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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권호 공적비
성권호(1921 - 1976)은 대전(大田) 사람이다. 1941년에 신사(神社)·군수공장(軍需工場)·군용열차(軍用列車) 등을 폭파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계획이 탄로되어 동년 2월 일경에 붙잡혔다고 한다.1941년 12월 25일에 대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43년 11월에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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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윤 망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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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석 사적비
배용석(1899 - 1926)은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경 충북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수묵동(水墨洞)에서 허상기(許相基)·육창주(陸昌柱)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미리 준비하여 동년 3월 27일 오후 1시경 이원(伊院) 장터에 운집한 주민 400여명과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이때 주동자가 피검당하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다가 붙잡혔다.그리하여 동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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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석 묘
배용석(1899 - 1926)은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5일경 충북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수묵동(水墨洞)에서 허상기(許相基)·육창주(陸昌柱)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미리 준비하여 동년 3월 27일 오후 1시경 이원(伊院) 장터에 운집한 주민 400여명과 같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였다. 이때 주동자가 피검당하자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계속하다가 붙잡혔다. 그리하여 동년 5월 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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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탑 (옥천읍 마암리)
옥천 독립유공자탑은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에 있는 충혼공원 내에 위치해 있다.옥천지역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참가했거나, 타지에서 태어나 옥천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한 선열과 호국영령 등 57명의 이름을 새긴 약 6m 높이의 독립유공자탑을 충혼공원내 충혼탑 옆에 세웠다. 명각대상자는 청산만세운동 김인수 외 6명, 이원만세운동 김용이 외 16명, 군서만세운동 김순구, 군자금모금 등 항일운동 곽중규 외 19명, 의병활동 송병선 외 11명 등 57명이다.탑의 형상은 애국정신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들고 자주독립을 열망하며 자유와 평화를 선언하는 애국지사를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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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구영 집
정구영(1899 - 1978)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고 해방 후에는 독재를 굳건하게 반대했던 변호사였다. 1910년 한성외국어학교 영어부, 1911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상과, 1919년 경성법률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재판소서기 겸 통역생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 판검사특별임용시험에 합격하였다. 1921년 대구지방법원 검사, 1923년 경성지방법원 검사를 지낸 뒤 1925년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1930년 경성조선인변호사회장, 1943년 경성변호사회장, 1946년 조선법조회 이사장, 1947년 조선인권옹호연맹 이사장, 1955년 변호사징계위원, 1956년 초대한국법학원장, 1959년 서울변호사회장·대한변호사협회장, 1960년 국제변호사회 이사를 역임하였다. 1960년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마산 시민에 대한 경찰의 발포사건에 대해서 대통령 하야와 재선거촉구성명을 발표하였다. 1961년 5·16 후 5·16의 주체세력인 민주공화당에 입당, 1963년 총재에 취임하고,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1964년 민주공화당 의장이 되었다. 다시 제7대 국회의원을 지내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3선개헌을 추진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3선개헌에 이어 유신헌법까지 등장하자 1974년 1월 민주공화당을 탈당하였다. 1974년 12월 민주회복국민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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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3.1운동기념비(재건립)
옥천에 위치해있는 기미3.1운동기념비는 재건립되었다. 비석은 그대로이고 비를 받치고 있는 아래부분이 바뀌었다. 3.1운동 당시 주동자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시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허상기(許相基), 허상구(許相球), 허상회(許相淮), 김용이(金龍伊), 육창주(陸昌柱), 공재익(孔在翊), 조이남(趙伊男), 이금봉(李金奉), 이호녕(李瑚寧)등 애국지사들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된 기념비이다. 1919년 3월 27일 이원 장날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던 애국지사들은 대부분 공주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후 형기를 다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애국지사들은 옥고에 시달려서 생긴 병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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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탑 (이원면 건진리)
독립유공자탑은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 건진리에 위치해있다. 1998년 12월 이원면 개심리 사유지에 설치된 기존의 현충탑이 무상 임대 기간이 만료되면서 부지 이전과 충혼탑 정비의 필요성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었고 이에 따라 군은 현충시설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현충탑을 재건립했으며 독립유공자탑을 함께 설치했다. 부조벽에는 6·25 및 베트남 참전 희생자 등 200명, 3·1 운동 관련 애국지사 등 22명으로 총 222명의 유공자를 명각했다. 또한 바닥에는 이원면 주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나라를 위한 희생과 헌신을 추모하는 메시지를 담은 93개의 박석을 설치했다. 박석은 행정구역 개편으로 이남, 이서의 2개면이 이원면으로 통합된 1929년과 현재 2022년과의 차이가 93년인 것을 고려하여 93개로 했다. 1919년 3월 27일 같은 마을사람 김용이(金龍伊)·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육창문(陸昌文) 등이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미리 만든 태극기를 앞세워 들고 수백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던 중 주동자 육창주와 허상기가 헌병주재소로 연행되자, 그는 허 양(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구(許相球) 등과 함께 300여명의 군중을 이끌고 헌병주재소로 몰려가서 주동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할 때 감금되어 있던 육창주와 허상기가 탈출하여 다시 시위대열에 합세함으로써 독립만세운동은 더욱 가열되었다. 부조벽에는 이원 만세운동에 참여한 김용이, 육창주, 이면호, 허상기, 공재익, 배용석, 이금봉, 이호영, 허간, 허상구,허상회, 허찬, 박만하 그리고 국내외 독립운동에 참가한 곽중규, 곽준희, 김응선, 곽중선, 김운용, 김성권, 송암우, 정명옥, 지팔문의 이름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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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삼일운동8사기념비
1946년 이원면민들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미 3.1운동 기념비를 건립했다. 그러나 당시 기념비를 건립했던 신흥리 12번지가 사유지였던 관계로 부득이 옮겨야 할 처지에 놓이자 이원청년회에서 1979년 개심저수지 뚝방으로 옮겨 재건립하였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아, 3월 15일 옥천사람 육창주(陸昌柱)와 허상기 등은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들은 3월 27일 이원 장날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일본 헌병에게 제지당하면 모두 주재소로 몰려가서 항의하고, 만일 구금되는 자가 있으면 즉시 이들을 탈출시키기로 협의한 후,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준비하고 은밀히 부락민에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7일 오후 1시경 육창주(陸昌柱)·김용이(金龍伊)·허 량(許樑)·이면호(李冕鎬)·허상옥(許相玉)·허 찬(許贊) 등의 동지를 이끌고 장터에 모인 수백명의 군중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태극기를 휘두르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출동한 일본 헌병에게 허상기·육창주·김용이가 체포되었다. 이에 분노한 군중들은 주재소로 달려가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며 구속자의 석방을 요구하고, 시위군중 2,3백명이 투석으로 주재소 유리창 등을 파괴하였다. 이에 사태가 심각하게 된 것을 안 일본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시위군중은 일단 해산되었으나, 금산(錦山)에서 온 이경만(李景滿)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오후 3시경 일시 해산된 시위군중들이 주재소 앞에서 다시 모여 유리창을 부수며 구금되어 있던 사람들을 구출하고, 몽둥이로 일본 헌병들의 말(馬)을 후려치자, 다시 일본 헌병들이 무차별 발포하여 시위군중 2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때 이원 장터에는 옥천과 대전(大田)에서 일군 수비대원이 증파되었으며, 일본 헌병도 10여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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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금봉 집
이금봉(1896 - 1950)은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27일 하오 1시경 육창주(陸昌柱)·허상기(許相基)가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300여 명의 군중을 모아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가를 누비고 주동자인 허상기·육창주·김용이(金龍伊) 등이 연행되자 더욱 격렬하게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여 투석과 곤봉으로 주재소를 습격하고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다가 결국 체포되었다. 이해 7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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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중규 집
곽중규의 부친 곽준희, 동생 곽중선 모두 독립유공자이다. 곽중규(1891 - 1950)은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옥천군 이원면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대전형무소에서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출옥하였다. 1921년 9월 미국으로 가던 중 중국 상해에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1922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비서로 취임하였다가 이어 비서장(秘書長)으로 승진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인성학교(仁成學校)의 교사로 재직하면서 교포 자녀들에게 민족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그 뒤 1925년 3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어, 나창헌(羅昌憲)·최석순(崔錫淳)·강창제(姜昌濟) 등과 함께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彈劾案)을 제출하고, 임시의정원에 보고하여 면직 처리케 하였다. 1926년 명성(明星)사진관을 개업하여 독립운동의 비밀연락장소로 제공하였고, 1929년엔 상해 프랑스 조계로 이사하여 성광(星光) 사진관을 개업, 독립운동을 위한 연락장소로 활동케 하였다. 이어서 1931년 9월부터 윤봉길(尹奉吉)을 사진관에 은신하게 하였으며, 동생 곽중선(郭重善)으로 하여금 윤봉길에게 상해의 지리와 풍습 등을 알려주고 장차 거사에 대비케 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충청도(忠淸道) 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그러나 1932년 4월 윤봉길의 의거 후 중경(重慶)으로 전란(戰亂)을 피하여 이동하였다. 1933년 4월 상해로 돌아와 한족유일독립당촉성회(韓族唯一獨立黨促成會)의 간부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또한 공산당(共産黨)과 제휴하여 강소성(江蘇省) 법남구지부(法南區支部)에 가입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붙잡혀 신의주경찰서로 이송되었다. 같은 해 12월 11일 신의주지방법원(新義州地方法院)에서 소위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5년 5월 가출옥하여 천진(天津)에 있는 동생 곽중혁(郭重赫)의 집에 머물러 있다가 신변의 위험을 피하기 위하여 1938년 석가장(石家莊)으로 이주하여 계속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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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회 공적비
허상회(1881 - 1968)의 휘는 상회, 자는 완, 호는 상당, 관은 양천이다. 1919년 3월 27일 이원(伊院) 장날을 이용하여 전개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초순이래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독립만세운동에 영향을 받아, 3월 15일 형 허상기(許相基)·동생 허상구(許相球), 같은 마을 친구 육창주(陸昌柱)·김용이(金龍伊)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그 방법으로 3월 27일의 이원 장날을 이용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때 만일 구금자가 생기면 즉시 이들을 탈출시키기로 협의한 후, 태극기 3개를 만들어 두고 부락민에게 은밀히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는 3월 27일 오후 1시경, 육창주·김용이·허 량(許樑)·이면호(李冕鎬)·허 찬(許贊) 등의 동지와 함께 수백명의 군중을 인솔하여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그러나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한 일본헌병에 의해 허상기·육창주·김용이가 헌병주재소로 연행되니, 격분한 시위군중은 해산했는데, 그는 이때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실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