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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모 의적비
양원모(1858-1942)는 전남 곡성 촌동면(村洞面)의 면장으로 의병들에 대한 지원에 나섰던 인물이다. 1909년 8월 동면 선주산에 주둔하던 조규하(趙圭夏)의진에 군량을 조달하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구례헌병대와의 전투에서 조규하의병장이 순국하자 그 의로운 시신을 수습하도록 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일병에 의해 붙잡히고 말았다. 일병은 코에 물을 붓고 잔혹하게 구타하다가 실신하자 횃불로 전신을 지지는 등 금수같은 고문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너희들은 우리 나라의 원수이다. 힘이 없음을 한탄할 뿐이오 어찌 너희에게 보고하여 우리 선비의 기절(氣節)을 막겠느냐" 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가혹한 고문 끝에 일군은 그가 사망한 것으로 오인하여 물러갔으며, 그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간신히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 의적비는 양원모의 항일 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1963년 3월 10일 수백 유림들이 면사무소앞 길가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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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수 의적비
청호 유인수(1860 ~ 1927)는 전라남도 곡성(谷城) 사람이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의병진에 군자금을 조달하면서 항일투쟁을 지원하였다. 유인수는 1908년부터 이석용(李錫庸) 의진에 군자금을 제공하여 의병의 항일투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1908년 9월에 15냥(兩), 1909년 10월에 3냥, 1912년 4월에 20냥 등 총 38냥의 군자금을 지원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1912년 이석용이 의병활동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조직한 거점조직인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의 곡성지역(谷城地域) 단원으로 활동하며 의병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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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계정사(안훈서당)
완계정사는 안훈(1881~1958) 선생이 건립한 전통 양식의 서당이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전후기를 함께한 작은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이곳을 통해 수천 명의 학생들이 배출되었다. 선생은 독립운동 활동뿐만 아니라 학문적인 면에서도 여러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일제시대에는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면서 단발령과 창씨개명 등의 정책도 결연히 반대하고 1941년 의병장의 추모비 축조를 계획하다가 검거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선생의 저서로는 분암집 26권이 있으며, 선생의 고귀한 독립정신의 얼을 계승하고자국가보훈처에서 '독립운동사 적지'로 지정하였다. 안자정(안훈, 1881~1958)은 전북 곡성(谷城) 사람이다. 이석용(李錫庸)이 의병활동의 재개를 위해 각 지역에 조직한 비밀조직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團)의 남원지역(南原地域)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은 1905년 11월‘을사조약'의 강제체결로 국권이 피탈되고, 이어 1907년 7월‘정미7조약(丁未七條約)'으로 군대까지 해산당하는 등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우리 민족은 무력투쟁인 의병운동을 재개하였고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전국적인 민족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이석용은 1907년 기삼연(奇參衍)이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를 구성하자 종사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독자적인 의진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창의동맹(義兵倡義同盟)'을 결성하고 전해산(全海山) 등을 참모로 기용하고 전북일대에서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수차려 교전 끝에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고 1909년 의진을 해산하였다. 그 후 1911년 의병활동을 재개하기 위해 거점조직으로 임자동밀맹단을 구성하고 군자금모집에 진력하였다. 안자정은 이석용이 결성한 임자동밀맹단에 1911년에 목화(木花) 20근을 군자금으로 제공하여 임자동밀맹단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그는 1913년부터 향리에서 완계정사(浣溪精舍)에서 후학교육에 전념하였다고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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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사
오강사(梧岡祠)는 면암 최익현과 그와 함께 기병하였던 충실한 사람들을 추모하는 사당이다. 면암은 을사의병 거병 후 왜병에게 잡혀 대마도에서 순국했으며, 그의 충신으로 추앙받는 조우식, 조영선 등은 이에 대한 애도와 감사의 뜻을 담아 사당을 조성했다. 1921년 일본 경찰의 압수로 인해 영정과 사당이 훼파되었지만, 곡성 유림들이 총독과 경찰서장에게 항의함으로써, 1922년에 사당과 영정을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후에도 사당은 반복적인 압수와 훼손을 당했지만, 이를 매번 복원하였으며 사우내에는 면암과 성암의 영정 및 4위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한편, 오강사에 모셔져 있는 면암 최익현의 초상은 2017년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281호로 지정되었는데 비단에 채색한 정면 좌상으로 대한제국기 대표적인 초상화가였던 채용신(蔡龍臣)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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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건영 의적비
유건영(1883~1940)은 전남 곡성(谷城) 출신으로서 본관은 문화(文化). 호는 석전(石田)이다. 농촌의 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송사 기우만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기우만은 행주 기씨의 사람으로 의병장 기삼연의 조카뻘이며 이후에 의병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류건영은 기우만의 밑에서 애국의식을 키웠으며 이후 순창 지역을 중심으로 면암 최익현이 의거하자 입진(入陣)하였다. 그러나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대마도로 압송되고 의진이 해산되자 이후 농촌에 들어가 청소년 교육에 힘써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르고자 하였다. 1940년 일제가 만주침략을 감행한 뒤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을 추진하였고 류건영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항의문을 전달하고 1940년 7월 24일 독(毒)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광복 후 곡성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무산사(武山祠)라는 사당을 세우고 해마다 순국한 날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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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택 순교비
조용택(1902-1950)은 전라남도 담양 옥과에서 부 조동윤 모 박치선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담양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5세에 탈메이지(J.V.Talmage) 선교사 조사인 고모 조덕화에 의해 예수를 인격적으로 영접하게 되었다. 그는 탈메이지 선교사가 설립한 순담청년성경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탈메이지 선교사의 조사로 순천 담양지방에서 순회 사역을 담당하였다. 또한 전남노회 유지재단 설립 사역에도 헌신하였다. 1937년 탈메이지 선교사의 추천으로 평양신학교 입학하였으나 제 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에 반대하여 1938년 평양신학교를 자퇴하였다. 당시 호남지역 신학생 박동환(박팽동), 김용하(김용수) 등과 함께 낙향하였다. 그리고 고향인 옥과 교회 전도사로 부임 시무하였지만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전개하다 6개월간 광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 4년간 미결수로 수시로 모진 고난을 겪으면서 살아갔다. 결국 황국신민화 반대와 일본 왕에 대한 불경 죄목으로 2년 징역을 마치고 1944년 8월 12일 출소하였다. 그는 출옥하여 자신이 시무하던 옥과교회를 재건하는데 힘썼다.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1950년 9월 29일, 조용택 전도사는 당시 수피아여고를 섬기고 있는 교장 유하례(Root, florence Elizabeth) 선교사를 피신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유하례 선교사는 미국 대사관으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도 학교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철수하지 않고 교장실에서 기도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1950년 7월 23일 광주에도 공산군이 침입하여 아비규환의 비극을 연출케 되었다. 이때 선교부에서 일하던 조용택 전도사는 장재태 전도사와 함께 유하례 선교사를 피신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유하례 선교사를 모시고 77일간 꼬박 바위 틈에 숨어서 기도와 성서읽기로 세월을 보내던 중 유엔군이 뿌린 전단을 보고 하산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때 하루 먼저 하산했던 조용택 전도사는 퇴각하는 공산군들에게 붙잡히며 순교하였다. 옥과교회에서는 조용택의 불굴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60주년을 맞이하여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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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건 집
장재건(1843-1910) 선생은 188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전적(典籍)과 지평(持平)을 지내었다. 1894년 시국이 혼란해짐을 보고 사직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학문을 닦던 중 1909년 옥과향교(鄕校)를 폐쇄 시키려 하자, 철거반을 향해 강력하게 반대하여 향교를 보존시킬 수 있었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금치 못하여 나라의 운명을 한탄하면서 자결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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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임수 기적비
노임수(1876-1909)는 전남 곡성 출신 의병장으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유원중, 조규하와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907년 김동신 의진에 속해 활약하였고, 1908년 김동신이 의병활동이 어려워지자 28명과 새 의진을 구성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김동신이 체포되어도 독립 의병활동을 이어갔으나, 1908년 11월 체포되어 1909년 1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정부는 그의 공을 인정해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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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백 기적비
신정백(1864-1908)은 전라남도 곡성에서 태어났다. 1908년 3월 30일 전남 의병장 조서화(趙書華) 의진에 입진(入陣)하여 구례, 죽곡, 곡성 등지에서 지휘관으로 활약하였다. 조서화 의병장이 전사한 후 신정백은 독립하여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통솔, 구례·곡성·낙안·남원 등에서 활동하였다.1908년 11월 24일 곡성군 목사동 평리(坪里)에서 일본 토벌대와 40분간 교전 끝에 부하 5명이 전사하였으며 신정백은 동미동으로 피신하였으나 곧 체포되었다. 체포된 후 모진 고문에도 그의 언동은 적에게 조금도 굴함이 없었고, 오히려 일본군의 만행을 규탄하고 의거의 당연함을 적에게 설파하기까지 하였다. 1909년 10월 16일 구례·광주(光州)·목포·대구 등지로 이감되었다가 마침내 1909년 3월 27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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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임수 묘
노임수(1876-1909)는 전남 곡성 출신 의병장으로,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때 유원중, 조규하와 의병을 조직해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 1907년 김동신 의진에 속해 활약하였고, 1908년 김동신이 의병활동이 어려워지자 28명과 새 의진을 구성하여 의병장이 되었다. 김동신이 체포되어도 독립 의병활동을 이어갔으나, 1908년 11월 체포되어 1909년 1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정부는 그의 공을 인정해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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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교 집
독립운동가 문재교(1879~1957)의 생가터로서 그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끝에 정동근.양기중.양재홍.김영하 김교락.고성후와 함께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권총, 철봉(鐵棒), 도검 등을 휴대하고 나주.함평.화순.순천 등에 걸친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1년여 동안 십여 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수합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복심법원에서 강도죄로 선고 받아 옥고를 치렀다.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그 공훈을 널리 알리고자 표지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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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추모탑(우산공원)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하던 한말·일제강점기에 전남 광양 출신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목숨을 걸고 일어나 항일 의병전쟁, 1919년 3·1독립운동, 농민운동, 노동운동, 학생운동 등에 참여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특히 1910년 일제의 강제병합에 항의하여 박병하(朴炳夏, 1847~1910)는 단식으로, 황현(黃玹, 1855~1910)은 음독으로 자결 순국하였다. 광양시에서는 이들을 기리기 위하여 2009년 3월 1일 이 탑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