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431건
-
주남선 기념관
일명 주남고(朱南皐). 경상남도 거창 출신.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909년 친구인 오형선(吳亨善)·조재룡(曺在龍)과 함께 기독교인이 되어 거창읍교회를 설립하였다. 1919년 진주 경남성경학원을 졸업한 뒤 거창읍교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같은 해 3월 20일 만세시위를 벌였다. 1919년 12월 거창읍교회 장로로 장립되었고 경남노회의 추천으로 1920년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거창 지방 독립운동 사실이 발각되어 옥고를 치른 뒤, 즉시 신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까닭에 1930년 3월에야 졸업하게 되었다. 그 해에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거창읍교회 목사로 부임하여 이후 평생을 거창읍교회에서 목회하였다. 1938년 신사참배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반대하는 신앙노선을 뚜렷이 보였다. 거창을 중심으로 경남교회의 불참배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다가 1940년 7월 검속을 당하였다. 옥중에서 종래의 남고라는 이름을 남선(南善)으로 바꾸었다. 8·15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석방된 뒤, 이기선·한상동 목사 등과 함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1개월 가량 부흥집회를 개최하면서 한국교회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같은 해 9월 거창으로 돌아와 11월 제47회 경남 노회장에 피선되었다. 그 뒤, 옥중에서 한상동 목사와 논의한 바 있었던 한국교회재건방침의 하나인 신학교 설립을 구체화, 1946년 9월 고려신학교가 정식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같은 해 12월 경남노회에서 일제시대 경남교구장이었던 김길장(金吉長) 목사가 노회장이 되고 주남선·한상동을 중심으로 한 교회재건운동에 제동이 걸리면서 고려신학교 인정 취소라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고려신학교 측은 노회를 탈퇴하여 경남법통노회를 조직함으로써 고려파라는 별개의 교단설립이 이루어졌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
백초월 대선사 순국비
백초월(白初月)은 1876년 경상남도 고성에서 태어났다. 지리산 영원사로 출가하여 스님이 된 그는 해인사에서 공부하였고, 30대 초반에 범어사, 해인사의 강사가 되었다.3.1운동이 일어난 직후 그는 진관사를 거점으로 불교계 민족대표인 한용운, 백용성을 대신해 불교의 독립운동을 진두지휘하였다. 전국 불교도 독립운동의 본부인 민단본부의 책임자인 그는 상해임시정부 및 만주 독립군에 청년학승을 파견하고 군자금을 제공하였다.백초월은 화엄경의 일심(一心) 사상으로 독립운동을 하는 일심교(一心敎)를 만들고, 동학사.월정사.봉원사 강사를 역임하면서 항일결사체인 일심회를 전국적인 조직체로 가동하였다. 1939년 10월, 용산역에서 만주로 가는 일제의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을 쓴 사건을 주도했다. 이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청주교도소에 수감 중, 고문의 후유증으로 1944년 6월 옥중 순국하였다. 국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으로 기려 1990 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백초월의 후손과 고성군민들의 정성으로 1991년 순국비를 건립하였다.
-
윤세주 집 터
윤세주(1901-1942)는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밀양에서 대규모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독립신문 밀양지국을 운영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만주로 망명하여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서 신흥(新興)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훈련을 받았다.1919년 11월 9일에 길림성(吉林省) 파호문(巴虎門) 밖의 화성여관(華盛旅館)에서 김원봉, 황상규, 곽재기 등과 의열단(義烈團)을 조직하고 무장항일투쟁을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 제1차 목표로 일제 핵심 인물 암살과,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등 주요 기관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연말 경 국내에 특파되었다. 그러나 부산과 밀양에 반입된 폭탄과 무기 등이 일경에게 발각되어, 선언문 등과 함께 압수되었으며, 이에 윤세주는 동지들과 같이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 형을 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민족문화사업에 참가하여 표면적으로는 중외(中外)일보 기자와 경남 주식회사 사장으로 일하다가 1932년 다시 남경(南京)으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조선민족혁명당 간부학교를 제1기생으로 수료하고, 정치철학 교관으로 근무하였으며, 1934년 3월에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결성을 위한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독립운동 전선의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35년 4월에는 낙양(洛陽)군관학교를 졸업한 군사 간부들에게 사회과학을 교육하는 교관으로도 활약하였다.1936년 8월 민족혁명당이 창립되자 그는 중앙집행위원과 중앙상무위원 등으로 선출되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38년 10월 중국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조직되자, 그는 한문반 주편위원(韓文班主編委員)에 임명되어 기관지 「전고(戰鼓)」를 편찬 발행하였다. 1942년 5월 태항산(太行山)에서 마전반격전(麻田反擊戰)에 참전하였다가 동년 6월에 전사하여 중국 태항산에 안장되었다. 이후 1950년에 중국 한단시 진기로예 국가열사능원으로 묘가 이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선열의 불꽃(밀양독립기념관 외곽 조형물)
선열의 불꽃 및 흉상은 밀양독립운동기념관 외곽에 설치된 조형물이다. 밀양독립운동기념관은 2008년 6월 20일 개관한 시설이며 전국에서 세번째로 건립된 독립운동기념관이다. 조형물은 중앙에 놓인 선열의 불꽃탑을 중심으로 밀양출신 독립지사 36분의 흉상이 둥글게 둘러싼 모습인데 선열들의 '조국해방에 대한 염원'을 담아 조성한 것이다. 흉상에 새겨진 애국지사들은 정부로부터 서훈을 받은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 중 애족장 이상의 서훈자 서른여덟 분 중 서른네분(손경헌,손봉현,오학성,백운하 제외)과 밀양 독립운동의 선구자 을강 전홍표, 그리고 약산 김원봉을 포함한 서른 여섯 분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36분의 존함은 가나다 순으로 강인수선생, 고인덕선생, 김대지선생, 김명규선생, 김병환선생, 김상윤선생, 김성두선생, 김성수선생, 김영복선생, 김원봉선생, 김홍규선생, 권잠술선생, 박지원선생, 손일민선생, 손호선생, 손봉현선생, 신석원선생, 윤창선선생, 이상관선생 ,윤세복선생, 윤세용선생, 윤세주선생, 윤치형선생, 이병철선생, 이언권선생, 이찰수선생, 임굉(임병찬)선생, 전홍표선생, 조우식선생, 최수봉선생, 한봉근선생, 한봉삼선생, 한봉인선생, 홍재문선생, 황문익선생, 황상규선생이시다.
-
이문기 추모비
성암 이문기(省庵 李文基)는 구한말의 국운 쇠잔기에 출생하여 포악한 왜제의 식민통치와 8.15 해방 후의 극심한 혼란과 6.25 사변의 동족상잔 및 5.16 군사정권의 전제를 두루 겪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도 시종일관하여 어린 학도들에게 민족정기를 일깨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중흥은 교육이 그 관건임을 자각하여 경남도립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한 후 1925년 단성보통학교 훈도로서 사도 외길의 첫 출발을 하였다. 이후 가야보통학교를 거쳐 1927년에 모교인 함안보통학교로 전근하신 후 8.15 해방때까지 후배 제자들에게 민족의 언어와 역사를 통해 은연중에 민족정신을 고취하셨다. 1967년 3월 23일 과로로 인해 향년 63세로 집무실에서 순직하였다. 해당 비석은 이문기 선생의 후배와 문생들이 뜻을 모아 모교가 보이는 곳에 이문기 선생을 기리는 비석을 세운 것이다.
-
삼진 팔의사 묘역
삼진 팔의사 묘는 삼진의거 당시 현장에서 순국한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김영환, 고양주(고묘주), 이기봉, 김호현, 홍두익 8명의 의사의 묘소가 있는 묘역이다. 삼진의거는 두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3월 28일 진동 고현 장터 1차 의거는 삼진 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은 변상태(卞相泰)를 비롯해 권영조(權寧祚)·권영대(權寧大)·변상섭(卞相攝) 등의 주도로 1919년 3월 28일 진동면 고현리 장날에 전개됐다. 3월 28일 진동면 고현 장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자 백승학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권영대(權寧大)의 독립 만세 선창으로 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고현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한 군중들은 500~600여 명으로, 함께 대한 독립을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진동면으로 향했다. 소식을 접한 일본 헌병대는 무력으로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이날 시위에서는 11명이 검거되고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2차 의거가 준비됐다. 변상태·권태용(權泰容)·권영대·변상헌(卞相憲) 등은 다시 동지들을 규합해 거사를 계획했다. 이들은 거사일을 4월 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참가자 규합에 착수했다.4·3삼진의거에서는 변상태의 계획에 따라 양촌리 냇가 둑에 세워진 대형 태극기 아래로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변상섭(卞相燮)이 만세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돌입했다. 이들은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진동리로 행진했으며, 거리에 대기하던 군중이 계속 합류해 그 숫자가 5000여 명으로 불어났다. 시위 행렬은 진북면 사동리의 다리 앞에 이르러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제 헌병과 충돌했다. 진동 헌병 주재소는 마산 육군 중포병 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무장 헌병과 헌병 보조원 및 일본인 재향 군인 30여 명을 사동교 건너편에 배치하고, 시위대가 접근하자 총칼로 무자비한 진압을 단행했다. 그 결과 김수동(金守東)·변갑섭(卞甲燮)·변상복(卞相福)·김영환(金永煥)·고앙주(高昻柱)·이기봉(李基鳳)·김호현(金浩鉉)·홍두익(洪斗益) 등 8명이 현장에서 순국했고, 22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검거돼 감옥에 투옥됐다. 이날의 시위는 1차 의거에 비해 훨씬 계획적이었지만 조직적이고 적극적인 시위였던 만큼 희생이 컸다.
-
이중건 행적비
이중건(李重乾. 생몰년도 미상)의 호는 백헌(白軒)이며, 1910년 11월 오봉 이연건과 함께 강마 서당 터에 동명 학교(東明學校)를 설립하였다. 본래 학교 이름은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에서 비롯되었다고 추측되는데, 교실 6동을 건립한 후 1913년에 개교하였다. 담당 교사들은 이연건과 이중건의 지인으로 구성되었고, 학교 설립 취지에 부합하여 모두가 민족의식이 투철하였다. 동명 학교는 1919년 3월 19일에 열린 함안읍 만세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함안읍 만세 운동 당시 사용된 태극기와 「독립 선언서」는 동명 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손수 제작하였다.
-
양산 시립독립기념관
양산 지역에서는 1919년 3·1운동 이후 본격적인 항일 독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양산 지역에서는 인근의 밀양이나 울산 지역에서처럼 3·1운동을 주동적으로 이끈 비밀단체의 존재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나,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동한 윤현태의 영향을 받은 지인과 후배들의 조직체 결성과 이 조직을 주축으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9년 3·1운동 이후 양산 지역에서의 항일 독립 운동은 청년운동·소년운동·여성운동·농민운동·학생운동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양산 시립독립기념관은 양산의 독립운동사를 알리고 자주독립의 정신을 미래세대에 전승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역사기억공간이다.
-
의령 입산리 만세공원(기미년 만세공원)
의령 입산리 만세공원(기미년만세공원)은 창남학교가 있던 곳이자, 1919년 3월 19일에 인근의 십여 곳 마을주민들이 모여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던 장소이다. 안희제는 1919년 기미년 3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고향인 입산마을에도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먼저 집안 조카인 안준상에게 기미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게 하고, 세부 계획은 안준상의 맏형인 안경상에게 맡겼다. 백산의 뜻을 전해 들은 안경상은 마을 원로들과 청장년 대표를 고산재로 불러들여 3.1만세운동에 관해 설명하고 마을별로 동원책을 정하였다. 만세운동의 집결지는 백산 선생이 설립한 창남학교(상로재에서 현 위치 만세공원으로 이전) 교정으로 정하고, 일본 경찰의 출동에 대비해 신반에서 입산마을까지 일정한 거리에 나무꾼으로 위장한 연락책을 두고 신호를 통해 상황 전달이 되게끔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1919년 3월 19일, 창남학교 교정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인 가운데 안경상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천지를 뒤흔들었다.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이곳 지역민들의 나라 사랑 정신이 깃든 유서 깊은 곳이다. 본 만세운동은 창남학교의 운동장에서 일어났는데, 창남학교 또한 위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안희제가 1908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는 안효제, 안석제 등과 함께 이곳에서 교육활동을 펼치며 애국혼을 발휘하고 문명개화를 이끌 인재를 양성하였다.
-
안창제 묘
안창제(1866~1931)는 경남 의령(宜領) 사람이다. 안효제(安孝濟)의 서제(庶弟)이다. 1894년 갑오경장의 조서가 내려가자 갑오토역(甲午討逆) 상소를 올리고 금부옥(禁府獄)에 감금당했으며, 1905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3도유생을 대표하는 유약소원(儒約所員)으로 연이어 3번이나 소(疎)를 올려, 오적을 참하기를 청하였으나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이 강점되자 광복의 큰 뜻을 품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 박장호(朴長浩)와 협력하여 결사대를 파견하여 일경과 밀정을 다수 사살하였다. 1919년에는 중국측에서 조직한 전국유교연맹 동삼성(東三省)학회 분회장을 역임하였으며, 1931년 8월 13일 만보산(萬寶山) 사건으로 일가족이 장학량(張學良)의 패잔병에게 총살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상로재(창남학교)
입산마을은 1600년부터 이어진 탐진 안씨의 집성촌이다. 상로재는 원래 탐진안씨 선조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재실로 1722년 창건 후 수차례 보수를 거쳐 1922년 중창되었다. 상로재는 1908년 백산 안희제 선생이 창남학교를 설립하여 문명개화를 이끌 인재를 양성한 곳이며, 독립운동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역사성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3호로 지정되었다. 상로재(霜露齋)는 '서리가 내리면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군자의 도리에 따라 조상께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상로재의 구조는 일반적인 화려한 고택이 아니라 소박하고 작은 고택이다. 대문채인 이필문의 솟을 대문에 들어서면 마당 같이 널찍한 터가 있으며 다시 좌측으로는 상로재로 드는 협문이 자그마하게 있다. 안희제(1885~1943)는 경상남도 의령(宜寧)군 부림(富林)면 입산(立山)리에서 태어났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에 동래의 구포(龜浦)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 南學校)를 설립하고 애국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등 8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았으며 당원들은 일제강점말기까지 안희제의 조직에 다수가 참가하여 끝까지 애국 동지로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가 3 1운동 직후 이를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상업기관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기관이 되어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조달하는 기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에 서울에서 3 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의령에서 독립선언서를 등사시켜 각지에 배포하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애국적 청년학생들을 외국에까지 유학시켰으며, 기미육영회의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7년에는 이시목(李時穆) 등 동지들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에는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신앙하는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국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매우 많았는데,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천수백일 갈이(千數百日耕) 넓이의 농토를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유랑하고 있는 한국농민 300여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 주고, 5개년 연부상환조건으로 자작농의 창설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농민의 자제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1942년 11월에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이 사건이 대종교에서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는데, 이를 순국십현(殉國十賢) 또는 임오십현(壬午十賢)이라고 하며, 안희제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안희제는 일제에게 체포되어 대종교의 독립운동에 대한 장기조사를 받다가 잔혹한 고문으로 1943년 8월에 옥사(獄死)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극로 집
이극로(1893~1978)는 일제강점기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 한글맞춤법 제정위원이자,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등을 역임한 학자, 국어학자, 정치인이다. 1920년 중국 상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마치고 1927년 독일 베를린대학 철학부를 졸업하였다. 1929년 『조선어사전』(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편찬 집행위원,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검거되어 징역 6년을 선고받고 함흥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