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465건
-
이종일 집, 동상, 사적비
이종일(1858-1925)은 충청남도 태안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98년에 최초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대한황성신문 사장에 피임되었다. 고종황제의 탄신일 경축 기사에 성수만세(聖壽萬歲)가 성수망세(聖壽亡歲)로 오기되어 불경죄로 투옥되었으나 중상모략으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1906년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월보 과장과 보성 인쇄주식회사의 사장직을 맡았다. 1919년 2월, 오세창으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자신도 이 계획에 참여하여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결심하였다. 2월 27일 이종일이 사장으로 있던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공장 감독 김홍규에게 명하여, 최남선이 경영하던 신문관의 직공이 짜서 최린의 집에 보관 중이던 독립선언서 활자판을 가져오게 하여 이를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홍규는 인쇄 직공 신영구에게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종일은 독립선언서 중에서 2천 매를 28일 보성사 간사인 인종익에게 주어, 1천 5백 매는 전주 천도교구에 보내고, 나머지는 충주로 보내어 밤중에 살포하도록 하였다. 또한 독립선언의 취지를 국내에 보도하고,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박인호, 윤익선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기로 협의하였다. 이에 송현동에 있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손병희와 함께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선언서 전말을 기재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원고를 작성하여 윤익선의 명의로 발간하기로 했다. 또 3월 1일 자신이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김홍규로 하여금 독립신문을 인쇄케 하여 임준식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에 인사동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자신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탁상에 놓고, 이 자리에 모인 민족대표에게 돌려보게 하고 함께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3년에 걸쳐 ≪한국독립비사(韓國獨立秘史)≫를 집필하여 발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압수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
태안 원북면 방갈리 출신 문장로(文章魯, 1846~1919)는 1893년 2월 초 박덕칠을 통해 동학에 입도하였고, 그후 적극적인 포덕활동을 전개하여 방갈리의 접주가 되었다. 박인호가 이끌던 덕포의 기포령에 의하여 30여명의 동학 우두머리를 구출하기 위한 비밀회의가 방갈리에 살던 문장로의 자택에서 진행되었다. 이후 그들은 논의대로 태안관아를 점령하여 동학의 우두머리 30여명을 구출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면천 승전곡 전투, 신례원 관작리 전투, 홍주성 전투에 태안지역의 동학농민군을 대거 이끌고 참여했다. 그러나 1894년 10월 29일 홍주성에서 패한 이후 관군의 체포령을 피해 태안일대 해안의 토굴과 야산에 은신하면서 예포 동학 조직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900년 동학의 지도부들이 지시한 조직 강화 밀명을 받고 태안 수접주로 임명되어 조석헌 등과 함께 비밀스럽게 조직 재건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로도 관군의 체포령을 피해 충남의 각 지역을 떠돌면서 포교활동을 벌이다가 1910년 예산군 신암면 탄중리 무한천변의 갈대밭으로 이주하여 천도교의 포교 활동뿐 아니라 독립사상을 고취하다가 1919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충청남도 태안에 위치한 동학농민혁명 태안 기포지 기념비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최초 기포지로 알려진 태안군 원북면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2015년에 본 비를 세웠다.
-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
충청남도 태안에 위치한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이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봉건, 반외세 운동을 일컫는데, 총 2차에 걸쳐 일어났다. 1차 봉기는 1894년 3월에 봉건 체제개혁을 위한 것이고, 2차 봉기는 같은 해 9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항일무장투쟁이었다. 1차 봉기가 일어나던 1894년 11월, 태안 백화산에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진을 치고 있었는데, 관군이 몰려와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유규회, 최성서, 최성일, 안순칠, 피만석을 체포하고 압송했다. 또한 수많은 동학농민군들이 관군과 일본군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에 목숨을 바쳐 동학의 정신을 지키고자 한 동학농민군의 정신을 기리고자 본 탑을 건립하였다.
-
김복한 집 표지석
김복한(1860-1924)은 충청남도 홍성 사람으로, 자는 원오(元五), 호는 지산(志山)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해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설,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석방되었다. 대사성(大司成)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에 이설 등과 이완용과 같은 매국노를 처단할 것을 상소하여 다시 투옥, 후에 석방되었다. 1906년 참판 민종식과 홍주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서울 경무청에 수감되어 모진 고문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1919년 3월 유림(儒林) 대표로 곽종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였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때 지병을 얻어 불편한 생활을 하면서도 후학 양성에 노력하다 사망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김좌진 기적비
김좌진(1889-1930)은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 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한용운 집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민족시비공원, 애국지사 시비
민족시비공원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족시인들의 시가 새겨진 비석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길이 조성되어있다. 그 중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한용운, 심훈 등도 포함되어 있다.
-
한용운 동상
만해 한용운(1879-1944)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의 불교인이자 저항 시인이다. 1894년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만주 간도성 등을 다니며 광복 운동을 하다가, 1905년에 인제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을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을 겸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서은모 묘
충청남도 홍성에 위치한 서은모의 묘이다. 서은모(1884-1936)는 충청남도 홍성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주민들은 월산(月山)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게양하고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서은모도 이길성, 황문수, 이유홍, 이백영, 황통명, 하유숙, 최순보, 전남규, 이희보 등과 함께 횃불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서승태 흥학기념비
서승태(1854-1921)는 1906년에 민종식 의병장이 의병을 이끌고 남포에서 홍주성을 향하여 행진할 때, 지방 부호의 창고를 열어 군량미를 제공하는 등 의병을 지원하였다. 1908년 홍주향교의 도유사(都有司)로 있을 때에는 영재 배출을 목적으로 사재를 털어 광천 덕명학교(德明學校)를 설립하고 57회에 걸쳐 졸업생을 배출하여 후진 교육에 이바지하였다. 1919년 3월 18일에는 홍천군 광천면에서 오인섭(吳仁燮)·이명종(李鳴鍾)·최응모(崔應模)·성인배(成仁培)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 500여 매를 등사하여 주민들에게 배부하는 등 시위 준비를 위해 활동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혔다. 그리하여 같은 해 4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서은모 집
서은모(1884-1936)는 충청남도 홍성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주민들은 월산(月山)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게양하고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서은모도 이길성, 황문수, 이유홍, 이백영, 황통명, 하유숙, 최순보, 전남규, 이희보 등과 함께 횃불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서은모 독립운동 기념비
서은모(1884-1936)는 충청남도 홍성 사람이다. 1919년 4월 7일 밤, 충남 홍성군 구항면 황곡리 주민들은 월산(月山)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깃발을 게양하고 횃불을 올리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서은모도 이길성(李吉性), 황문수(黃文秀), 이유홍(李有弘), 이백영(李伯榮), 황통명(黃通明), 하유숙(河有淑), 최순보(崔順甫), 전남규(田南珪), 이희보(李熙輔) 등과 함께 횃불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었고, 1919년 4월 23일 홍성경찰서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