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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항일기념관
제주항일기념관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제주 지역 항일 독립 운동의 역사 자료를 전시한 박물관이다. 제주 지역 항일 독립 운동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보존·전시함으로써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자주 독립 정신을 계승·발전시키고 나아가 후대에 올바른 역사관과 애국 애향 정신 함양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제주항일기념관은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미밋동산인 조천만세동산 성역화 공원 내에 위치한다. 지하 1층 지상 2층 건물로 제1전시실·제2전시실·영상관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1전시실에는 3·1운동 이전과 이후로 나누어 1876~1945년의 항일 운동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항일운동연표, 일제 침탈과 기구의 개편, 송죽매의 결의, 지식층의 성장과 민족교육, 제주도 항일운동 발생지역도, 법정사 항일운동의 패널과 디오라마, 의병운동, 제주인의 항일운동 부조(浮彫), 일제의 강제 침략과 항일 운동 관련 사진 그래픽 등이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에는 3·1운동 전국상황도, 전국 3·1운동의 실체, 조천만세운동의 패널과 디오라마, 백응선 비석, 독립희생회 군자금 모금운동, 옥중생활사, 항일학생운동, 항일청년운동, 해녀항일운동의 매직비전과 패널, 종합그래픽, 제주인의 국외 항일 운동, 항복문서 조인식 모형, 백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영상관에서는 「제주의 빛」과 「세계 속의 낙원 북제주군」이라는 영상물이 30분가량 상영된다. 3·1운동 당시 제주 지역에서 맨 처음 만세운동이 시작된 제주항일기념관 앞 만세동산에는 3·1운동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소장 자료로는 항일 운동 관련 기록문서 110여 점, 독립 운동가 사진 170여 점, 국제한국연구원 기탁 자료 10여 점, 「일본군의 최후」 영상 필름 1점, 백범김구기념사업협회가 제공한 사진 자료 10여 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제공한 사진 자료 70여 점, 훈장 4점, 기타 기증 자료 97점 등 총 600여 점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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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전(부림전) 기념비
부림전(1920-1977)의 이명은 부두전이고, 제주 출신의 항일운동가이다. 일본에 있는 니혼대학 부설 오사카전문학교에 재학 중 1940년 5월 김봉각(金奉珏)·강금종(姜金鍾)·김병목(金丙穆) 등과 함께 흥아연구회를 조직하였다. 흥아연구회는 1940년 5월 26일 계림동지회라고 개칭되었고, 부림전은 세계 동향 연구부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계림동지회는 비밀은 누설하지 말 것, 반드시 출석하되 시간 엄수할 것, 회의는 반드시 한국말로 할 것, 행동을 삼가며 주색(酒色)에 빠지지 말 것, 동지의 영입은 김봉각·강금종·김병목·고봉조(高奉朝)·한만숙(韓滿淑)·부림전 등 6명의 전원 합의에 의해서 결정할 것, 회의 결과는 기록에 남기지 말 것, 회합은 매월 첫 일요일로 하되 장소 기타에 관한 것은 김봉각의 지령에 따를 것 등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계림동지회는 지식층을 포섭하여 마르크스주의와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연구하게 하고 니혼대학 부설 오사카전문학교 관계자를 회원으로 포섭하는 등 의 활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었다. 부림전과 동지들은 1941년 2월 26일 체포되어 1942년 10월 9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0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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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설대비
조설대(朝雪臺)는 한일 강제합방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의미의 마애명(磨崖銘: 암각문)을 새긴 곳이다. 제주 애국지사 12인은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이 곳에 모여서 조선의 수치를 설욕하겠다는 구국 맹세를 하고, 이 바위에 그 맹약을 새겼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동년 12월 제주 유림 이응호, 김좌겸, 김병로, 김병구, 김이중, 서병수, 고석구, 김석익, 강철호, 강석종, 임성숙, 김기수 등 12인은 문연서숙에 모여 집의계(集義契)라는 비밀결사를 결성하였다. 이들은 오라동 연미마을 바위산인 망곡단에 모여 집의계 선언문을 낭독하고 의병투쟁을 다짐하였다. 본래 망곡단은 국상을 당했을 때 선비들이 향을 피우고 북향사배하던 유서 깊은 곳이었다. 이후 이곳은 집의계 회원들에 의해 ‘조선의 치욕을 설역한다’라는 뜻의 조설대(朝雪臺)로 부르게 되었다. 조설대를 새긴 마애명은 현무암 자연석에 새겨져 있어, 현재는 보호석으로 가려져 있다. 동산에 세워진 대한광복의사(大韓光復義士), 조설대(朝雪臺) 비석, 집의계 광복의사경모비(集義契光復義士敬慕碑) 등은 후대에 따로 세운 것이다. 대한광복의사비는 일명 12인비라고도 하는데, 집의계를 구성한 12명의 유의 이름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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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대교 도주 상니 대성 유적비
강승태(姜昇泰. 1895.05.02.∼1960.02.29.) 지사는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 도주(道主)로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다. 다른 이름으로 承河, 升玉, 昇華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창씨개명할 때에는 岡本承河로 했다. 호는 龍江, 도호(道號)는 尙尼이다. 全羅南道 濟州島 中文面 下猊里 231번지가 본적으로 되어 있으나, 안덕면 上川里에서 姜彛鎬의 서자로 태어나 上猊里 2276번지에서 살았다. 1903년부터 약 2년 동안 한문을 수학했다. 1908년에는 목포에 가서 한의학을 공부했으며 농사도 지으면서 살다가 1917년에는 태을도(보천교)를 믿었으나 특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1924년부터 全北 金堤로 가서 修道 생활을 했는데 1930년 꿈에 증산천사(강일순)를 만나 ‘너는 이후 10년간 크게 성공할 때까지 맹목적으로 오로지 수도를 하라’는 신명(神命)을 받아 繼統(법통을 이어받음)하였으며, 1931∼1935년에는 하예리에서 後天大道起運禮를 致誠으로 奉行하며 修道에 정진하였다. 이 시기에 시력을 잃었다. 1936년 1월 27일(음력 1월 4일) 오후 9시경 제주도 안덕면 동광리 강위경(姜渭慶) 집에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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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비석거리(함덕리)
김재동(1910~1932)은 1931년 1월 고향인 북제주군 신좌면 함덕리에서 일본 동경에 유학 중 사망하여 유해가 운구되어 온 향리 출신 독립운동가 한영섭(韓永燮)의 장례를 김두성(金斗性) 등과 함께 동지장으로 치르면서, 「그대는 죽었지만 그대의 주의 정신은 동지인 우리들에게 계승되어 분투할 것이니 고이고이 진좌하라」라고 쓴 조기 40여 개를 만들어 사용하고 혁명가를 고창하였다. 이와 아울러 추모비를 만들어 동리 공동 샘터 부근에 세웠는데, 그 앞면에는 「동지적광(同志赤光) 한영섭」, 뒷면에는 「차디찬 백색 밑에 눌리인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다 피뿌린 동지였다」라는 문구를 새겼다. 이에 일경이 비석의 문구가 불온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였다는 이유로 비석을 뽑아 내어 압류하고 그와 5명의 동지는 붙잡혔다. 그 후 1931년 8월 5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공소하여 대구형무소에서 재판 대기 중 옥사(獄死) 순국하였다. 대구복심법원의 이른바 공소기각 결정문은 그의 사망일자를 1932년 3월 14일로 기록하였으나, 다른 동지 5명에 대한 항소심 판결은 이미 1931년 12월 8일에 있었고 그 판결문에는 그의 이름도 관련사실도 적기되어 있지 않다. 이로써 보면, 그의 실제 사망 일자는 1931년 8월 5일 이후 12월 8일 이전의 어느 날인데 일제 법원이 그의 옥중 사망 사실을 은폐하려다 뒤늦게야 공표한 것으로 추측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부생종(1909~1936)은 1931년 1월 제주도에서 김일준(金日準)과 함께 죽은 애국자를 애도하는 기념비를 건립하려다가 비문에 독립사상이 있다하여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1933년 2월에 김일준과 함께 항일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향동회(鄕同會)와 민풍진흥회(民風振興會)를 조직하여 입회하고 농민조합(農民組合)을 조직하여 애국동지 포섭에 활동하였다. 1934년 3월에 김원근(金元根)의 집에서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여 국문과 민족역사를 가르치며 구국운동을 전개하다가 1934년 8월에 일제 경찰에 붙잡혀 잔혹한 고문을 받고 1936년 6월 29일 목포형무소에 옥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일준(1911~1960)은 일본 동경에 유학하여 동향인 한영섭(韓永燮)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의 감시에 쫓겨 귀국한 다음 청소년과 문맹자를 모아 교육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동경에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한영섭의 병사(病死)를 추모하고 그의 애국혼을 기리기 위하여 향리에 추모비를 세워 그 비문에 「차디찬 흰빛 밑에 눌리인 무리들아 고함쳐 싸우라고 피뿌린 동지였다」라고 썼다가 독립사상을 가졌다고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931년 12월 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출옥 후에 향리에서 다시 사학(私學)을 열어 주민들을 교육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했으며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유사시에 봉기하기 위한 준비를 하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함경북도 나진(羅津)으로 피신했으나 그곳에서 붙잡혀 압송된 후 1937년 4월 12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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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희 묘
김순희(1908 - 1933)는 제주(濟州) 사람이다.1929년 3월말경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에 재학하고 있던 중 정관진(鄭寬鎭)·김태래(金泰來)·한경석(韓慶錫) 등과 함께 이학종(李學鍾)등이 1927년 3월경에 조직한 비밀결사 조선학생혁명당(朝鮮學生革命黨)을 조선학생전위동맹(朝鮮學生前衛同盟)으로 확대개편하고 중앙집행위원 겸 선전부장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1929년 5∼6월 서울 관훈동(寬勳洞)에서 중앙위원회를 개최하고 세포조직인 독서회를 각급학교에 결성토록하고 사회주의사상을 계몽하는데 힘썼으며, 동년 11월말경 서울 봉익동(鳳翼洞) 자택에서 정종근(鄭鍾根)·김태래(金泰來) 등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으로 붙잡힌 한국인 학생들의 즉시 석방과 식민지 교육정책을 반대하는 격문을 작성하여 배포할 것을 논의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다가 일경에게 붙잡혔다.그는 1931년 4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가혹한 고문으로 인하여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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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의숙 터
신유의숙은 1921년 독립운동가인 회을 김성숙(金成淑)이 설립한 학교로 가파도의 유지였던 이응신, 이시화, 김옥천, 김한정, 이도일 등의 공으로 1922년 4월 가파 신유의숙이 개교하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6년 과정의 심상소학교(일제강점기 초등교육)과정을 개설 및 운영하였으며 한글교육과 나라사랑 정신을 강조하였는데 숙가(교가) 및 교표(모표)에 무궁화를 넣었다는 사유로 1년간 폐교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을 공동체는 배움을 멈추지 않고, 교실 창문을 모포로 막아 호롱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숨어 학생과 어른 모두 주경야독하였다고 한다. 1932년 가파 신유 서당으로 교명을 바꾸어 신교사로 이전하였으며 1946년 11월 가파국민학교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김성숙의 신유의숙은 강문석의 한남의숙, 윤식명의 광선의숙과 함께 대정지역의 3대 사숙이라 통칭하는데, 후일 대정에서 항일인사가 많이 배출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신유의숙의 교사들 대부분이 민족주의적인 성향을 지녔으며 항일민족교육의 중심지로 정평이 나 가파도는 문맹자가 없는 지역으로 널리 알려졌다. 김성숙(1896-1979)은 제주 출생이며 호는 회을(悔乙)이다.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중에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퇴학당하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1년 김성숙은 가파도 355번지에 터를 잡고 1921년 소규모의 의숙을 세워 최초로 6년 과정의 심상소학교 과정을 개설 및 운영하였다. 이후 마을 중심으로 이동하여 새 학교건물을 다시 지었으며 당시 900엔(円)을 들여 가파리 275번지 421평 대지 위에 24평짜리 교사(校舍)를 건축하였다. 이후 1924년 신유의숙을 동지인 김한정에게 맡긴 뒤 김성숙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고 1927년 신간회(新幹會) 위원으로도 활동하였으며 1930년 광주학생운동에 동조하여 체포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였다. 1981년 가파도 주민과 문하생들이 김성숙 선생 동상과 신유의숙 설립공로비를 가파초등학교 교정에 세워 그 고마움을 후세에 전하였다. 정부는 2005년 고인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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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창규 기념비
강창규(1872 - 1963)는 1918년 10월 제주도 중문면(中文面) 도순리(道順里, 현재 도순동) 법정사(法井寺)에서 주지 김연일(金蓮日)을 중심으로 신도 및 농민들과 함께 일본인관리 축출과 독립을 위해 무장봉기하였다. 이들은 일격에 서귀포를 습격하려고 하였으나, 진로를 바꾸어 중문경찰관주재소(中文警察官駐在所)를 습격하였다. 봉기한 세력은 400여 명의 대규모 집단으로 변모하였다. 그는 강정리(江汀里)·도순리 사이 대천(大川)의 서안 부근에서 전선 및 전주 2본을 절단하고 서귀포 중문리의 주재소를 습격하여 불태우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2월 궐석재판에서 소위 소요(騷擾) 및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년을 받았고, 4년의 도피 끝에 1922년 12월 28일 체포되어 징역 8년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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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석 구 묘
김만석(미상 - 1909) 선생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고승천(高承天) 의진에 참여하여 제주에서 활약하였다. 김만석은 1902년 2월 25일 제주 광양동(廣陽洞)에서 고승천·이중심(李中心)·김석명(金錫命)·조병생(趙丙生)·김선일(金先一)·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노상옥(盧尙玉) 등과 거의하고, 고승천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고승천 의진은 "가까운 장래에 일본인의 손에 제주 전역이 점령당하게 되니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본인을 살해할 것"이라고 하는 격문을 비밀리에 제주 전지역에 배포하여 거의 사실을 알리고 군사를 모집하고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이 때 그는 고승천·조병생·김재돌·노상옥 등과 더불어 대정(大靜)군 영낙리(永樂里)·신평리(新坪里)·광청리(光淸里)·안성리(安城里) 등에서 의병 300여 명을 모으고, 군수품을 수합하여 의진 편성을 서둘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3월 1일 그는 동광청리 민가에서 고승천과 함께 대정주재소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월 4일 고승천과 더불어 포승을 끊고 간수와 순사를 쓰러뜨리고 탈출하다가 대정 동문 밖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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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훈, 김만석 순국지
김만석(미상 - 1909) 선생은 제주(濟州) 사람이다. 고승천(高承天) 의진에 참여하여 제주에서 활약하였다. 김만석은 1902년 2월 25일 제주 광양동(廣陽洞)에서 고승천·이중심(李中心)·김석명(金錫命)·조병생(趙丙生)·김선일(金先一)·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노상옥(盧尙玉) 등과 거의하고, 고승천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고승천 의진은 "가까운 장래에 일본인의 손에 제주 전역이 점령당하게 되니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일본인을 살해할 것"이라고 하는 격문을 비밀리에 제주 전지역에 배포하여 거의 사실을 알리고 군사를 모집하고 군수품을 수합하였다. 이 때 그는 고승천·조병생·김재돌·노상옥 등과 더불어 대정(大靜)군 영낙리(永樂里)·신평리(新坪里)·광청리(光淸里)·안성리(安城里) 등에서 의병 300여 명을 모으고, 군수품을 수합하여 의진 편성을 서둘렀다. 그러던 중 같은 해 3월 1일 그는 동광청리 민가에서 고승천과 함께 대정주재소 일경에게 붙잡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3월 4일 고승천과 더불어 포승을 끊고 간수와 순사를 쓰러뜨리고 탈출하다가 대정 동문밖에서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고사훈은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늑결되자, 호남의 의병장인 최익현(崔益鉉)과 신돌석(申乭石)이 의거의 기치를 올렸음을 듣고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을 결의하여 거사계획을 협의하였다. 1908년 김석윤(金錫允) 노상옥(盧尙玉)과 함께 장성(長城) 출신 의병장 기우만(奇宇萬) 기삼연(奇參衍) 등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제주(濟州) 및 광양(光陽)에서 의병운동의 효과적 전개를 위한 무기를 비밀히 제조하여 공급하였다. 한편 의병을 모집하여 황사평(黃蛇坪)에서 훈련시킨 후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이때 김석윤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參謀) 및 모병책(募兵責)을 맡아 활약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2월 10일 국운이 풍전등화에 이르게 되자 의병운동을 거도적(擧島的)인 규모로 확대하여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동지인 김만석(金萬石)을 대동하고 대정(大靜)에서 창의 격문(倡義檄文)을 살포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 적에게 체포되어 음력 2월 13일 서광리(西廣里)에서 김만석과 함께 피살 순국하였다. 제주시에는 그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의병항쟁기념탑이 건입동에 세워져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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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탑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는 1918년 10월 제주도에서 국권회복을 부르짖으며 대규모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했던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던 법정사가 있던 곳이다. 법정사는 1909년 관음사를 창건한 안봉려관(安逢廬觀)과 김석윤(金錫允)이 한라산 남쪽을 대표할 사찰의 필요성을 느끼고 관음사 다음으로 일으켜 세운 사찰로서, 1911년 9월 좌면 도순리 산 1번지에 창건되었다. 이 법정사에 1914년 경북지역에서 김인수·정구용과 함께 항일운동의 이력을 갖고 있던 김연일이 주지로 부임하면서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방동화 등과 함께 이곳을 대대적인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법정사는 1918년 9월경 곤봉, 화승총, 깃발 등을 준비한 뒤 거사를 지휘할 조직을 구성하였다. 그리고 1918년 10월 5일과 6일, 법정사 정기 예불일에 모인 사람들과 7일 새벽, 출정식을 갖고 도순리로 향하였다. 선봉대가 각 마을에서 참여자를 모집하였고 영남리·서호리·강정리·호근리를 순회하며 전선과 전주를 절단하였으며, 하원리에 이르러서는 일본인에게 위해를 가하였다. 중문리에 이르렀을 때 인근 마을에서 700여명이 동조하여 참여하였다. 주민과 합세하여 힘을 얻은 이들은 중문리경찰관주재소의 기구와 문서 등을 불태웠으며 일제에 구금되어 있었던 농민 10여명을 석방한 뒤 주재소 건물을 불태웠다. 그러나 항쟁은 총으로 무장한 서귀포경찰관주재소 기마순사대의 저지로 제주 전역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당시 일제에 피체되어 검거된 인원은 60여명이었으며, 재판에 회부되어 실형을 받은 대상자는 30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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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현 기념비
변성현(1916 - 1938) 선생은 제주 서귀포 사람이다. 그는 제주도 서귀포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야학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변성현은 1931년 3월 서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다가 1933년경 사회주의 사상을 방략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서귀면(西歸面) 법환리(法還里), 속칭 막원포(莫遠浦) 해안에서 독서회를 조직하여 마을 청년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변성현은 독서회 회원들과 수차례 모임을 갖고 민족의식의 고취, 일본 제국주의 비판, 무산자 계급 의식 고양 등을 주요 주제로 토론하고 일제의 일본인과 조선인들의 차별 정책을 비판하였다. 1935년에는 집안에 야학을 개설하여 문맹퇴치에 앞장섰으며, 농촌의 부족한 일손을 돕기 위해 품앗이 형태의 갈개[호미]회를 조직하여 마을 청년과 부녀자들을 상대로 선전활동을 하다가 6월경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변성현은 1935년 10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1937년 6월 4일 목포지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 365일 통산)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