은 이연호(李然浩)·이직(李直). 호는 청남(晴南)·산은(汕隱). 대구 출신이다. 아버지는 이시우(李時雨)로 이시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우로는 이상화(李相和, 李尙火)·이상백(李相佰)·이상오(李相旿)가 있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李一雨) 밑에서 교육을 받았다. 큰아버지가 경영하던 신학문과 민족정기의 요람이었던 강의원(講義院)에서 공부하였다.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성성중학교(成城中學校: 육군유년학교)를 마치고 미술학교·상업학교를 거쳐 고쿠가쿠인대[國學院大學]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 1919년 귀국, 3년간 행동적 사도(師道)로서 오산(五山)·경신(儆新)·계성(啓聖)·신명(信明) 등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조국에서의 독립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1923년 만주로 망명, 북만주에서 약 2년간 민족교육을 통한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그 뒤 유동열(柳東說)·최동오(崔東旿) 등과 함께 중국 펑위샹[馮玉祥]장군의 서북국민부대의 장성참모로서, 장개석(蔣介石)군대와 통합된 후에도 국민정규군 소장참모로서 항일전선에 참전하였다. 그 뒤 상해와 난징[南京]을 중심으로 쑤저우[蘇州]·항저우[杭州]·우창[武昌]·북경까지 독립 일념으로 중국의 군벌·학자들과 만나면서, 또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의 독립지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윤봉길(尹奉吉)에게 폭약을 구해주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했으며, 1932년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장개석 국민정부의 초청으로 충칭육군참모학교(重慶陸軍參謀學校)의 교관을 지냈다. 1938년 김구·김규식 등과 더불어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의원 및 외교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유동열 등과 신한민주혁명당(新韓民主革命黨)을 조직해 중앙위원 겸 군사부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중국 육군유격대훈련학교의 교수를 거쳐 1942년 화중군사령부(華中軍司令部)의 고급막료로 난징전[南京戰]·한커우전[漢口戰]에 참전하였다. 이른바 태평양전쟁의 종결과 동시에 육군중장으로 승진되어 일본국 북지나방면 최고사령관 및 그 장병들의 무장해제를 담당하였다. 연합군 동경 진주의 중국군사령부의 막료로 임명되었으나, 소망인 일본군 타도가 실현되었으므로 모든 지위를 사퇴하였다. 충칭에서 광복된 조국의 앞날을 신익희(申翼熙) 등과 토론, 상해로부터 급히 와서 도와달라는 교민들의 요청으로 상해에서 중국인들의 한국인 박해로부터 교민 보호에 진력하였다. 1947년 10월 어머니의 사망소식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40여 일만에 뇌일혈로 죽었다. 유고로 『표박기(飄泊記)』가 있고, 시(詩)·서(書)·화(畫)에 능하였으며, 전각(篆刻)에 뛰어났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