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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정사
대원정사는 원래 금성면 하신리 온양 이씨 어필각(溫陽李氏 御筆閣) 인근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현재의 위치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옮겨졌다가 1982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주춧돌의 모양이나 재질로 보아 창건 당시의 것이 아니고 옮겨 지을 때 기둥 아래 부분의 부패 방지를 위하여 교환한 것으로 추정된다.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은 하나의 칸으로 되어 있으며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뒤쪽 중앙에 불단을 만들고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이 불상은 신음산 국사봉 아래에 있는 신안사에서 옮긴 것이라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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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식 순절지비
홍범식(1871 - 1910)은 충청북도 괴산(槐山)에서 태어났다. 1888년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인군수(泰仁郡守)가 되었다. 1909년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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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순 비
송병순(1839 - 1912)의 호는 심석재이며,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동생이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그 후 1912년 유서를 남기고 음독 자결하셨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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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기념비(남산)
3.1독립의거 기념비는 충청남도 금산군 남산공원에 위치해있다. 3·1독립운동이 한창 전국으로 확산되어 가던 1919년 3월 23일 금산 읍내 장날 김용술(金用述)·임승환(任勝煥)·김종구 등이 금산청년 대표자 명의로 격문을 만들어 배포하여 수천명이 우시장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하고, 그 다음 장날인 3월 28일에도 상점들이 철시한 가운데 수백명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 시위를 하였다. 이 시위로 구호열(具鎬烈, 1899~1940), 김일남(金一南, 1888~1950), 김종구(金鍾九), 김학술(金學述, 1897~1932), 변희조(卞熺朝, 1895~1943) 등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금산군 3·1독립의거기념비건립위원회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1979년 12월 20일 이 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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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태용 기의비
양태용(1879 - 1937)은 충남 금산 사람이다. 1910년 9월 15일 경술국치(庚戌國恥)를 개탄하며 단검으로 할복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응급처치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911년 9월 1일 일본정부에 독립촉구선언문(獨立促求宣言文)을 보냈고, 9월 9일에는 만국공사관(萬國公使館)에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를 발송하였으며 이듬해 10월 또 다시 일본정부에 침략에 대한 항의각서를 발송하였다. 뿐만 아니라 1913년 1월 9일에는 조선총독부 총독에게 일제를 비난하는 문서를 발송하는 한편 납세거부·불입적 운동 등을 전개하여 동포들에게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헌병에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고 귀가하여 이후 고문의 여독으로 고통스러워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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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영 위혼비
김태영(1924 - 1945)는 창씨명으로 금전태영(金田泰碤)을 사용하였다. 일제의 강제 징용으로 남태평양의 오리마이제도(諸島)에 끌려가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노동하던 1942년 귀국하였으며, 1943년 일제의 식량 공출에 격분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다. 1944년 3∼6월 자신과 김수동(金水同)의 집에서 동지들과 13차례에 걸친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안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우선 일경과 식량 공출 담당직원을 처단하고 철로에 멍석을 깔아 일본군병력 수송열차를 전복시킬 계획을 세웠다. 또한 벽보를 써붙여 동포들의 항일독립의식을 고취시키기로 하였다. 이와 더불어 만주의 독립군과 연락, 독립전쟁을 펴기 위하여 자신들이 일본군에 입대한 후 전선(戰線)에서 일본군을 반격하는 방안을 세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다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1944년 7월 일경에 붙잡혔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1945년 5월 23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육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7월 20일 고문의 여독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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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철 추모비
송철(1896 - 1986)의 이명으로는 송휘규가 있다. 전주 신흥학교와 군사 영명학교를 졸업하고신흥학교에서 수학, 물리학을 가르쳤다. 1916년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에는 U.C.L.A, 버클리대학 등에서 전기수력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대한인동지회(大韓人同志會)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펼쳐 나갔다. 특히 1929년 여름에는 뉴욕·시카고·로스앤젤레스·몬타나·오레곤 등지의 5개 지부 대표가 로스앤젤레스에서 회합,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北美總會)를 결성할 때, 이살음·임병직(林炳稷) 등과 같이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참석하였다. 북미총회에서는 재정 분야를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총회장을 역임하는 등 북미총회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1943년 대한인동지회 북미총회 회관을 마련하는데 중추역할을 맡았다. 한편 1941년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토의 결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결성되고 호놀룰루에는 위원회의 의사부(議事部)가, 로스앤젤레스에는 집행부(執行部)가 각각 구성될 때, 그는 집행부의 위원(총 14명)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경위군(警衛軍, 일명 猛虎軍)을 조직하였을 때 재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경위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인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인가까지 받아 독립운동에 기여하기 위해 편성되었던 것이다. 비록 미군의 지휘를 받는 미국내의 군대였지만, 이 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전쟁에서 해외 한인 의용군의 기간부대가 되어 즉시 출동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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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추모비(남산)
애국지사 추모비는 충청남도 금산군 남산 주차장에 위치해있다. 금산군 출신으로 의병활동, 3.1독립만세운동 등 독립운동으로 서훈 및 표창을 받은 독립유공자 26분을 추모하고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7년 9월 건립하였다. 애국치사 추모비 옆에는 3.1독립의거기념비, 송철 추모비 등 많은 비석이 함께 세워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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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병순 묘
송병순(1839 - 1912)의 호는 심석재이며, 을사조약을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동생이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한 반대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5적을 성토하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수백 명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두문불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그 후 1912년 유서를 남기고 음독자결하셨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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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손 묘
이기손(1877-1957)은 전라남도 광산(光山) 출신의 의병장으로 1907년부터 1945년까지 전남서부지방(광산, 나주, 함평)에서 활동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礻+甫)의 17대손으로, 이영의(李榮儀)의 아들이다. 호는 금재(錦齋), 용섭당(龍攝堂)이며 이칭으로는 연해(淵海), 금재(錦齋), 연해(淵海)로 불렸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을사조약·한국군군대 해산 등 일제의 침략과 내정 간섭이 강화되자, 광산·나주 등지에서 800여 명의 의병을 모은 뒤 스스로 의병장이 되어 진도·완도 연안의 일본군을 물리쳤다. 그 뒤 장성의 기삼연의진(奇參衍義陣)의 부장인 전해산(全海山)·김태원(金泰元)과 모의해 광산·나주·함평 일대의 상본장(相本將)이 되어 일본군으로부터 노획한 총 500정을 가지고 의병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08년 2월 용진산전투(龍鎭山戰鬪)에서 일본군 100여 명을 사살하고 총 100여 정을 빼앗았으며, 이어서 전개된 전투에서 다시 적군 70여 명을 사살하였다. 그 뒤 용진산보다 지형이 유리하고 군량미 조달이 쉬운 성문산(城門山)으로 본진을 옮겨 담양 등지로 원정, 일본군 수십 명을 사살하였다. 또한, 100명의 결사대를 조직해 무안군 지도(智島)에 설치한 일본 해군본부를 습격, 일본군을 완전히 섬멸하였으며, 영광군 대마면 성산리 노감촌과 고산 등지로 출병하여 많은 일본군을 사살하였다. 그 뒤 고창 극오동과 노동 작전에서 결사전을 전개하였으나, 화력과 병력이 부족해 의병의 피해가 적지 않자 잠시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9년에 다시 거의하였으나 2월에 사촌(沙村)에서 패하고, 전해산 의진과 동맹하여 호남 제7진의 의병장으로 활약중 적에게 붙잡혔다. 그러나 압송하던 병졸이 술을 마시고 취한 틈을 이용해 결박을 풀고 탈출하여 금산에서 은신하였다. 그 뒤 함경도를 거쳐 만주·러시아·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였다가 1915년 러시아에서 귀향하여 금산에서 젊은이들에게 애국정신을 일깨워 주었고, 고종과 순종을 모신 숭봉전(崇奉殿)과 어필각(御筆閣)을 지어 널리 민족정신을 알리는 데 힘썼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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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양 이씨 어필각
이 건물은 순종(재위 1907-1910)의 글씨를 새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하여 세운 비각으로 어필각은 임금의 글씨를 모셔두었다는 의미가 있다. 충청남도 금성면 하신리는 본래 온양 이씨(溫陽李氏)가 대대로 살던 고장으로 1925년에 순종 황제가 온양 이씨(溫陽李氏)의 오세삼효(五世三孝)의 덕을 칭찬하기 위해 하사한 ‘온양이씨계효지비(溫陽李氏繼孝之碑)’라는 여덟 자의 어필(御筆)을 모셔두었다.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 온양이씨 문중에서는 황제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숭봉전을 세우고 순종의 얼굴을 그린 어진(御眞)과 함께 한말에 순절한 충신들의 영정을 모셔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자 의친왕(義親王)이 ‘온양이씨삼효문’이라는 친필을 하사하고 영모당의 액자를 내렸다. 1927년에는 어필각 앞에 하마비를 세웠다.기록에 따르면 금계초등학교 앞에 있었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위치를 옮겼다. 현재 어필각 옆 하마비 위쪽 빈터가 숭봉전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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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표 순절비
오강표(1843 - 1910)는 관직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 몰두한 유생으로서,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즉각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5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치하에서는 살 수 없다고 선언하고 절명사를 지어 공주향교 명륜당의 벽에 붙이고 일장통곡한 후에 강학루에서 목을 매어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