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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
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은 영동지역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순국한 선열과 호국영령 등 59명 이름과 취지문을 새긴 탑이다. 영동군 독립유공자의 숭고한 얼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영동군 독립유공자 기념탑은 자연스러운 원형 좌대에 양쪽 수직방향의 화강석 기둥이 음과 양이 서로 상승 변화, 화합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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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지사 독립만세운동비
7지사 독립만세운동비는 영동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던 7인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게 되자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언하게 되었고, 이에 우리 민족은 전국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항거하였다.이해 4월 4일 이곳 영동면에서도 2천 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7인의 애국지사의 충절을 기리고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하였다.장날을 이용하여 김태규(金泰奎)·박성하(朴聖夏)·한의교(韓義敎)·정성백(鄭聖白)·장인덕(張仁德)·정우문(鄭友文)·한광교(韓光敎)는 함께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고 장터에 모인 2,0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하였다. 이에 일경이 병력을 동원하여 시위를 해산시키려 하자 몽둥이로 대항하다가 일경의 야만적인 발포로 6명이 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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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봉식 묘
양봉식(1882 - 1950)은 충청북도 영동(永同) 사람이다.1919년 4월 3일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학산면(鶴山面) 서산리(鋤山里) 장터에서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절규하며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어서 이날 밤 8시경에는 200여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면민들에게 강제로 나누어 줄 2만 8천 그루의 뽕나무 묘목을 뽑아서 태워버렸다. 그리고 경찰주재소로 달려가 사무실과 숙직실을 파괴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으며, 이해 7월 1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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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만표 송덕비
전만표(1876 - 1959)는 충청북도 영동(永同) 사람이다.1919년 4월 3일 오후 4시경 학산면(鶴山面) 서산리(鋤山里) 장터에서 군중을 인솔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다시 밤 8시경 약 200여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구내에 심어 둔 뽕나무 묘목 2만 8천 그루를 뽑아 불태우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1920년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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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3.1독립의거기념비
3.1독립운동 60주년 기념으로 세워진 비석이며 여규병, 정화중, 여규방, 여규일, 여중선, 김승림, 박두업, 박원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여규방(1886 - 1963), 여규병(1879 - 1935), 정화중(1888 - 1931), 여규일(1883 - 1974), 여중선, 김승림(1891 - 1952), 박두업(1898 - 1949), 박원포는 1919년 4월 16일 학산면에서 도로부역을 위하여 모인 군중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학산주재소를 일시 점거하고 건물과 기물을 방화, 파괴하고 일인이 임시로 심어둔 뽕나무 묘목에 불을 지르며 활동하였지만 일경의 무차별 발포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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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석 기념비
이건석(1852 - 1906)은 1905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앞세우고 이에 동조하는 오적과 더불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하였다. 평소 충효(忠孝)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학문(儒敎學問)에 종사하여 온 유림(儒林)들의 분노와 울분은 대단하였다. 또한 정부 내에 있던 문인 관리들은 망국조약이 있을 수 없는 망극한 일이라는 것과 적신(賊臣)들의 불법하고 불의(不義)한 사실을 들어 광무황제에게 상소하여 적신들의 처단과 조약의 취소를 청원하였다. 이건석은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소식을 듣고 이석종(李奭鍾) 등과 함께 유약소(儒約所)를 설치하고 이어서 조약의 부당함과 적신들의 처단을 조직적으로 상소하기 위하여 13도소청(十三道疏廳)을 구성하였다. 이에 따라서 유생(儒生)들은 일제와 매국노들의 온갖 방해와 협박을 무릅쓰고 연명으로 광무황제에게 조약의 폐기와 반역자들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고 그들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이러한 상소에 대해 의롭지 못한 만행으로 대처하여, 상소항쟁을 거듭하던 그를 비롯한 많은 애국자들을 회유하고 또 한편으로는 협박하여 기세를 꺾으려 온갖 책동을 다 부렸다. 그는 일본군 파견사령부에 감금되어 한편으로는 일제(日帝)의 협박과 회유에도 결코 굽히지 않고 소신을 지켰다.그의 절의(節義)는 몇 차례의 토혈(吐血)에도 굳게 이어졌으나, 결국 1906년 5월 10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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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농민혁명전적지비
1894년 10월 29일 충북 옥천 증약 부근에서 일본군과 관군이 연합해 동학농민군과 교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 30여 명이 전사하였으나, 정확한 전투지 위치는 알 수 없다. 2009년에 옥천 증약전투 참여 유족과 옥천향토사연구회에서 ‘갑오년동학농민혁명전적지’ 기념비를 옛 증약역 인근에 건립하였다. 1894년 10월 29일 일본군 제18대대 하사 이하 17명과 교도중대 1개 소대는 회덕을 출발하여 주안으로 가는 도중, 옥천 증약 부근에서 동학농민군 1만여명을 만나 교전하였다. 동학농민군은 깃발 50여개를 앞세우고 북쪽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그러자 일본군은 관군과 합세하여 협공하였는데, 동학농민군 110여 명이 쓰러지고 관군은 겁을 먹고 퇴각하였다. 그럼에도 동학농민군은 두 부대로 나누어 “적군은 적다. 포위하라”고 외치면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낸 뒤 문의방향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 30여 명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나왔다. 일본군이 쏜 탄약은 1,432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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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구 순절비
김순구(1867 - 1919)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옥천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청주(淸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며, 3월 23일 밤에는 강내면(江內面)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웃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 등에서 호응하여 횃불의 불바다를 이루는 등 의기 충천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다시 미원(米院)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8일 밤 9시경 그간에 규합한 동지들과 함께 서화산(西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던 중 옥천 헌병 분대의 습격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후 피신하였다. 이후 충북 각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계획하다가, 고향인 군서면(郡西面)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받았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공주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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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구 묘
김순구(1867 - 1919)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옥천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청주(淸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며, 3월 23일 밤에는 강내면(江內面)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웃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 등에서 호응하여 횃불의 불바다를 이루는 등 의기 충천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다시 미원(米院)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8일 밤 9시경 그간에 규합한 동지들과 함께 서화산(西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던 중 옥천 헌병 분대의 습격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후 피신하였다. 이후 충북 각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계획하다가, 고향인 군서면(郡西面)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받았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공주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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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리 마을자랑비
하동리 마을 자랑비는 92년 건립되었다. 이 마을에서 김순구와 독립운동가 25명을 배출한 것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건립하였다.일제시대 도내에서 독립투사로 그 이름을 드날리던 김순구 선생을 주축으로 이마을 애국지사 25명을 비롯하여 면민이 1919년 4월 8일 만세봉에서 만세를 부르며 항거하시다가 김순구 선생은 대표로 잡혀가 많은 고문을 받으시다 순절하였다. 김순구(1867 - 1919)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옥천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청주(淸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며, 3월 23일 밤에는 강내면(江內面)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웃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 등에서 호응하여 횃불의 불바다를 이루는 등 의기 충천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다시 미원(米院)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4월 8일 밤 9시경 그간에 규합한 동지들과 함께 서화산(西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던 중 옥천 헌병 분대의 습격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후 피신하였다. 이후 충북 각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계획하다가, 고향인 군서면(郡西面)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형을 받았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공주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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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만세운동기념비
군서만세운동기념비는 1919년 군서면 만세운동의 진원지인 하동리 마곡마을 만세봉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다. 이 기념비는 후손들에게 만세운동의 참뜻을 알리고 당시 만세를 부르다 붙잡혀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김순구 열사를 비롯, 함께 만세를 불러 고초를 당한 26명 애국지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군서면 만세운동은 당시 음력 3월 8일 밤 마을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부르기로 협의한 후 짚단으로 각자 횃불을 만들어 마을 앞산에 올라 만세를 부름으로써 시작되었다. 마을 앞산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하여 그 뒤부터 이곳을 만세봉이라고 불렀으며 만세운동과 연루된 김순구 열사를 비롯한 26명의 애국지사들이 일본순사로부터 갖은 고초를 당해 대부분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비를 세운 3·1정신유지계는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일제시대부터 비밀리에 조직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지사들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운영해 오고 있으며 매년 김순구 열사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김순구(1867 - 1919)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옥천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청주(淸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며, 3월 23일 밤에는 강내면(江內面)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웃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 등에서 호응하여 횃불의 불바다를 이루는 등 의기 충천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다시 미원(米院)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4월 8일 밤 9시경 그간에 규합한 동지들과 함께 서화산(西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던 중 옥천 헌병 분대의 습격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후 피신하였다. 이후 충북 각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계획하다가, 고향인 군서면(郡西面)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았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공주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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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구 사당 (충민사)
충민사는 1910년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게 되자 구국의 일념으로 분연히 일어나 충청도 일원을 무대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신 순국선열 김순구 선생과 항일투사 25인의 애국, 충정을 기리고 국민의 애국심 함양을 위하여 2002년 건립하였다. 김순구(1867 - 1919)는 충청북도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19일 일어난 옥천 읍내의 독립만세운동이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청주(淸州)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였으며, 3월 23일 밤에는 강내면(江內面)에서 수많은 군중과 함께 횃불시위를 벌였다. 이에 이웃 강외면(江外面)·옥산면(玉山面) 등에서 호응하여 횃불의 불바다를 이루는 등 의기 충천하였으며, 3월 30일에는 다시 미원(米院) 장날을 이용하여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8일 밤 9시경 그간에 규합한 동지들과 함께 서화산(西華山)에서 횃불을 올리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하던 중 옥천 헌병 분대의 습격으로 군중을 해산시킨 후 피신하였다. 이후 충북 각지를 돌면서, 동지들과 계속 투쟁할 것을 계획하다가, 고향인 군서면(郡西面)의 동지들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옥천경찰서에 자진 출두하여 항의하다가 체포되어, 이해 6월 1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받았으며 모진 고문의 여독으로 공주감옥에서 신음하다가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