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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교회 3.1운동만세시위지
목포의 4.8독립만세운동은 양동교회 교인들과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학생 등이 주축을 이뤘다. 양동교회는 목포가 개항했던 1897년에,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는 1903년 미국인 선교사 유진벨(한국명 배유지)이 세웠다. 당시 동경 유학 중이었던 유학생과 상인들을 통해 동경의 2.8 독립선언 소식이 전해지면서 목포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이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이 시기 양동교회 지하실에서 곽우영 장로를 비롯해 서기견, 서상봉, 서화일, 박여성, 강석봉, 양병진, 박복영 등 교인들은 등사판을 이용해 태극기와 격문, 독립신문 등을 만들며 만세운동을 모의했다. 일본경찰과 헌병은 어느 정도 사태를 파악하고 8일 아침부터 삼엄한 경계를 펼친다. 드디어 거사일인 1919년 4월 8일 아침, 양동교회의 종소리에 맞춰 기독교인들은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로, 오재복, 이금득, 박상오는 북교초등학교로 각각 뛰어들었고 거리로 나섰다. 학생들과 양동교회 교인들은 삽시간에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 독립 만세”를 외치고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시가행진에 돌입했다. 시민들도 합세해 이들이 외치는 독립만세 소리가 목포 거리에 울려 퍼졌다. 일본 경찰과 헌병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시위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후 정명여학교는 1921년 만세운동을 다시 펼쳐 많은 학생들이 옥고를 치렀고 1937년에는 영흥학교와 함께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하였다가 광복 후 다시 복교하였다. 양동교회 박연세 목사 역시 일제의 신사참배정책에 항거하다 투옥되어 1944년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목포 만세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학생들과 기독교인, 상인 등이 주도했으며 4월 8일 만세운동 이후 목포의 항일 정신은 일제 강점기 내내 저항과 민족운동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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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만세운동 안내판(정명여학교)
목포정명여학교는 1903년 설립된 호남지역 최초 여성교육기관으로 1919년 전국적으로 펼쳐진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하여 정명여학교의 여학생들이 의로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목포의 만세운동은 광주에서 있었던 만세운동보다 다소 늦긴 했지만 여학생들을 주축으로 발생한 것이 특징이며 만세운동의 주요 발원지는 1919년 4월8일 목포 양동교회와 정명여학교 일대였다. 거사를 준비하기 위해 정명여학교의 교장이었던 김아각(Daniel.j. Cumming) 목사는 광주에서 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사본, 결의문 등이 담긴 봉투를 은밀히 전달받았다. 이후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목포 양동교회 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비밀스럽게 조직적인 만세운동을 준비하여 1919년 4월 8일 만세운동을 거행하였다. 한편 여성독립운동의 산실인 정명여자중고등학교에서는 매해 4.8독립만세운동 재현행사를 하며 그날의 함성은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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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3.1독립운동탑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4월 8일 목포에서 서상봉·강석봉 등이 남궁혁(南宮赫)·오도근(吳道根) 등 청년 학생들과 태극기와 경고문 등을 준비하여 목포 부내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그러자 일제 헌병과 경찰은 기마부대와 군대까지 동원하여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이 시위로 강석봉(姜錫奉, 1890~1956), 박복영(朴福永, 1890~1973), 박상렬(朴相烈, 1897~1981), 배치문(裵致文, 1890~1942), 서상봉(徐相鳳, 1870~1927), 서화일(徐化壹, 1881~1936), 곽우영(郭宇英), 남궁혁, 박상술(朴相述), 박상오(朴相五) 등 80여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그 가운데 박상술은 일제의 고문후유증으로 정신 이상이 되어 이듬해 5월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끝내 순절하였다. 유당산공원화 추진위원회는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983년 5월 15일 공원 내에 이 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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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투사 현창비
전남 무안 출신으로 일제의 폭정을 제거하여 도탄에서 허덕이는 민생을 구하고 일본 등 외세를 물리치고자, 민족자주 평등사회를 건설하려는 제폭구민과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일어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대한침략을 목적으로 반일세력인 동학군을 소탕코자 내침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하신 여섯분(김응문, 김영구, 김덕구, 김효구, 김성권, 김용길)과 일본침략에 항거하였던 의병장 한 분 등 일곱 분의 고귀한 우국정신을 후세에 전하여 애국애족의 귀감으로 삼고자 마을주민과 유족의 뜻을 모아 이 현창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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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응문 장군 일가(김응문, 김효문, 김자문, 김여정) 현창비
전라남도 무안의 김응문 일가(김응문, 김효문, 김자문, 김여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현창비이다. 김응문 일가는 일제의 폭정을 제거하여 도탄에서 허덕이는 민생을 구하고 일본 등 외세를 물리치고자, 민족자주 평등사회를 건설하려는 제폭구민과 척양척왜의 기치를 들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대한침략을 목적으로, 반일세력인 동학군을 소탕코자 내침한 일본군과 싸우다가 순국한 김응문, 김효문, 김자문, 김여정의 고귀한 우국정신을 후세에 전하여 애국애족의 귀감으로 삼고자 마을 주민과 유족의 뜻을 모아 이 현창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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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만 사당(양림사)
기우만(1846~1916)은 한말의 의병장이다. 본관 행주(幸州), 자 회일(會一), 호 송사(松沙)이다. 전라남도 장성(長城)에서 대유학자 기정진의 손자로 태어났다. 1881년(고종 18) 참봉(參奉)의 직분으로 김평묵(金平默) 등과 함께 유생을 이끌고 조정에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로 불리었으며,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弑害)되자 의병을 일으켜 장성·나주 등지 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후 의병활동을 계속하다가 1906년 체포되어 광주(光州)·영광·목포·서울 등지 감옥에서 복역하였으며, 1908년 순천에서 재거사를 꾀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자 해산하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유서로 《송사집(松沙集)》이 있다.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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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운동 무안의적비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 산 4-1 남산공원 내 위치한 이 비는 무안 출신 김한근과 유지 10여명이 장날에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무안의 독립만세운동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던 김한근이 독립만세소식을 전하면서 추진되었고, 지역유지 수십여명은 무안읍 장날인 3월 19일 새벽 읍내 각처에 독립선언서와 경고문을 붙여 친일파의 반성.자숙과 민중들의 궐기를 촉구하였다. 이 날 읍내에 모인 수백의 군중들은 저마다 태극기를 흔들고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밤 10시경까지 만세운동시위를 계속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시위대는 해산되고 중심 인물 24명을 포함한 57명이 체포되었다. 본 비는 무안 만세운동을 기념하며 1975년 8월에 건립되었고, 무안군에서는 그 날의 의의를 되새기고자 매년 3.1절 기념행사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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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유공인사 숭모비
항일독립유공인사 숭모비는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성남리 산 4-13에 건립되어 있는 비다. 일제 침략기에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한 무안군 출신들의 의병활동,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광복군 참여 등을 하신 독립지사 김종성 외 17명의 거룩한 애국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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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전남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은 한말, 일제강점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전라남도 출신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고귀한 넋을 추모하고 그 얼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전라남도 무안군 삼향읍 남악3로 30(중앙동산 또는 대죽도근린공원), 전라남도도립도서관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다. ‘전라남도 항일독립운동기념탑’의 작품명은 ‘독립비상의 꿈’으로, 전남 출신 애국지사들의 진정한 광복을 염원하는 비상의 꿈을 담았다. 특히 날개를 펴고 비상한 새의 형상을 통해 불굴의 독립정신과 미래지향적인 전남 도민들의 희망을 표현하고 있다. 기념탑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각 분야별 독립운동가 7인의 독립열사상과 함께 전남 출신 독립유공자 1천 281명의 명단을 새긴 기억의 열주 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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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추모비
김구(1876~1949)는 황해도 해주목 출신이다.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이후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의 1세대 정치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안창호, 이승만 등과 함께 지도자 출신 중 최순위권에 손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동학 농민 혁명과 교육계몽운동에 참여했고, 1919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직접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 내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 겸 노동국 총판, 국무령, 의정원 의원, 국무위원 겸 내무장, 재무장, 군무장을 거쳐 1940년 임시정부 주석에 선출되었고, 1945년까지 주석을 역임하며 임시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광복 이후에는 본인은 반공주의자였지만 남북 분단과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는 반대하면서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다가 1949년에 서울 경교장에서 반대 세력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최고 명예훈장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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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사(무안집강소)
1890년대 장흥, 보성, 완도 등 전라도 남부 지역에 동학이 전파되었다는 점에서 이 무렵 무안지역에도 동학이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였을 때 이 지역에서는 대접주 배상옥의 지휘 아래 동학농민군이 활동하였다. 1894년 5월 8일 ‘전주화약’ 체결 후 무안지역 동학농민군은 무안으로 돌아와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무안지역은 배상옥이 담당하였는데, 당시 무안의 동학농민 집강소가 설치된 장소는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의 달성배씨 사당인 청천재인 것으로 파악된다. 청천리에서는 배상옥, 배규찬 형제 외에 달성배씨 일족들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배상옥은 전봉준·김개남 등과 함께 동학농민군 주요지도자였지만, 갑오항쟁이 끝난 뒤 일제는 배상옥과 관련된 흔적을 철저히 지웠다. 친일파가 득세한 조선조정은 동학에 가담한 인물들을 배역자로 처단했다. 무안의 동학농민군은 전봉준 장군을 지지하는 핵심세력이었다. 무안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이끌었던 배상옥은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 라 불릴 정도로 동학농민군의 주요지도자였다. 배상옥은 무안대접주였으나 영광과 함평, 무안, 장흥, 해남, 강진, 영암지역의 동학교도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고 전남지역의 전투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무안의 배상옥은 전봉준·김개남 장군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의 중요한 인물이다. 백산봉기부터 참여했으며 갑오년 12월까지 호남농민군들을 지휘했던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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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지도자 삼의사숭모단
무안군 출신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가 순국한 해주최씨 삼의사(최장현, 최선현, 최기현)를 기리는 비이다. 이 삼의사는 형제로서 무능하고 부패했던 벼슬아치들을 응징하고 더 나은 세계를 열기위해 고막포 전투 참전했다가 패한 후 고향에서 숨어 지내다 밀고로 나주 일본군 순사청에 끌려가 1894년 12월 27일 총살되어 순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