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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식 추모비
홍범식(1871 - 1910)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이며, 충청북도 괴산 출생으로 참판(參判) 홍승목(洪承穆)의 아들이다. 1888년(고종 25) 진사가 되었으며 1902년 내부주사(內部主事)·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였고 1907년 전라북도 태인군수에 부임하였다.일제침략에 항거하는 의병이 전국에서 봉기하여 치열한 항일전투를 전개하고 있던 때 적극적으로 의병 보호에 힘써 일본군의 체포망을 피하게 하였다. 1909년 금산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1910년 일제에 의하여 주권이 강탈되자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목 매어 자결하였다. 홍범식이 가족에게 남긴 유서 10여 통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요지는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정부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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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유허비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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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동상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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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설 숭모비
이상설(1870-1917)은 일제강점기 헤이그특사, 권업회 회장, 신한혁명단 본부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이다. 충청북도 진천 출신이며 아버지는 이행우(李行雨)이며, 어머니는 달성서씨(達城徐氏)이고 7세 때 이용우(李龍雨)에게 입양되었다.이상설은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한성사범학교 교관 시절 헐버트(h. b. Hulbert)와 친교를 맺어 영어, 프랑스어 등 외국어와 신학문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 물리, 화학, 경제학, 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1904년 6월 일본이 전국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그 침략성과 부당성을 들어 이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고 같은 해 8월 보안회(輔安會)의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에 선임되고 이준(李儁)이 부회장에 피선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하자, 이상설은 그 늑약이 아직 황제의 인준을 거치지 않은 사실을 알고, 을사5적을 처단하고 을사조약을 파기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5차례 거듭하여 올렸다. 11월 말 민영환의 자결 소식을 듣고 종로에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뒤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4월에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과 함께 북간도의 용정(龍井)으로 망명하였다. 1906년 8월경에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여, 숙장이 되었는데 이것이 간도 일대의 교육 구국운동의 시작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 밀사로 파견한다는 칙명을 받았다. 비록 일본 대표와 영국 대표의 방해로 만국평화회의 회의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였으나, 세 밀사들은 6월 27일에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공고사(控告詞)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었고 영국과 프랑스를 직접 순방하면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다.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고, 『권업신문(勸業新聞)』을 발행하여 독립을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결국 1916년 중병에 걸려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순국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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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기념관
일제강점기 때 독립지사이자 사학자이며 언론인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78년에 세운 단재 영각을 중심으로 기념관, 묘소로 이루어진 곳이다. 단재 영각은 정면 3칸, 측면 1칸,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내부는 통칸 마루방에 앞마루를 놓았다. 영각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정기문’이라는 삼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둘렀다. 사당이 있는 고드미마을은 미원장이나 내수장에 나무를 내다 파는 고드미장꾼들로 이름난 곳이다. 신채호 선생이 1887년 이곳으로 이사하여 성장한 곳이기도 하다. 역사가이자 교육자, 문학가, 독립운동가였던 신채호 선생은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하여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과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진으로 초빙되는 등 일찍이 자주독립사상에 눈을 뜨고 ‘조선상고가’ 등의 역사서를 기술하기도 한 역사가이자 1901년 국민 계몽운동을 시작으로 문동학원과 산동학원에서 신교육을 가르쳐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교육자이다.아울러 우리 민족의 기상을 노래한 중편소설 「꿈하늘」과 「용과 용의 대격전」을 쓴 문학가이자 김원봉 선생과 함께 의열단 선언문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하고 민족통일전선체인 신간회를 만들기도 한 독립운동가이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말한 단재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의 산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관은 충청북도 기념물 제90호로 묘역에는 한용운 선생이 세운 묘표석과 사적비, 그리고 신채호 선생의 시 ‘하늘북’을 새긴 시비, 신채호 선생과 선생의 부인 박자혜 여사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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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학교 터(상산초)
문명학교는 이상설 선생의 사촌형제인 이상직 선생이 항일 구국 계몽 운동으로 세운 학교로 지금의 진천상산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독립운동가 이상설, 이상직 선생이 항일구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1909년 세운 것이 문명학교이다. 이상직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울의 큰아버지 댁에서 독립운동가인 이상설 선생과 숙식과 수학을 같이 하면서 기틀을 다졌고 이성훈, 이시영, 이회영, 정인보, 이범세 등과 사귀며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진천으로 낙향하여 사립·보통상산학교를 건립했다. 이상직 교장과 남진우 선생이 교육을 담당하여 학생 수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교실이 협소하여 향교의 명륜당으로 전전하며 재정난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 교명을 ‘널리 학생을 모집해 신학문을 가르치다’라는 뜻이 담긴 <광명학교> 또는 <문명학교>라 부른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 학교는 한일합방 후 일제의 사립학교 탄압으로 폐지되고 1911년 6월 진천군에 공립보통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그해 10월 진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게 된다. 1913년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부지에 교실2, 교무실 1개로 교사를 건축했다. 또 같은 해 제 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그 때 졸업생 수는 모두 19명이었다. 1941년 4월 1일에는 학교 이름을 <진천상산공립보통학교> 라 개칭하고 진천 지역 민족 교육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한편 1940년대 현재의 삼수초등학교 터에 있던 진천상산초등학교는 급격하게 늘어나는 학생 수를 감당하기 어려워 교사 증축이 시급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부지가 좁고 재정 형편에도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 같은 어려운 환경을 접한 당시 진천의 최대 갑부로 알려졌던 이호신 선생이 토지 500석 지기의 부지를 희사해 지금의 위치에 부지 7천 여 평을 마련했다. 선생이 내놓은 부지에 교사 2동과 부속 건물을 지어 1940년 11월 이사하게 된다. 이로써 비교적 제대로 된 교육시설이 갖춰진 새로운 배움의 전당을 마련하게 됐다. 당시 이호신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교정에 장학비가 현재의 은행나무 아래 세워져 있다. 이 후 1941년 진천상산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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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렬 묘
서상렬(徐相烈, 1854~1896)은 화서학파의 유학자이며 한말의병장으로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까지 지냈으나 묄렌도르프(Mollendorf,P. G. von, 穆麟德)가 조정에 입사하게 되자 이를 통탄하고 벼슬을 하지 않고 낙향을 했다. 이후 화서학파인 김평묵과 유중교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다. 나중에 제천의 장담에서 살며 유중교의 강단에 동참하였다. 유중교의 사후에는 그의 문집인 『성재집』의 편찬을 주도하며 현실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나, 1894년 가을, 재종제인 서상철(徐相轍)의 봉기 때에는 이단으로 여겼던 동학과 연루되는 것을 피하여 참여하지 않았다. 동학과 연대하지 않은 것은 의병항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895년 말, 단발령 이후 이춘영, 안승우, 김백선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군사(軍師)로 참여하여 실질적인 지도자 구실을 하였다. 이춘영 등과 의병으로 가담한 날도 “국가의 변고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하 된 자로서 어찌 차마 앉아서 보고만 있으랴” 하며, 거병할 뜻을 밝히고 포천 선영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원주에서 지평의병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달려갔다. 그러나 제천으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 제천에서 합류하였다. 나중에 유인석을 중심으로 하는 호좌의진으로 재편된 이후에는 영월에서 포군을 모았으며, 1896년 음력 1월 중순에는 영남에 진출했다. 이는 영남과 공동으로 투쟁하기 위한 것이었고, 의병봉기 직후에 좌절하고 있던 영남 의병들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두 달 남짓 소토진(召討陣)을 이끈 서상렬은 영남의 여러 의진을 강경투쟁 노선으로 집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영남 일곱 고을의 의진을 예천에 모아 회맹(會盟)을 주도하였고, 태봉 전투에서 일본군과 직접 격전을 치렀다. 그러나 태봉 전투에서 실패하였고, 안동 관찰사의 부임을 허용할 것인가를 둘러싼 영남 북부 지역 의진의 내부 갈등 속에서 그것을 하나로 묶기 위한 노력은 결국 실패했다. 서상렬은 음력 4월 초 예천 전투의 패전을 계기로 단양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중부권을 장악하던 호좌의진이 제천을 빼앗긴 후 재기를 위해 노력할 즈음,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으로의 이동, 즉 서행(西行)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했다. 이후 서상렬은 대장진의 서쪽 행렬에 앞장서서 길을 열다가 낭천(지금의 화천)에서 전사했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서상렬의 공적을 기려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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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봉수 동상(상당구)
한봉수(1883-1972)는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근무하다가 1907년 조선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그해 음력 8월에 의병장 김규환 의진에 가담하여 일본군의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였다. 1907년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으며, 의병진을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라 칭하였다. 이후 강원으로 수송되는 세금 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고, 의병장 조운식(趙雲植)과 적과 맞설 계획을 논의하고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식량과 무기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적의 세력이 점점 강해짐에 결국 의병을 해산하고, 처가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1910년 소위 내란죄 및 강도·살인의 죄목으로 교수형을 받았으나, 경술국치가 이루어짐에 따라 1910년 8월 29일 사면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 1919년 고종황제의 국장 즈음에 홍명희, 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 7일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 보통학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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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덕 동상
1894년 동학운동 때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6만명의 교도를 이끌고 호응했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당한 뒤 전국 각지를 방랑하였다. 1908년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입교했다. 이후 천도교의 전제관장(典制觀長)·이문관장대리(理文觀長代理)·금융관장(金融觀長)·보문관장(普文館長) 등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 참배를 위하여 상경했을 때 손병희·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에게, 3·1운동 계획을 들었다.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에 최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김완규(金完圭)·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 등과 함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고,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29인이 모였다. 이 때 민족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해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자진해 붙잡혀 2년 동안의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도교 종리원(宗理院)의 서무과 주임을 거쳐, 중앙교회 심계원장·감사원장·선도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922년 말 천도교 신파가 ‘천도교 연합회’를 설립하여 분립하자, 천도교에서 탈퇴하여 수운교와 상제교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1927년 이후 신간회에서 활동하다가, 신간회가 해체되자 다시 천도교 구파로 돌아왔다. 저서로는 『조선총사(朝鮮總史)』·『이조전란사(李朝戰亂史)』·『궁중비사(宮中秘史)』 등이 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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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동상
신석구(1875-1950)의 호는 은재이며,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 밖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다. 그 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오화영(吳華英)·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이승훈(李昇薰)·박동완(朴東完)·김창준(金昌俊)·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 등과 회합,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석구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 가서 시무하다가, 1945년 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해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대결, 3·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 (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피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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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홍식 동상
신홍식(1872-1939)은 충청북도 청주 사람으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기독교인이다. 34세에 기독교에 입교한 후, 1913년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로 공주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으며, 1917년에는 평양 남산현교회(平壤南山峴敎會)로 전임되어 포교와 교육사업에 정진하였다. 1919년 2월 14일,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였던 신홍식은 동지 규합을 위해 평양에 온 이인환(李寅煥)으로부터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적극 호응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2월 20일 이인환의 집에서 오화영(吳華英), 정춘수(鄭春洙), 오기선(吳基善) 등의 동지와 모여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모아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협의하고, 이인환, 이필주(李弼柱),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 최성모(崔聖模),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정춘수 등의 동지와 함께 기독교 측 대표로서 서명 날인하였다. 28일 밤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만나, 이튿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최종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의 태화관(泰華館)에 손병희 등과 함께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 총감부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출옥 후에도 인천, 원주 등지에서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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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규식 동상
신규식(1880-1922)은 충청북도 청원 사람이다. 어릴 적부터 충성심이 대단하던 신규식은 한어학교(漢語學校)와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 참위(參尉)로 복무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지방군대에 연락하여 의병을 일으켜서 대일항전을 꾀하려 하였으나 기밀이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여기에 다시 경술국치의 비운을 당하게 되자, 1911년 11월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동맹회(同盟會)에 가입하고 손문(孫文)의 무창기의(武昌起義)에 참가하였으며, 중국인 호한민(胡漢民), 송교인(宋敎仁), 진독수(陳獨秀) 등이 경영하는 상해(上海)의 민권보(民權報)를 보조하였다.이후 상해(上海)의 불란서조계(佛蘭西租界)에 피신하여, 상해, 남경(南京) 등지에 왕래하고 거류하면서 차츰 모여드는 망명 동지들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하였다. 동제사는 독립운동단체이자, 상해를 중심으로 한 중국 관내 지역에 있는 동포들을 잇는 역할도 겸하였다. 신규식과 함께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 홍명희(洪命熹), 조소앙(趙素昻), 문일평(文一平), 박찬익(朴贊翊), 조성환(曺成煥), 김규식(金奎植), 신건식(申健植) 등이 동제사의 중견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사원의 수는 약 3백여 명에 이르고 유럽과 미국 등 해외 각지에는 분사를 두기도 하여 광복운동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또한 신규식은 중국인 혁명지사들과도 교류하며 독립혁명운동을 협조하였고, 한중 양국의 지사 청년들로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친선 협조 관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된 후로도 이어져, 더욱 양국간의 친선 협조를 돈독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규식은 조완구(趙琬九), 김백련(金白蓮), 백순(白純), 박찬익(朴贊翊), 정신(鄭信) 등과 함께 단군을 숭봉하는 대종교(大倧敎)의 교회를 설치하고 일요일의 경배식(敬拜式)과 함께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 10월 3일 개천절 등 기념일에는 거류 동포들이 참석하는 경하식(慶賀式)을 거행하여 겨레 고유의 전통 사상을 선양하였다. 한편, 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전후하고서 중국지역의 독립운동 조직 및 지도자들이 전개하는 국내외에 대한 활동도 점점 활기를 띠게 되었다. 동제사를 중심으로 한 지도자들은 이미 1917년 8월 서전(瑞典)의 수도 스톡홀롬에서 열리는 만국 사회당 대회에도 대표를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였으며,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원동(遠東) 약소민족 대회에도 대표를 참가시켰으나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에 의해 새로운 독립운동 전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국내 동포들과도 긴밀히 연락하여 국내외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었고, 이에 동제사의 대표인 신규식 또한 앞장섰다. 우선, 김규식 등을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는 일과 전 국민운동을 일으켜 일본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하는 결의를 담은 비밀 서신을 국내로 전달하게 하였으며, 우리 대표단의 국제적 활동에 대해서는 중국의 혁명정부 관계자들로부터 협조와 지원하겠다는 승낙을 얻도록 하였다.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어 법무 총장에 임명되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21년에는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21년 10월에 그는 임시정부 특파 대표로 광동(廣東)에 파견되어 호법정부(護法政府, 또는 광동 정부)의 승인을 구하는 동시에, 호법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내용의 5개항을 요청하여 최초의 외교관계를 성취하였다. 1922년 3월에는 신규식 내각의 시정방침을 발표하였고, 태평양회의에 대한 외교수행 및 중국 호법정부와의 외교 협조의 대표적인 성과를 일구어냈다. 그러던 중, 1922년 9월 25일 신규식은 과로로 상해에서 43세를 영면하였으며, 상해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안장되었다. 이후 1993년 유해를 봉환하여 서울현충원에 안장하였다.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