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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상 기적비
박규상(1893~1921)은 전라남도 영암(靈岩) 사람이다. 1919년 3월 11일 조극환(曺克煥)이 주동이 되어 보통학교 학생과 주민들을 모아 독립만세시위를 일으켰으나 미리 계획이 일본군경에게 탐지되어 오히려 엄중한 수사와 감시만 강화된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산발적인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일제의 무력탄압으로 곧 중단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난국(難局)을 이겨내면서 그는 최한오(崔漢五)·조병식(曺秉植) 등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하기로 뜻을 모으고, 읍내의 유지 조극환·정학순(鄭鶴順)·최민섭(崔旻燮)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영암 장날인 4월 10일 오전 9시를 기하여 구림리와 읍내에서 동시에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구림리의 문죽정(問竹亭)을 임시 연락 본부로 정하고 시위 준비를 하였는데, 당시 군서면 면서기로 있는 김재홍(金在洪)과 최민섭이 면사무소 등사판을 이용하여 태극기 50여 매, 독립선언서 6백여 매, 독립신문 5백여 매, 독립가(獨立歌) 1백여 매를 등사하여 영암 보통학교 학생인 김봉근(金奉根)·김영언(金永彦)·유인봉(柳寅奉)·이종구(李鍾謳)·이지봉(李枝奉)·천병권(千秉權)·진봉재(陳奉才)·박종련(朴鍾連)·채동팔(蔡東八) 등으로 하여금 배포케 하였다. 4월 10일 오전 9시, 그는 태극기와 유인물을 회사정(會社亭) 광장에 모인 시위군중에게 나누어주며 시위군중의 선두로 나아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었다. 이어 1천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읍내 중심가로 시위·행진하다가 체포되었다. 결국 이해 6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심한 병고로 보석되어 귀향하던 중, 서호강(西湖江)의 배 안(船中)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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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림 삼일운동 기념탑
구림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1919년 4월 10일에 군서면 구림리 회사정(현, 도기문화센터)에서 들려오는 나팔 소리를 신호로 1000여명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1.3Km 를 행진하였다. 영암에서도 3.1운동 때 조극환 등의 주도 아래 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로 조극환을 비롯한 최민섭, 박규상, 정학순, 김민규, 김학용, 김봉규, 김상조 등은 봉산 밀림에서 비밀회합을 갖고 4월 10일 대대적 봉기를 결의하고 10일 아침 유인물을 집집마다 투입하여 구림 대동계 광장에 집결,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모여든 군중들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영암읍까지 시위를 벌였으나 영암읍에서 일본 경찰들과 충돌, 주동자 25명이 체포되었다.구림청년계 3.1 기념탑 건립추진위원회가 주민 성금과 군비 및 특별교부금 등 2억 2000여 만원을 들여 건립한 이 기념탑은 높이 10m, 기단 폭 6m 규모로 구림 출신인 전남대 미술교육과 최규철 교수에 의해 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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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방매 집
양방매(1890~1986)는 전남 영암 사람이다. 전북 무주 출신의 강무경 의병장이 심남일(沈南一)과 함께 전남 함평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1908년에는 영암으로 이동했을 때 영암군 금정면(金井面)의 선비 양덕관(梁德寬)의 집에 유숙한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하였다. 양덕관은 양방매의 친아버지였고 큰 오빠였던 양성일(梁成一)도 20세 청년으로 의병에 가담하였다. 일본군의 공세를 피하기 위해 영암을 떠나게 된 강무경이 여자가 따라나설 데가 아니라며 집에 남을 것을 권유했으나,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 남편,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무경을 따라 의병이 되어 항일전에 나섰다. 이듬해 1909년 10월 9일 전남 화순군(和順郡) 능주면(綾州面) 바람재 바윗굴에서 남편과 함께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1년 동안 양방매는 남편부대의 일원으로 장흥(長興)·보성(寶城)·강진(康津)·해남(海南)·광양(光陽) 등지까지 전남 동남부 일대 산악지방을 무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특히 1909년 3월 8일 강무경 의병이 남평(南平) 월교리(月橋里)에 머물다가 일본군 15명이 운곡으로 갔다는 보고를 받고 작전계획을 세운 다음 본진을 장암에 두고, 의진을 5개 부대로 나눈 후 대치(大峙)·대항봉(大巷峰)·월임치(月任峙)·덕룡산(德龍山)·병암치(屛岩峙) 등지에 매복시켜 놓고 유인작전으로 협공을 벌여 다수의 일본 군경을 사살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린 남평의 거성동(巨聲洞) 전투가 벌어졌을 때, 여기에 직접 참전한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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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홍 사당(의홍사)
김치홍(1880~1910)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1908년 10월 심남일 의병진에 가담하여 기군장에 선임되어 약 6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영광·능주 등지를 무대로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909년 1월에는 박민홍 의병부대의 제1초십장에 임명되어 총기 15정을 갖추고 부하 30여 명을 인솔하여 나주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같은 해 4월에는 박사화 부대의 제1초십장에 임명되어 총기 12정으로 무장한 부하 26명을 거느리고 영암 일대에서 역시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영산포 일제헌병대에 피체되어 1910년 6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 강도죄로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며 같은 해 7월 23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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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홍 묘
김치홍(1880~1910)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1908년 10월 심남일 의병진에 가담하여 기군장에 선임되어 약 6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영광·능주 등지를 무대로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1909년 1월에는 박민홍 의병부대의 제1초십장에 임명되어 총기 15정을 갖추고 부하 30여 명을 인솔하여 나주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같은 해 4월에는 박사화 부대의 제1초십장에 임명되어 총기 12정으로 무장한 부하 26명을 거느리고 영암 일대에서 역시 군자금 모금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영산포 일제헌병대에 피체되어 1910년 6월 13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소위 폭동 및 살인· 강도죄로 교수형을 언도받았으며 같은 해 7월 23일 대구공소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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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연 의적비
유시연(1864~1909)은 전남 영암 사람이다. 1909년 7월 30일 의병장 심남일(沈南一)의 휘하에서 후군장에 임명되어 영암군 사촌(沙村)에서 적과 접전하였다. 이때 적군은 금평산(琴平山)이 지휘하는 기병대 50여 명이었다. 유시연은 분전하여 대장 금평산 외에 10여 명을 사살시켰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때는 대장 심남일이 오랜 의병활동으로 득병하였으며 끊임없는 의병 해산 조칙으로 갈등을 겪으며 의병해산을 고려하고 있었을 때였다. 그러한 정황 중에 8월 17일 사촌에 왜적의 잔류부대가 출몰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유시연은 적진에 돌입하여 적병 6명을 사살하고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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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연 유적지
김준연(1895~1971)은 전라남도 영암(靈岩) 사람이다. 한문을 수학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을 졸업하였다. 유학 중에 조선기독교청년회(朝鮮基督敎靑年會)의 부회장을 맡아 활동하면서 1919년 2·8독립선언에 주동적으로 참가하였다. 1919년 11월 여운형(呂運亨)의 도일(渡日) 때에는 신인회(新仁會)를 중심으로 하여 그의 환영회를 조직하고 조선독립을 선전하였다. 귀국하여 동아일보(東亞日報)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6년 12월에 안광천(安光泉)·한위건(韓偉健) 등과 함께 세칭 ML당이라고 부르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재조직하였다. 1927년 2월에는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발기인이 되고 신간회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28년 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있을 때 이른바 ML당 사건이라고 부르는 제3차 공산당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7년 형의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6년 8월에 베를린 올림픽대회의 마라톤 경주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우승하자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우승 사진을 게재하면서 손 선수의 앞가슴에 붙인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리고 실은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게 되자 주필이던 그는 사장 송진우(宋鎭禹)와 함께 사임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의 간부로 그리고 역대 민의원으로 국회에서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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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남 묘
김귀남(이명 김영애, 1904~1990)은 전남 목포(木浦) 사람이다. 1921년 11월 열강(列强)의 대표들이 미국 워싱턴에서 군비감축회의(軍備減縮會議)를 개최하고 만주를 비롯한 원동문제(遠東問題)를 의제로 거론한다는 사실이 보도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서는 이승만(李承晩)·서재필(徐載弼)·정한경(鄭翰景) 등을 대표위원으로 선정하여 워싱턴 군비감축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韓國獨立請願書)를 제출하였다. 1921년 11월 14일 전남 목포의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에 재학 중 위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워싱턴 군비감축회의에서 거론될 한국 독립문제에 대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동교 학생 및 사립영흥학교(私立永興學校) 학생들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1921년 12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제령(制令) 7호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고 공소하였으나, 1922년 3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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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
영암에서는 1919년 3월 11일부터 만세시위가 시작되었으며, 3월 20일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으나 일경의 감시가 심하여 곧 해산당하고 말았다. 이에 읍내에 거주하는 조극환(曺克煥)이 주동이 되어 4월 10일 영암읍 장날을 기해서 학생, 주민들을 동원하여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였다. 4월 10일 오전 9시를 기하여 1천여 명의 만세대열은 회사정(亭)광장에 모여 박규상(朴奎相)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다음 독립만세를 부르며 읍내 중심가를 향하여 일제히 시위에 들어갔다. 이날의 시위로 학생, 유지 등 30여 명이 일경에게 체포되었으며, 그중 20여명이 옥고를 치렀다. 3.1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한 35인의 애국지사의 숭고한 정신을 길이 전하고자 영암군민과 동아일보 후원으로 1984년 4월 이 비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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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항일운동충혼탑
완도군 고금면을 중심으로 1920년부터 1933년까지 항일의병투쟁과 독립운동과정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 일본군에게 참살당하거나 투옥된 애국지사들의 투쟁정신을 후손들에게 길이 계승시키기 위해 충혼탑을 이곳 테마공원에 조성하였다. 1931년경 고금면 일부 사회운동가들은 농민조합 설립에 앞장서고 농민야학 등을 조직하여 농민개화운동이 완도군 일원으로 전파되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총독부의 고금용지포 공유수면매립허가에 대항하기 위해 용지포 옹호동맹을 조직하고, 허가권을 쟁취하고자 투쟁하여 승리함으로써 우리민족이 단결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결과를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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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두 공적비
박병두(1919~1996)는 전남 완도 출생이다. 청운의 꿈을 품고 일본 동양대학에 입학하였으나, 재학 도중 일본군 학병으로 강제 징집되었다. 우리의 국권을 빼앗은 일본을 위해 피흘려 묵숨까지 바치라는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조국 광복을 위해 광복군 제 3지대 징모처에서 정보공작활동 중 조국이 해방되어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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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안항일운동기념관
2003년 10월 20일에 문을 연 소안항일운동기념관은 조국의 독립과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소안의 애국선열들과 그들의 항일투쟁 정신을 역사의 교훈으로 남겨주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일제 통치로 전국이 탄압받던 암흑기에 항일구국의 횃불이 드높았던 소안도는, 독립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고 농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립소안학교를 만들어 후학을 지도하였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많은 선열들이 피를 흘렸으며 이들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소안면민들이 힘을 모아 기념관을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