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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암 집
박호암(1912~1984)은 전남 장흥 사람이다. 1929년 4월 숙부 박노영(朴魯泳)을 찾아 부산에서 상해로 건너갔으며, 이곳에서 강만 중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1934년 봄 중국군관학교 낙양 분교에 입교하여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한국혁명군인회에 참가하였다. 1935년 4월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남경 에서 조직된 조선민족 혁명당에 입당하였으며, 특수공작 임무를 띠고 북경·천진 지구로 파견되었다. 북경에서 오광선(吳光鮮)과 함께 임무를 수행하다가, 1936년 5월 박태양(朴泰陽)·윤여복(尹汝福)·홍종민(洪鍾民) 등 동지들과 함께 천진(天津)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본국으로 압송된 그는 1936년 12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받고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공적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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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흠 묘
정두흠(1832~1910)은 187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에 임명되었고, 곧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전적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887년 사헌부지평이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 것을 청하고, 죄와 상을 분명히 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울 것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종묘대제(宗廟大祭)에 대축관(大祝官)과 전사관(典祀官)으로 차출되었다. 개항에 반대하여 양이(壤夷)의 노선을 주장하였고, 「만언소(萬言疏)」 등을 올려 정치도의를 바로잡을 것, 매관(賣官)의 폐단을 없앨 것, 직언을 받아들여 언로를 개방할 것 등을 촉구하였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용퇴를 결의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910년 전남 장흥군에서 국권 상실 소식을 듣고 자결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운암집(雲巖集)』 4권이 있다. 정부에서는 202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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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흠 유적지
정두흠(1832~1910)은 1879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주서에 임명되었고, 곧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성균관전적을 거쳐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887년 사헌부지평이 되어서는 선정을 베풀 것을 청하고, 죄와 상을 분명히 하여 국가의 기강을 세울 것을 상소하였다. 이듬해 종묘대제(宗廟大祭)에 대축관(大祝官)과 전사관(典祀官)으로 차출되었다. 개항에 반대하여 양이(壤夷)의 노선을 주장하였고, 「만언소(萬言疏)」 등을 올려 정치도의를 바로잡을 것, 매관(賣官)의 폐단을 없앨 것, 직언을 받아들여 언로를 개방할 것 등을 촉구하였다.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용퇴를 결의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1910년 전남 장흥군에서 국권 상실 소식을 듣고 자결 순국하였다. 저서로는 『운암집(雲巖集)』 4권이 있다. 정부에서는 202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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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집(윤동주 유고 보존)
전라남도 광양에 있는 정병욱의 집이다. 이곳은 윤동주 시인의 원고를 해방 후까지 보관하였던 곳이다. <서시>, <별헤는 밤> 등의 시를 발표하며 항일 정신을 고취하였던 윤동주(1917~1945)는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그의 원고를 친우인 정병욱(1922~1982)에게 맡겨 이곳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1944년 1월,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제는 조선인 청년 학도들까지 전쟁터로 내몰았고 이때 군에 징집되는 정병욱은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유고 보존을 부탁하였다. 집의 나무 마루 밑에 원고를 보관하고 다른 물건을 올려두어 원고를 은닉하였다가 마침내 광복 후 1948년 시집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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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집
정율성(1914~1976)은 전라남도 화순군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이다. 부친을 따라 1917년 광주에서 화순으로 이주하였고, 1922년 능주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4년 다시 광주로 이주하면서 숭일소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이듬해 전주 신흥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33년 의열단 호남 지역 모집책인 셋째형 정의은(鄭義恩)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여러 독립운동을 펼쳤고 난징과 상하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첩보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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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종탑
이 종탑은 1919년 4월 4일 강진독립만세 운동의 신호를 알린 독립만세종으로서 2020년 6월 19일 강진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14년 1월 강진읍 남성리 207번지(현, 강남교회)에 세웠던 것을 1964년 현재의 선전을 건축할 때 종탑도 함께 옮겨와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다. 제1차 만세운동은 3월 23일이었으나 밀고로 발각되어 김안식, 김영수, 김윤식, 김현상, 김위균, 김성수, 양경천, 양병우, 김만철, 김영호, 김학수, 김계명 등이 구속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2차는 4월 4일 강진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강진의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이 주동하여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제작하였는데 이를 강진읍교회 최복삼좌와 박영옥 등이 전달받았다. 만세운동 당일, 강진읍교회 타종 소리를 시점으로 기독교인, 천도교인, 농민, 상인, 학생 등 4천명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함성은 하늘은 진동하고 우드봉을 뒤흔드는 성공적인 독립만세운동이었으며, 이기성, 김현본, 황호경, 오승남, 김후식, 김춘석, 오응추, 김제문, 김성수, 박영옥, 강주형, 박일춘, 이은표, 최덕주, 김두현, 차성모, 김재민, 차명진, 전봉진, 김은식, 강주영 등이 구속되고 최복삼 조사는 구타와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강진읍 교회는 매년 4.4 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 때마다 정오가 되면 33번을 타종하여 구국지사들을 투모하고 후손들에게 나라 사랑의 가르침을 일깨워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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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시비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65-25 군립도서관 앞에 위치한 영랑 김윤식 시인의 시비이다. 영랑 김윤식(1902-1950)은 1902년 12월 18일 강진읍 남성리 김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향리에서 보통교육을 마치고 취문의숙을 거쳐 1919년 강진독립만세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그후 일본 청산학원 재학 중 동경재지진으로 귀향하여 박용철, 정지용과 시문학지를 간행하여 한국순수 서정시의 개척자로써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와 같은 불후의 업적을 남겼으며 영랑시집과 영랑시선은 사계의 지표가 되었다. 1948년 한국문총 사무국장과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했고 1950년 9월 29일 당년 49세로 서거하였다. 2018년 정부에서는 김윤식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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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집(영랑생가)
영랑 김윤식(1902-1950)은 1902년 12월 18일 강진읍 남성리 김종호의 장남으로 태어나 향리에서 보통교육을 마치고 취문의숙을 거쳐 1919년 강진독립만세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뤘다. 그후 일본 청산학원 재학 중 동경재지진으로 귀향하여 박용철, 정지용과 시문학지를 간행하여 한국순수 서정시의 개척자로써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시와 같은 불후의 업적을 남겼으며 영랑시집과 영랑시선은 사계의 지표가 되었다. 김윤식은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숨겨서 강진으로 내려왔다. 김현상(金炫庠) 등과 정세를 논의하였다. 이후 3월 23일 밤 김현균의 집에서 김현상을 비롯해 김성수(金晟洙) 등과 함께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하지만 3월 26일 이들의 준비와 계획이 강진경찰서(康津警察署)에 발각되어,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5일 광주지방법원(光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控所)를 제기하였다. 5월 5일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무죄(無罪)’를 선고받았다. 그러자 검사 측에서 다시 상고(上告)를 제기하였다. 6월 9일 서울 고등법원(高等法院)에서 기각되어 무죄가 확정되었다. 이후 1930년대에 「독(毒)을 차고」·「가야금」·「달마지」·「춘향」 등 다수의 민족적인 시(詩)를 발표하여 저항의식을 표출하였다. 2018년 정부에서는 김윤식을 건국포장에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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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릉학교
사립금릉학교(私立金陵學校)는 1906년 강진 유지들의 후원으로 설립되어 1907년 4월 1일 현재 금서당(琴書堂) 자리에서 개교하였고, 1911년 6월 강진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1914년 4월 현재 해남세무서 강진지서(강진읍 남성리 108-2) 위치로 이전하였고, 1923년 4월 1일 현재 강진중앙초등학교 위치(강진읍 평동리 235)로 이전하였다. 개교 당시 강진 군수인 조중관이 교장, 조병균이 교감이었고, 이듬해는 방규석이 잠시 교장을 맡기도 하였다. 설립 직후 학생이 100여 명에 이를 만큼 발전하여 언론에 자주 보도되었다. 특히 1907년에는 전국에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호응하여 금릉학교에서도 국채보상금릉협성회를 조직하고 모금하여 1차로 1백환을 황성신문사에 기탁하였으며, 당시 『황성신문』에 성금을 낸 교사와 학생들의 명단이 실리기도 하였다. 1919년 강진읍 3·1운동 때 김윤식(김영랑)을 비롯한 이 학교 출신들이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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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3.1운동기념비
강진군 강진읍 예당리에 위치한 기념비이다.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강진읍 장날 이기성·오승남(吳承南)·황호경(黃鎬京)·강주형·박영옥(朴英玉)·김춘석(金春錫) 등의 준비로 1천여명이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강주형(姜宙馨, 18871976), 김제문(金濟文, 18881935), 김후식(金厚植, 18961959), 오승남(吳承南, 18991982), 오응추(吳應秋, 18981969), 이기성(李基性, 18941944)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강진 지역 3·1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92년 8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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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4.4독립만세운동터 표지석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4일 강진읍 장날 이기성·오승남(吳承南)·황호경(黃鎬京)·강주형·박영옥(朴英玉)·김춘석(金春錫) 등의 준비로 1천여명이 강진 장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강주형(姜宙馨, 1887~1976), 김제문(金濟文, 1888~1935), 김후식(金厚植, 1896~1959), 오승남(吳承南, 1899~1982), 오응추(吳應秋, 1898~1969), 이기성(李基性, 1894~1944) 등이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를 기록하기 위해서 장터에 표지석을 세웠다. 2010년 3월 5일 영랑 김윤식 선생의 친필을 집자하여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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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응추 기적비
오응추(1898-1969)는 전남 강진(康津) 사람으로 1919년 4월 4일 강진군 강진읍(康津邑) 장터에서 이기성(李基性)·오승남(吳承南)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주민들을 규합, 장터에 모인 1,000여명의 시위군중과 같이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이해 4월 15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長興支廳)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5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5월형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