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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창학교(육영학교) 터
보창학교는 강화 대대장으로 있던 이동휘(李東揮)가 1904년 8월 강화도에 설립한 육영학교(育英學校)의 개명한 이름이다. 1905년 5월고종 황제가 보창학교라는 교명(보창은 넓게(普) 퍼지고 번창하라(昌)는 뜻이다. 여기엔 교육을 통해서 새로운 인재를 길러내고자 했던 고종황제의 열망이 담겨있다.)을 내려 개명하였고, 내탕금 600을 하사 받았다. 보창학교는 이동휘가 교장이 되어 학교를 운영하였고 김성은을 교감으로 삼았으며 군영의 일부였던 강화읍 진무영 동영(東營)자리에 건립하였다. 군인과 일반인의 자제들에게 근대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였다. 교육과정으로는 소학보통과와 일어·영어과의 과정이 개설되고, 입학자격은 소학보통과는 신체 건강하고 정신에 결함이 없는 자로 8세 이상 16세 이하인 청소년으로 하고, 일어·영어과는 16세 이상 20세 이하인 자로 한문·국문·작문·습자에 능한 자로 하였다. 이동휘는 일본에 의해 강탈당한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 주는 교육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그 실천방법으로 군사훈련을 하였다. 이동휘의 보창학교 군사훈련에 크게 영향을 받은 많은 애국지사들은 군사훈련의 필요성에 눈뜨기 시작하였고, 이에 자극받은 유지자들은 군악기와 소총 다수를 구입하여 각 학교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1905년 3월에는 민영환(閔泳煥) 등 13명의 군인과 중추원 부의장 이근호(李根皓), 평리원장 민경식(閔京植) 등 당시의 고관과 명사들이 찬성금을 육영학교에 기부하였다. 그러나 보창학교는 1907년 여름 일본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진위대 영사 자리였던 열무당으로 이동했다가 1908년 2월에 다시 재건되었다. 이후 보창학교를 주축으로 한 강화지역 의무교육안이 마련되었고, 보창학교는 사범속성과와 중학과 졸업생을 배출하는 등 1910년까지 강화지역 교육을 선도하였다. 하지만 1910년 병탄 이후에 재정난을 겪다가 1911년 구 이아(貳衙) 건물로 이전하였으나 결국 1915년에 문을 닫게 된다. 모두 현재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로 멸실되었다가 2022년 9월 7일 보창학교 터였던 강화교육지원청 미래교육지원센터에 그 설립 의의를 기리기 위한 표지석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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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우 공적비
연기우(1865 - 1910)은 일제강점기 강화진위대부교, 동한창의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일명 연봉렬(延奉烈)·연기호(延基浩). 경기도 삭녕 출신이다. 일찍이 군문에 들어가 강화진위대부교(江華鎭衛隊副校)로 있다가 1907년 8월 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덕물포(德物浦)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같은 진위대 부교인 지홍윤(池弘允)이 갑곶(甲串)에서 일본군 1개중대를 깨뜨리고 합류하여 덕물포에서 여러 차례 일본군을 격파하였으나, 증원한 일본군의 강화부 공격으로 패하였다. 다시 의병 60여 명을 소모(召募)한 뒤 동한창의대장(東韓倡義大將)이 되어 연천·적성·삭녕·마전(麻田) 등지에 출몰하며 양주·포천 방면의 강기동(姜基東) 의병부대와 연결하여 여러 곳에서 일본군수비대와 경찰을 공격하였다. 1908년말 원수부13도총대장(元帥府十三道總大將)인 이인영(李麟榮)의 휘하에 들어가 서울 공략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양주에서 패한 뒤 창의한북대장(倡義韓北大將)이 되어 다시 의병을 이끌고 고양·연천·마전·삭녕·강화·교동 방면에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2월에 삭녕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자 9명과 피금자 43명을 내고 많은 병기를 빼앗기는 패전을 당하였다. 그뒤 나머지 부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안협(安峽)으로 들어가 철원·평강·이천 등지를 전전하다가 5월에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가 탈출하였다. 그뒤에도 활동을 계속하다가 국권상실 후 일본군에게 잡혀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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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3.1독립운동기념비
이 기념비는 강화 3·1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94년 11월 26일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405 (용흥궁공원 내)에 건립되었다. 강화의 3·1운동은 3월 13일 강화읍 장날을 기하여 전개되었는데 보통학교와 고등보통학교 학생 80여 명이 만세시위를 하다가 주동자 5명이 체포되었다. 이어 3월 18일 강화읍 장날에 길상면 온수리에 거주하는 유봉진(1990, 애족장)의 주도하에 2만 여명의 군중이 장터에 몰래 집결하였다가 12시를 알리는 강화 동종의 개시 신호로 일시에 뛰어나와 민족주권을 되찾고자 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이후 5월 1일까지 2달 동안 각 면 단위에서 횃불 시위 등으로 진행된 강화 3·1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이 60여 명, 체포 및 재판 회부가 50여 명에 이르며 3·1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된 사람이 18명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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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집(대명헌)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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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순국추모비
1907년 8월, 일제에 의한 한국군대(강화진위대) 강제해산으로 강화의병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주모자로 장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 교인 김동수(金東秀) 권사, 동생 영구(永九) 외 그의 4촌 김남수(金南秀) 권사를 추모자로 몰아 체포하였다. 그 이유는 김동수 권사가 기독교 독립운동가인 이동휘(李東輝) 등과 항일민족운동에 앞장섰다는 것과 교회에서 강론할 때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는 연설을 하였으며, 태서신사(太西新史)라는 서양 역사책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이 김동수 권사 3형제를 재판을 위해 포승줄로 꽁꽁 묶은 채 서울로 압송하던 도중 더리미 해변에서 일본칼로 즉결처형하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났다. 뚜렷한 죄도 없이 재판을 받을 경우 일본군의 무고가 밝혀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교회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의 숭고한 뜻을 기념하기위해 순국96주년을 맞아 전 교인의 뜻을 모아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순국추모비를 세웠다. 김동수(미상 - 1907) 선생은 1907년 8월 대한제국(大韓帝國) 군인 출신으로 군대에 강제 해산당하자 강화(江華)에서 지홍윤(池弘允)과 함께 기의(起義)하여 활약하던 중 강화성(江華城)이 함락될 때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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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독립만세운동기념비
강화중앙교회는 1900년에 창립된 교회로 강화도 지역의 선교 중심교회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합일학교나 복민의숙 등의 근대 교육을 실시하여 민중교육, 농민교육, 유아교육을 통한 지역사회 교육에 기여했다. 1901년 5월 연회에서 박능일 전도사가 강화읍구역 담임자로 파송되어 1903년 3월 별세할 때까지 시무하며 강화 지역의 선교 거점교회로서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부임 후 1901년 4월 1일 잠두교회 부설 잠두의숙을 설립하고, 숙장으로 취임하여 강화에 신교육기관을 탄생시켰다. 후임의 김우제(金宇濟) 전도사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을 조화시키는 목회를 지향하여 민족계몽과 신앙교육을 실시했다. 특히 그의 영향으로 이동휘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는 일화가 있다. 강화도 군민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이동휘의 기독교 입문은 ‘강화의 바울’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잠두교회는 복음전도와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에 진력했고, 잠두의숙은 1908년 12월 2일 에 정식 학교가 되면서 ‘사립제일합일학교’라 개칭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09년 4월 9일 잠두교회 내 여자소학교인 ‘제일합일여학교’가 설립되었다. 신교육의 기회가 없었던 강화 지역의 열악한 교육환경에서 교회를 다닌다는 것은 당시 여성들에게 커다란 문화적, 교육적 혜택이었다. 한편 강화읍교회는 한국의 근대사적 사건에도 관여했다. 1907년 8월 1일 정미 7조약에 의거해 대한제국 군인들이 무장해제당하자, 하정도 등의 무기고 습격이 기폭제가 되어 진위대 출신 병사들과 주민들이 합세한 무장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강화읍교회의 교인인 김동수 권사 3형제가 순국했다. 또한 3·1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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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근 묘
유경근(1877 - 1956)은 경기 강화(江華)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때 주모자 색출시 서울로 피신하였다가 붙잡혔으나 일신상의 문제로 보석되었다. 그후 노령(露領) 해삼위 신한촌(海蔘威新韓村)에서 이동휘(李東輝)로부터 독립군양성을 위해 국내지원자를 모집하라는 지령을 받아 김현구(金鉉九)와 함께 여러명의 청년을 모집하여 입대시켰다. 또한 임정의 연통제(聯通制) 조직 및 대동단(大同團)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8월 만주광복군총영(滿洲光復軍總營)으로부터 미국의원단의 내한을 계기로 조선인의 독립의지를 알려주기 위하여 일제기관 등의 파괴용 폭탄과 육혈포 등을 결사대장 김영철(金榮喆)이 가지고 와서 유경근의 집에 보관케한 사실이 일경에게 탐지되어 붙잡혔다. 그리하여 고등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강화군(江華郡)에서 광명학교(光明學校)를 설립하고 청소년교육에 힘썼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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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성 집, 흉상
명지면에 있는 사립 동명학교 교사 이진석(李鎭奭)은 당시 동창인 경성약학학교 학생 김연복(金淵福)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였다. 이진석은 동창생 박두성(1899~미상) 등을 규합하여 4월 10일 중리 명호시장 장날에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9일 밤 이진석은 양왕석과 철야작업으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복사하였다. 4월 10일 이진석은 동지들과 동명학교 학생들을 중리 명호시장으로 비밀리에 동원시킨 후 장꾼이 많이 모여든 오후 2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장꾼에게 나눠 주었다. 이진석이 태극기를 장대에 높이 달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약 50명의 군중이 일제히 여기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후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 헌병들의 진압으로 만세시위를 오래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주동 인물들은 오후 10시 약 50명의 학생·농민을 동원하여 진목리에서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다시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군중은 해산하였다. 박두성은 명지면의 4월 10~11일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이에 불복 공소를 제기하였다. 1919년 6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정부는 201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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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만세운동 기념비(길상면)
1919년 3월 8~9일 길직교회 이진형 목사 사택에 장윤백, 조종환, 조종렬, 장명순, 장동원, 장흥환, 황명희, 홍관우, 염성오, 유희철, 황도문 등이 모여 3월 1일 서울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을 이어 받아 강화에서도 동일한 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했다. 이후 이들은 3월 18일 강화읍 곳곳에서 2만여명의 주민들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당시 63명이 시위 주도 혐의로 체포됐고 43명이 재판에 회부돼 상당수 옥고를 치른 것으로 전해졌다. 이들 중 길상면 주민이 24명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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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후성전(유희철 기념관)
유희철(1893 - 1942)은 경기도 강화(江華) 사람이다.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吉祥面 船頭里)에 거주하였으며 부내면(府內面)의 3·1독립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강화군 부내면, 즉 강호읍에서는 1919년 3월 5∼6일에 많은 군중이 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3월 18일 유봉진(劉鳳鎭) 목사 등이 주동하는 독립만세운동 행동대원으로 참가하여 강화읍 장터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등 1만여 매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선두에서 시위행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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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철 묘
유희철(1893 - 1942)은 경기도 강화(江華) 사람이다.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吉祥面 船頭里)에 거주하였으며 부내면(府內面)의 3·1독립운동 계획에 참여하였다. 강화군 부내면, 즉 강호읍에서는 1919년 3월 5∼6일에 많은 군중이 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그는 3월 18일 유봉진(劉鳳鎭) 목사 등이 주동하는 독립만세운동 행동대원으로 참가하여 강화읍 장터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 등 1만여 매를 군중에게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선두에서 시위행진하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이해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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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용근 묘
황용근(1901 - 1967)은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부내면(府內面) 읍내(邑內) 장터의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부내면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서 만세소식을 접하면서 유봉진(劉鳳鎭)·유희철(劉熙哲) 등이 주도하여 일어났다. 이들은 이달 18일 읍내 장날을 거사일자로 결정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 읍내 장터에는 10,000여 명의 시위군중이 운집하였다. 유봉진은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에 있던 종루(鍾樓)에 올라가 종을 힘차게 치며 시위군중의 용기를 북돋웠다. 황용근은 시위군중과 함께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경찰들을 구타하고, 강화군청으로 나아가 독립만세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오후 5시경에는 장터에서 붙잡힌 유희철·조기신(趙基信) 등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결국 붙잡혀 1919년 12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출판법으로 태(笞) 90도를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