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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동상(상당구)
신채호(1880-1936)는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호는 단재(丹齋)이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본관은 고령, 호는 단재(丹齋)·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이다.[1] 필명은 금협산인·무애생·열혈생·한놈·검심·적심·연시몽인 등이 있고, 유맹원·박철·옥조숭·윤인원 등을 가명으로 사용하였다. 구한 말부터 언론 계몽운동을 하다 망명,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나 백범 김구와 공산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임정을 탈퇴, 국민대표자회의 소집과 무정부주의 단체에 가담하여 활동했으며, 사서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6년 2월 21일 만주국 뤼순 감옥소에서 뇌졸중과 동상, 영양실조 및 고문 후유증 등의 합병증으로 인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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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동상(삼일공원)
신석구(1875-1950)의 호는 은재이며,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 밖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다. 그 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오화영(吳華英)·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이승훈(李昇薰)·박동완(朴東完)·김창준(金昌俊)·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 등과 회합,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석구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 가서 시무하다가, 1945년 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해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대결, 3·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피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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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덕 동상(삼일공원)
1894년 동학운동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당한 뒤 전국 각지를 방랑하였다. 1908년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입교했다. 이후 천도교의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館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 참배를 위하여 상경했을 때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에게, 3·1운동 계획을 들었다.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에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고,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29인이 모였다. 이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자진해 붙잡혀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감사원장·선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22년 말 천도교 신파가 ‘천도교 연합회’를 설립하여 분립하자, 천도교에서 탈퇴하여 수운교와 상제교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27년 이후 신간회에서 활동하다가, 신간회가 해체되자 다시 천도교 구파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조선총사(朝鮮總史)』·『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궁중비사(宮中秘史)』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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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동상(삼일공원)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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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 동상(삼일공원)
권동진(權東鎭, 1861~1947)은 충청북도 괴산군 출신으로 무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애당(愛堂), 우당(憂堂)이고, 법명은 실암(實菴)이다. 원래 집안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나 아버지 대 괴산으로 옮겨와 이곳에서 태어났고, 1869년 무렵 서울 재동으로 이사해 성장하였다.19세가 되던 1880년경 하도감(下都監)주1에서 일본군 장교를 초빙해 사관학교를 개설할 때 제1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졸업 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조희연 등과 초관(哨官)주2에 임명되어 좌우영의 교련을 맡았다. 1884년 갑신정변 때는 박영효가 거느리는 전후영 소속으로 무관학교 출신 5인과 함께 대궐에서 고종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1885년 무렵 1년간 경상남도 함안군수를 역임하였다. 함경도 안무중군(按撫中軍) 겸 토포사(討捕使)로 있다가 중추부(中樞府) 내금장(內禁將)주3을 지내고, 1894년에는 거문도 첨사(僉使) 겸 수방장(守防將)으로 나갔다. 1895년 소위 대원군의 ‘ 명성황후 폐위’ 계획에 가담하였다가 실패하면서 그 해 12월 일본 망명길에 올랐다. 일본에 망명한 후 일본 도쿄〔東京〕의 근위사단에서 병학(兵學)을 공부하면서 3연대에서 3년여 동안 실전 훈련을 받았고, 일본 육군성에서 경리 사무를 익혔다. 그런데 오사카〔大阪〕에서 동학 교주로서 망명 중인 손병희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기를 맞게 되었다. 1906년 1월 5일 손병희가 천도교를 창건하고 귀국하는 길에 오세창 등과 함께 동행하였다. 손병희가 천도교 대도주(大道主)주4에 취임해 조직을 정비할 때 그를 보좌하며 천도교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중추원 부참의(副參議)에 임명되었으나 2개월여 만에 그만두고 교육 진흥과 식상 흥업을 앞세운 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1907년 대한자강회의 후신으로 설립된 대한협회에서 실업부장과 부회장을 맡았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후 천도교 지도자로서의 삶을 이어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세계 재편의 움직임이 보이자 손병희, 오세창, 최린과 함께 독립운동을 모의하였다. 기독교, 불교와의 연대를 모색한 끝에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 3 · 1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다. 1919년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후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고 1921년 12월 22일 출옥하였다. 1922년 5월 손병희가 세상을 떠나면서 천도교는 정치노선과 종교노선에 따라 거듭되는 분화를 겪었다. 이때 천도교 구파 지도자로서 자치운동을 도모하는 천도교 신파와 달리 비타협적 민족주의 노선을 걸었다. 천도교 구파가 1926년부터 사회주의 세력과 연대하여 6 · 10만세운동을 준비할 때 1만 원 가량의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으나 만세운동이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1927년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의 민족협동전선체로서 탄생한 신간회에서 부회장을 맡았다. 1929년에는 신간회 복대표대회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이 소식을 널리 알리기 위한 민중대회 개최를 추진하였다. 하지만 경찰에 의해 사전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광복이 되자 임시정부환영준비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신탁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의 결성에 참여하였고 신한민족당을 창당하였다. 1947년 3월 9일 87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追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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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 공적비
권동진(1861~1947)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천도교인이며, 서울에서 자랐다. 한에 함안군수와 육군참령을 역임하였고, 그 후 개화당에 들어가 혁신운동을 전개했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천도교에 입교하여 도사가 되었다. 귀국 후 1919년 2월 상순경에 최남선(崔南善)과 최 린(崔麟)의 독립 선언서를 보고, 손병희(孫秉熙)·오세창(吳世昌)과 함께 그 취지에 적극 찬성하였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의 무단정책을 비난하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민족자결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찬동하는 요지의 청원서와 파리강화회의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제출할 의견서 초안을 검토하고 이에 찬동하였다. 그리고 손병희·오세창과 함께 천도교인의 대표로서 2월 25일부터 27일 사이에, 당시 천도교 기도회의 종료보고와 국장을 참배하기 위하여 상경한 천도교 도사 및 교인들에게 독립만세운동계획을 알리고, 민족대표로서 같이 서명할 것에 찬동을 구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지방에 거주하는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모였다. 그는 이 때 민족대표단의 1인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신간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계속 조국 광복과 민족 정신 앙양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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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응 공적비
김용응(1869~1959) 1919년 4월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려는 영남의 학생들에게 그 방법 등 편의에 대해 조언했다. 1925년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준비위원회에 괴산을 대표한 발기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1927년 10월 23일 괴산청년회관에서 신간회 괴산지 발기회를 개최하고 설립을 준비작업을 맡았다. 11월 26일 열린 신간회 괴산지회 설립대회에서 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2월 27일 괴산청년회 주최로 열린 ‘충청북도 사회운동자 간담회’의 좌장으로 회의를 이끌었다. 1928년 5월 13일 안철수(安喆洙) 등과 함께 괴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열흘 동안 취조를 당한 후 24일 동지 8명과 함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8월 6일 예심이 종결되면서 정운석과 함께 면소 처분을 받고 다음날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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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해 공적비
정주해(1892~1942)는 충북 괴산 사람이다. 1919년 3월 괴산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이청천(李靑天)부대에 참가하여 노령 이만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부터 1930년 5월초까지는 하얼빈도외(哈爾濱道外)에서 동성호(東省號)라는 여관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의 연락처로서 활용하였으며, 동년 5월 1일 하얼빈일본영사관 습격사건에 관련되어 일경에 검거되었다. 1942년 11월에 대종교 하얼빈시 안평가(安平街)의 서무사원으로 일경의 대종교 탄압시 대종교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처하여 가석방된지 5일만에 하얼빈시 안평가에서 영면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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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능식 공적비
송능식(1898~1963)은 충북 괴산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이래 4월 2일까지 괴산군 괴산면, 청암면, 소수면 등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1919년 4월 2일 괴산군 소수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한 유해륜(柳海崙)·경권중(慶權重) 유지 등이 괴산군내의 괴산면·장연면·청천면 등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고무되어 추진되었다. 4월 2일 새벽 2시 경, 괴산군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는 송능식의 주도로 시위군중 500여 명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옥현리의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몰려갔다. 그런데 사전에 이러한 정보가 새어나가 일경의 무력적 저지로 일단 중지되었다. 이날 밤 8시 경, 시위군중 300여 명은 다시 집결하여 면장집을 습격하고 각 동리를 돌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경은 그날 밤부터 대대적인 검속을 실시하여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송능식은 이 일로 붙잡혀,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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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익 공적비
김상익 선생은 1910년 경술 한일합방으로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현직을 버리고 일가족을 이끌고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용화리 늘티 장바위로 낙향하였다. 당시 이곳 일대가 항일의병 양성의 본거지로 총책을 맡은 한봉수 의병대장과 손잡고 슬하에 장남 世應, 차남 漢應, 3남 貞應, 4남 聲應, 5남 洛應 등 5형제와 함께 온 가족이 피복제조 세탁과 무기제작 수리 그리고 고향인 수리에 추수해 놓은 수백석의 양곡을 육마로 운반하여 군량으로 보급하고 밤에는 독립운동 낮에는 왜병에 약탈등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 수백석지기 재산을 소개하고 고향에 돌아와 호구지책에 급급하면서도 여생을 후회없이 마쳤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넷째 아들이신 김성응 선생이 독립유공자의 유족이며 독립유공자라 하여 충청북도 초대 내무부장에 취임한 바 있었으며, 6.25동란때 이로 인하여 납치되어 피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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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공적비
김태규(1896~1962)는 충북 괴산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국내에서 성립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했다. 동단은 1919년 5월 조용주(趙鏞周)·연병호(延秉昊)·이병철(李秉徹) 등이 외교활동을 행동지침으로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것으로서, 본부인 중앙부를 서울에 두고 국내의 각처와 해외 조직으로 상해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중앙부의 부서 구성은 총무를 중심으로 외교부·재무부·편집부·외교원·외교특파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동단의 활동은 외교선전 활동과 관련된 외교원의 해외 파견 및 기관지 〈외교시보(外交時報)〉의 발간 등 선전물 간행이 주된 것으로서, 재무부장의 책임을 맡았던 그는 이같은 활동에 필요한 자금지원을 관장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에 그는 외교 연구를 목적으로 상해에 파견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충북 괴산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임무를 띠고 국내에 다시 들어왔다가 동년 11월말 동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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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행적도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출생했다. 호는 포석(抱石)이다. 1919년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黃錫禹) 등이 조직된 의권단에 몸담았다.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와 밀정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창작 활동을 했다. 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연해주에서 1928년 10월에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상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조명희는 연해주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 1회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5월 11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