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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순 순의비
최우순(1830-1911)은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마을 사람들에게 국사(國史)를 가르쳤다. 1911년 3월, 일본 헌병이 찾아와 은사금(恩賜金)이라 하여 한국의 전국 유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뿌리는 많은 돈을 받을 것을 강요했으나 거부하였으며, 돈을 받지 않으면 연행하겠다고 하자 거짓으로 달래어 잠재워 놓고 조국광복을 기원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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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순 사당(서비정)
서비정은 경남 고성에 있으며, 서비정은 순절 소문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의 유림과 지사들이 공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며, 해마다 향사를 모시어 최우순의 의절을 추모하고 있다. 최우순(1830-1911)은 1910년 8월 경술국치 이후, 마을 사람들에게 국사(國史)를 가르쳤다. 1911년 3월, 일본 헌병이 찾아와 은사금(恩賜金)이라 하여 한국의 전국 유림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뿌리는 많은 돈을 받을 것을 강요했으나 거부하였으며, 돈을 받지 않으면 연행하겠다고 하자 거짓으로 달래어 잠재워 놓고 조국광복을 기원하며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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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순 집
최우순 선생은 조선 말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지금 천지가 바뀌어 종묘사직은 망하고, 머리와 발이 뒤바뀌어 삼천리 강토에 편안히 있을 곳이 없으니 나는 어디로 돌아갈까, 지금부터는 서쪽에서 기거하며 서쪽에서 침식을 하며 서쪽에서 늙어 서쪽에서 죽을 것이다.” 하며 집 동쪽에 일본이 있다고 해서 사립문을 서쪽으로 돌리고, 아호(雅號)를 청사(晴沙)에서 서비(西扉)로 고쳤다. 경술국치를 강행한 일본은 전국의 유림들에게 일왕의 은사금을 주어 회유했으며, 그에게도 은사금을 받으라고 강요했지만 최 선생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자 일본이 헌병을 파견해 연행하려 하자 최우순은 헌병에게 지금은 밤이 깊어 갈 수 없으니 내일 날이 밝으면 갈 것이라고 하고는 그날 밤 스스로 독약을 먹고 순절하였다. 1911년 3월 19일 향년 8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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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낙종 창의비
최낙종(1891-1945)은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성군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독립선언서를 필사하고 태극기를 제작해서 3월 20일 구만면의 국천(菊川) 모래사장에서 군중과 함께 봉기하고 선두에서 행진하였다. 3월 21일 「한인관리 퇴직권고문(韓人官吏退職勸告文)」을 구만면 면사무소에 첨부하고, 각 도·군의 관공서에 발송하였다. 1920년 동경에서 동흥노동동맹(東興勞動同盟)을 창립하고 친일단체인 상애회(相愛會)에 대항하여 1932년까지 투쟁하는 한편, 서상한(徐相漢)·이 혁(李革)·변영우(卞榮宇) 등과 함께 월간잡지 「노동(勞動)」을 발행하여 일본과 국내에 배포하는 등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벌금 40원의 선고를 받았고, 징역 1년 6월형과 벌금 30원도 선고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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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3.1운동창의탑
고종황제 인산때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을 가져온 최정철은 동지와 함께 의거를 논의하여 이종홍이 통문을 짓고 최정원이 이를 몰래 전하여 1919년 3월 20일 국천광장에 수천군중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최정원은 독립선언문, 허재기는 공약삼장을 각각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최정원과 최낙종이 앞서서 군중과 배둔시장을 향하여 시위행진을 하였을때 왜헌은 앞을 막았지만, 최정주는 왜헌을 위압하였고, 이 기회를 틈타 시위군중은 행진하여 배둔에서 대기했던 김갑록, 서찬실, 김동기가 이끄는 군중과 합세하여 종일토록 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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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장서비(연지공원)
파리장서는 3.1독립투쟁에 참여하지 못한 유림측에서 파리 평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려는 독립투쟁의 하나인데, 독립정신을 기리는 파리장서비는 서울 장충단공원 외에 충남 홍성, 대구 달서구, 봉화군, 거창군, 밀양시, 합천군, 고창군, 정읍시 등 총 9기가 건립되어 있다. 파리장서는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김복한(金福漢)을 중심으로, 대부분 의병에 참여하였던 김덕진(金德鎭)·안병찬(安炳瓚)·김봉제(金鳳濟)·임한주(林翰周)·전양진(田穰鎭)·최중식(崔中軾) 등에 의해 이뤄졌다. 서한의 요지는 일본의 배신행위와 명성황후(明成皇后)와 고종의 시해, 그리고 한국주권의 찬탈과정을 폭로하고 한국독립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영남유림에서도 곽종석(郭鍾錫)·김창숙(金昌淑) 등이 필두로 같은 목적의 일이 추진되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선정된 김창숙이 상해(上海)로 출발하였으며, 장서에는 134명 유림대표가 서명하였다. 장서는 김창숙이 파리로 가져가지 못하고, 당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대표로 선정되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金奎植)에게 송달되었으며, 또한 국내 각 향교에도 우송되었다. 그러나 송회근(宋晦根)에 의해 사건이 발각됨으로써 관계자들이 피체되어 옥고를 겪었다.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주변에는 부산김해선 연지공원역이 있으며, 실제로 김해연지공원 내에 위치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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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독립의거 기적비(연지공원)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30일 밤 김해읍 중앙거리에서 몇몇이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고, 3월 31일 장날과 4월 2일 김해읍 장날에도 독립만세 시위가 있었다. 4월 5일 장날에도 3천여명이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하며 일본군 헌병주재소에 몰려갔다. 이러한 독립만세 시위는 4월 10일 명호시장 날날 시위, 11일 진목리 시위, 12일 무계리 시장 시위로 이어져 3천여명이 참여한 무계리 시위 때는 일제 헌병의 무차별 발포로 손명조·김선오·김용이 등이 총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기미독립의거 기적비는 순국하거나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던 이들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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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치문 기적비(연지공원)
배치문(1890-1942)의 이명은 배홍길(裵洪吉)이다.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목포 시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던 중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3년 5월 상해의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석한 후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으며, 다시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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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태 기적비
1919년 4월 12일, 장유면 무계리(長有面茂溪里)의 독립만세운동은 광무황제(光武皇帝)의 국장(國葬)에 참여하기 위하여 상경하였다가, 그곳에서 전개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김종훤(金鍾 )을 중심으로 계획되었다. 김승태(1878-1940)의 이명은 김시여(金時汝)이다. 4월 11일 김종훤·조순규(趙順奎)·이강석(李康奭)·최현호(崔鉉浩)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자기 동리사람들의 동원과 태극기의 제작을 책임, 분담하였다. 4월 12일, 김승태는 선두에 서서 3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무계리 장터로 행진하였다. 일경은 무력행사를 통해 해산시키려 하였지만, 시위군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무차별 사격으로 김선오(金善五) 등 3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그 후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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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읍 3.1만세운동 시위터 표지석(배동석)
배동석(1889-1924)은 1906년 대구계성중학교(大邱啓聖中學校) 재학 중, 배일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목포(木浦)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다시 배일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8년 귀국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 이갑성의 자택에서 음악회를 빙자하여 김원벽(金元璧)·김형기(金炯璣)·윤자영(尹滋瑛)·김문진(金文珍)·한위건(韓偉健) 등 학생 대표들과 만나 해외의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논의하였다. 3월 1일에는 종로(鐘路), 3월 5일에는 남대문역(南大門驛) 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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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석 집
배동석(1889-1924)은 1906년 대구계성중학교(大邱啓聖中學校) 재학중, 배일혐의로 체포되어 3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목포(木浦)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다시 배일혐의로 체포되었으며, 그후 만주(滿洲)로 망명하여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8년 귀국하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던 중, 이갑성의 자택에서 음악회를 빙자하여 김원벽(金元璧)·김형기(金炯璣)·윤자영(尹滋瑛)·김문진(金文珍)·한위건(韓偉健) 등 학생 대표들과 만나 해외의 독립만세운동의 상황을 논의하였다. 3월 1일에는 종로(鐘路), 3월 5일에는 남대문역(南大門驛) 앞에서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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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기미독립의거 표지석
1919년 3월 1일에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의거가 전국으로 퍼져나갈 때 고종의 인산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독립선언서를 옷깃에 숨겨 고향으로 돌아온 김종훤은 4월 11일 김승태, 이강석, 최현호 등 동지와 회합을 갖고 4월 12일에 군중을 동원하여 무계리시장에서 거사하기로 결의하였다. 무계리시장에 모인 3천여 명의 군중이 김승태 등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충돌과정에서 김선오, 손명조, 김용이 세 분은 일본군의 흉탄에 현장에서 순국하셨고, 군중은 해산되고 주동 인물은 검거되어 투옥되었다. 장유기미독립의거 표지석은 경남 김해에 있으며, 김해지역에서 가장 크고 격렬하게 일어난 이 독립의거를 기념하고 선열들의 고귀한 넋과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1967년 세워진 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