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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종의 투쟁실록 추기비
곽종의(1879-1960) 선생은 해남공 청백리 곽안방 선생의 16대손이고 강릉부사 죽재공 곽간 선생의 12대손이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이셨던 충익공 망우당 곽재우 장군의 11대 종손이다. 포산 곽씨 세거지인 고령군 우곡면 답곡동에서 곽동곤씨의 장남으로 태어나셨다. 아호는 졸와이고 휘는 종의이며 자는 성강이다. 곽종의 지사는 고령군에서 나고 자라 청소년, 장년기를 모두 일제 치하에서 보냈다. 한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경무년에 국치를 당하자 초야에 은둔 항일운동을 한 정신적 지도자로서 원근 주민의 추앙을 받았다. 일제 대정(大正, 다이쇼, 당시 일본 천황의 연호였다.)을 가살(可殺: 카코로시, 또는 카사츠, 살인을 한다는 의미)이라 부른다는 풍문이 있다고 발설하였는데, 그러한 유언비어를 지사가 조작하였다고 하여 고령 경찰서에서 2주간 구류 처분을 받은 바 있다. 일제 총독부가 담배에 대한 생산과 경작을 독점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동민이 경작한 담배를 선친이신 동곤씨와 같이 한 자리에 쌓아놓고 불태워버리고 담뱃대를 즉석에서 꺾어버리고 그날부터 단연을 하고 일제 시책에 항거하였다고 한다. 또 전매청 직원이 밀조주를 단속하기 위하여 신발을 신은 집 안까지 들어와 뒤지자 화가 난 마을 청년들과 함께 이들을 마구 두들겨 도망치게 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 때에 고령경찰서에 구속되었다. 이 사건도 지사가 배후 조종자라고 하여 수십일동안을 고령경찰서에 감금하였다. 또 담당 면직원이 보리 공출을 나와서 연장자께 고압적인 태도와 불손한 말투로 억압하는 것에 화가 난 조카 곽태철이 동면직원을 두들겨 준 일이 있었다. 이 때 고령경찰서는 마을을 모두 포위하여 곽종의 지사와 지사의 아들, 곽태진 선생, 그리고 조카 곽태철 선생을 비롯한 곽씨 일문이 모두 항일가문이라 하여 수십명을 경찰서에 강제 연행 수십일 동안 구류 처분을 하고 조카 태철을 대구지방검찰청에 송치 6개월 징역을 받게 하였다. 또 지사는 일제에 세금 불납 등으로 일본 정치에 반대하였고 한편으로 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착취에 반대하여 낙동강 우곡면 소작농민조합을 결성하여 그 위원장에 선출되어 약하고 불쌍한 농민들을 위하여 항거하여 싸웠다. 일제는 늘 곽종의 지사를 시찰이 필요한 사람으로 분류하여 감시하고 체포하는 일이 잦았는데 아들 곽태진 선생이 호의단을 조직하여 항일무장봉기를 계획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자 부자가 함께 항일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고령경찰서에 연행되어 수십일 동안 취조를 당하였다. 이 때 古川(후루카와) 서장이 직접 면담을 하였는데, 미국과 일본이 전쟁 중인데 어느 나라가 이겨야 좋겠느냐고 물었고 지사가 어느 나라이건 조선 독립에 도움이 되는 나라가 이기면 좋겠다고 대답하자 서장이 화가 나 석방시키지 않고 구류해버린다. 이후 종전이 된 후에 석방되었으며 부자가 서로 뜻을 이루고 반갑게 극적으로 상봉하였다고 한다. 고령군 우곡면 답곡리에 있는 졸와 곽종의 선생 투쟁실로 추기비는 선생의 이러한 항일투쟁 정신을 기록하고 기리는 의미에서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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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코 후미코 묘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박문자, 1903~1926)는 독립운동가 박열의 아내이자 옛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현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출신의 무정부주의자이자 독립운동가이다. 1903년 카나가와 현 요코하마시에서 태어났다. 9살 때 외할아버지에게 입적되었고, 친할머니가 있는 충청북도 청원군 고모집에서 살았고 1912년부터 1918년까지 부강공립심상소학교[현 부강초등학교]에 다녔다. 가네코 후미코는 1919년 3·1만세 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감격하였다고 전해지며 1920년 도쿄에서 사회주의자와 교류하고 박열과 동거하며 아나키스트 활동을 하였다. 이후 1922년 5월에서 1923년 3월까지 일본의 동경(東京)에서 박열(朴烈)과 함께 흑도회(黑濤會)의 기관지 『흑도(黑濤)』, 흑우회(黑友會)의 기관지 『태(太)ィ선인(鮮人)』·『현사회(現社會)』를 간행하여 무정부주의의 선전과 회원 규합에 노력하였다. 1923년 4월부터는 박열이 주도한 무정부주의 단체 ‘불령사(不逞社)’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같은 해 9월 3일 동경 대지진(大地震) 직후 체포되었다. 1924년 2월 15일 박열의 ‘대역사건(大逆事件)’으로 기소되어 1926년 3월 25일 사형이 선고되었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1926년 7월 23일 우쓰노미야형무소 도치기지소[우도궁형무소 회목지소(宇都宮刑務所栃木支所)]에 수감 중에 순국(殉國)하였다. 정부는 가네코 후미코의 공적을 기리어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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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천도교 영남거점 기도처
1919년 3월 1일부터 우리 민족은 일제로부터 항거하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전국에서 만세운동시위를 벌였다.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 중 하나로 활약하게 되는 손병희는 천도교의 3대 교조였는데, 그의 지시로 전국 9곳의 지역에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광복 특별기도가 이루어졌다. 경주교구에서는 1919년 1월 8일부터 2월 25일까지 49일간, 영남지역 천도교 대표 4인(진주 신용구, 경주 박인환, 언양 곽해진, 영천 이종원)을 중심으로 독립 선언식을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당시 경주교구는 최시형의 집인 228-1번지 건물과 경주교구인 229번지 건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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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부조벽
3.1운동 부조벽은 1919년 4월 6일에 우곡면사무소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기록한 사적이다. 야정동(野亭洞)에 사는 박재필과 도진동(桃津洞)의 박영화(朴英華)가 주모하여 고령에서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박차천(朴且千)을 시켜 동네를 돌며 동민들의 참여를 독려하였고 마을 주민들은 이에 호응하여 곧바로 강변에 모였다. 1919년 4월 6일 밤 11시경 주민 30여 명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여 마을을 일주한 뒤, 우곡면사무소 앞으로 몰려가 독립의 의지를 전달하였다. 자정을 넘겨 시위가 계속되자 면장이 나와 이들의 해산을 간청하였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 경찰은 주동 인물 박재필과 박영화를 비롯하여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체포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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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수 묘
유동수(1898~1983)는 경상북도 안동(安東) 사람이다. 1919년 3월 21일 임동면 중평동 편항(臨東面中平洞鞭巷)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15일 유연성(柳淵成)·유동수(柳東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박재식(朴載植)·유교희(柳敎熙)·박진선(朴晋先)·유곡란(柳谷蘭) 등이 편항 장터 동편에 있는 공동 타작장에 모여 거사에 대하여 의논함으로써 계획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편항 장날인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군중의 동원을 분담하는 등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는 이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찬성하여 3월 21일 오후 2시, 편항 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이곳 주재소에서 2명의 경찰이 출동하여 주동자인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체포하려 하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일경들에게 달려들어 주재소로 쫓아버렸다. 그리고 그가 시위군중과 함께 편항주재소로 달려가 시위를 전개할 때, 사태의 위급함을 느낀 일본 경찰 내전(內田)이 공포를 발사하자, 그는 분노한 군중과 함께 주재소의 유리창·책상·의자를 파괴하고 서류를 파기하였다. 또 일본 경찰로부터 빼앗은 대검과 소내에 비치되어 있던 장총·칼·탄환·제복 등을 거두어 그곳 우물안에 버렸다. 이때 2명의 일본경찰이 신덕리(新德里) 방향으로 도망하자, 이를 추격하여 1명을 도중에서 붙잡아 구타하였다. 신덕리로 도망한 일본 경찰은 그곳 주재소에 이르러 위급한 상황을 전하고 안동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그후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경찰관의 사택도 습격하여 완전히 파괴하였는데, 경찰 가족들은 모두 피신하고 없었다. 오후 5시, 그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류를 파기하였다. 자정부터는 파괴해 버린 주재소의 판자로 모닥불을 피워가며 이튿날 새벽 3시까지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자진 해산하였다. 한편 급보를 받은 안동경찰서에서는 오전 5시, 순사부장 1명과 일본군 하사 이하 8명을 파견하여 대대적인 검거 작업을 펼쳤다. 결국 그는 이때에 체포되었으며, 이해 5월 31일 대구(大邱)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건조물 손괴·가택 침입·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출옥 후에는 상해 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요인인 유 림(柳林)의 지시에 따라 군자금 모금에 앞장섰으며, 향리에서 후진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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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연 묘
류시연(1874~1914)은 1896년부터 1914년 42세에 순국할 때까지 약 18년 동안 의병 항쟁을 펼쳤다. 그는 어렸을 때 마을에 있는 대평학숙(大坪學塾)에서 류연각(柳淵覺)에게 한문을 배웠다. 그리고 용맹하면서도 병서(兵書) 읽기를 좋아하였으며, 어떤 일에 있어서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매사 과감하게 결단하였다. 류시연이 의병 항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1896년부터였다. 그는 약관인 24세의 나이로 안동의진의 소모장과 선봉장 직책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전국적으로 의병 항쟁이 일어나자 의진을 창의하였다. 류시연은 1906년 봄부터 1908년 여름까지 안동을 중심으로 한 봉화·예안·청송·영양 등 인근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이 기간 동안 류시연은 예안분파소를 점령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지속적인 교전을 통해 일본군 수비대에게 타격을 입혔다. 특히 군대 해산 이후 일제의 의병 토벌 작전이 강화되었을 때에는 신돌석(申乭石)·김성운(金成雲) 등과 연합하여 1908년 2월 영양 일월산에서 항쟁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류시연은 1908년 2월 일월산 항쟁 이후 의진을 해산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리고 1912년 군자금 및 무기 구입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내에 들어왔다가 1913년 8월 영주시 문수면 소재지인 반구시장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해 11월 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14년 1월 29일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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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수 집
한재수(1912~미상)는 경북 성주 출신으로, 이명은 한지성이다. 그는 1931년 대구상고를 졸업한 뒤, 바로 양친에게 독립운동의 뜻을 밝히고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국민당의 인재양성 학교인 중앙정치학교에서 4년 수학하고, 1938년에 약산 김원봉이 의열단을 해산하고 만든 조선의용대에 합류해 정치조 선전주임과 외교주임 등을 지냈다. 1942년에는 김원봉 등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 경상도 지역 의원으로 선출됐다. 1943년 8월부터는 2년간 한국광복군에서 영국군 요청으로 인도와 미얀마 대일 전선에 파견한 인면전구공작대(대원 9명) 대장으로 활약했다. 영국군을 도와 일본군에 대한 대적선전·포로심문·문건번역 등과 같은 작전을 펼친 이 공작대는 광복군이 연합군과 함께 대일 군사작전을 펼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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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상징조형물
경상북도독립기념관 내에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상징조형물 밖에도 다양한 시설이 함께 위치해 있다. 2002년에 안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로 발기하여 2007년 개관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의 설립 목적은 경북독립운동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 조사‧연구, 전시, 교육함으로써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켜온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문화의 정체성 확립 및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설립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안동은 유교문화권의 핵심지역으로 선비정신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곳이며, 퇴계 학맥의 정통을 계승한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수 많은 유학자들이 국난 극복을 위해 노력한 결과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 및 자정순국자를 배출한 곳이다. 살아있는 유교문화와 경상북도 독립운동 역사를 교육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배우는 21세기 국민정신의 교육장으로 발돋움하고자 안동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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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의성경찰서
이곳은 일제강점기 의성경찰서가 있었던 곳이다. 3.1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의성농우회를 조직하여 농촌 계몽 운동으로 민족 독립의 방안을 모색한 농촌 계몽가 등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은 의성경찰서에서 갖은 고문과 수난을 당하였다.특히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평양에서 의성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끝까지 일제에 저항했던 주기철 목사, 의성 춘산면 지역 목회 중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순교한 권중하 전도사 등이 이곳에서 박해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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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공적비
1944년 7월 15일 밤 자인면 원방보에서 안창률, 김명돌, 성상용, 송수답 등 29인이 모여 돌이 많고 산세가 험한 대왕산에 진지를 구축하고 신축 중에 있는 남산 주재소를 습격하는 것을 일차 목표로 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7월25일 밤 축장으로 전원 무장하고 대왕산에 집결하여 26일 아침 안병률의 선창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7월 26일 무장한 일경 30명을 돌과 죽창으로 맞서 물리쳤고 8월 5일에도 일경 30명을 격퇴하였으나 보급이 끊기고 식량이 바닥나 8월 10일에서 13일 사이에 전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으나 안창률, 김경화 선생은 옥중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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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운동기념탑
일본의 36년간 억압과 식민지 생활에서 나라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희생하신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님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국가관과 애국정신을 심어주기 위하야 2021년 5월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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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대왕산 죽창의거 전적지비
일제가 우리 고유문화와 정신을 말살하고 최후의 발악적인 식민지 정책기 자행되던 1944년 6월 민족의 차별과 일제 압정을 성토하고 징병, 징용을 거부하며 조국독립운도을 위해 일제에 항거키로 결의했다. 본 항일운동은 남산면 거주 안창률등 29명의 청년들이 대왕산에서 1944년 7월 25일 부터 8월 13일까지 20여일이상 죽창으로 일제의 총칼및 비행기에 대항하면서 대왕산정상에 돌로 성을 쌓고 막사를 지어 진지를 구축하고 3개 소대와 특공대, 정보연락대등 결심대를 편성하여 3차례에 걸친 격전을 치르는 중 식량조달차 하산하였다가 전원이 체포되어 경산경찰서에서 50여일의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대구 형무소로 수감되어 보안법, 육해공 형법위반, 치안유지특별법위반등의 죄명으로 옥고를 치르다가 8.15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이 되었으나 안창율, 김경하 지사는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