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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추모비
남궁억(1863~1939)은 1884년에 최초의 영어학교인 동문학 수료 후, 고종황제의 통역관에 임명되었다. 1893년에는 내부 토목국장으로 임명되어 종로와 정동 일대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을 세웠다. 1896년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였고 1898년에는 나수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였으며, 1907년 양양의 현산학교를 설립해 구국교육을 펼쳤다. 또한 같은 해 대한협회를 창립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낙향하여 1919년에 모곡학교를 설립해 역사교육과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11월 기독교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십자당이 발각되어 일제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 병고에 시달리다가 1939년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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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응 묘
이진응(1847~1896)은 춘천 남면 하방곡리(현, 강촌리) 출신이자 이소응의 종형으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1896년 1월 습재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거의하였다. 춘천의병대장 이소응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춘천 관찰사 겸 선유사인 조인승을 처단하였다. 이후 서울 방면으로 진격하여 가평 부근 벌업산 전투에서 관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관군에 의해 춘천의진이 패하자 이소응 의병장은 병력 증강을 위해서 경기도 지평 감역으로 있던 맹영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2월 17일 이소응은 결국 제천에 있는 유인석의 의진에 합류하였다. 종제인 이소응이 지평으로 떠난 후 이진응은 춘천의진을 이어받아 의병 활동을 하던 중 2월 8일 현 춘천시 약사동에서 관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진응의 사후에는 그의 동생 이경응이 이진응의 의병을 이어받아 싸웠으나 패하고, 남은 의병을 이끌고 강릉의진 민용호에게로 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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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응 비
습재 이소응(1852~1930)은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화서학파의 일원으로 유중교 선생의 제자이다. 1896년 1월 20일에 유중락·이만응을 중심으로 한 의병 1,000여 명이 춘천부에 운집하여 그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이소응은 격문을 전국에 보내, 함께 의거하여 무도한 적들을 토벌할 것을 호소하여 많은 호응을 얻었다. 초기에는 춘천부사 겸 선유사 조인승을 처형하는 등 크게 기세를 떨쳤으나, 무기가 부족한 데다 조직과 훈련이 허술하였던 의병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관군에 패배하였다. 그는 제천의 유인석 의진으로 들어가 의병활동을 전개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고, 유인석 의진이 패퇴하여 서간도로 망명할 때도 동행했다. 이후 40여 년간 구국항쟁을 하다가 민족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1930년 3월 25일 이역만리 타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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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순 묘
윤도순(1860~1930)은 춘천군 동면 감정리 태생의 천도교인으로 춘천군 동면 감정리(東面 甘井里)에 거주하면서 춘천 읍내의 3·1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천도교 평강교구(平康敎區)에서 독립선언서 150매를 보낸 것이 1919년 3월 4일 일제에 발각되었지만 만세운동의 분위기는 3월 말에 형성되었다. 구체적으로 춘천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표면에 나타난 것으로는 3월 28일 천도교도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본래 춘천 천도교 측의 계획은 천도교 봉훈(奉訓)인 그와 천도교 교구장(敎區長)인 이준용(李俊容)이 3월 중순에 전개하기로 하고 추진되었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북면 만천리(北面 萬泉里)·가연리(佳淵里)·송암리(松岩里)를 돌아다니면서 주민을 계몽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로써 이곳의 만세운동 계획 추진이 잠시 중단되어 3월 말경에야 비로소 전개되었다. 그는 이해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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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순 공적비
윤도순(1860 - 1930)은 춘천군 동면 감정리 태생의 천도교인으로 춘천군 동면 감정리(東面 甘井里)에 거주하면서 춘천읍내의 3·1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천도교 평강교구(平康敎區)에서 독립선언서 150매를 보낸 것이 1919년 3월 4일 일제에 발각되자 3월 초에는 별다른 활동은 없었고 3월 말경에 독립만세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춘천에서 독립만세운동이 표면에 나타난 것으로는 3월 28일 천도교도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본래 춘천 천도교측의 계획은 천도교 봉훈(奉訓)인 그와 천도교 교구장(敎區長)인 이준용(李俊容)이 3월 중순에 전개하기로 하고 추진되었던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북면 만천리(北面 萬泉里)·가연리(佳淵里)·송암리(松岩里)를 돌아다니면서 주민을 계몽하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붙잡혔다. 이로써 이곳의 만세운동계획 추진이 잠시 중단되어 3월 말경에야 비로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해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아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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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농고항일운동기념탑
춘천농공고등학교는 일제 36년을 거치면서 식민지 교육을 받는 가운데서도 투철한 항일정신으로 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이 발생하자 전교생이 만세 시위에 동참한 강원도 최초의 유일한 학교로, 이를 효시로 일인 교사 배척, 식민지 교육 반대, 광주학생사건 연대투쟁, 비밀결사 상록회 사건, 독서회 사건, 일본 천황과 총독에게 보낸 통치 반대 청원 사건 등 크고 작은 일련의 항일운동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역사의 주역으로 옥고를 치른 많은 본교 애국 학생들의 영혼을 추모하고 후손들에게 역사교육의 장으로 삼고자 총동창회 동문들의 뜻을 모아 1995년 8월 25일 개교 85주년 및 광복 50년을 맞아 이 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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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 한용섭 기념비
이준용(1860~1945)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교도로서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여 공주 일대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때 의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해 9월 강원도 춘천에서 거의한 지용기 의병의 대장소를 자신의 집에 설치하게 하고, 전답을 팔아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에는 천도교 춘천교구장으로 있으면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윤도순(尹道淳)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3월 28일 춘천 읍내 시장에서 박순교(朴順交)·허기준(許基俊)·허현(許鉉) 등과 함께 수십 명의 시위군중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시위 현장에서 헌병경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고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이후 공소하였으나 6월 11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용섭(1884~1944)은 강원도 홍천읍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후에는 춘천시 서면 방동리에 정착하여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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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용 묘
이준용(1860~1945)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동학교도로서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여 공주 일대 전투에 참전하였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는데 이때 의병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해 9월 강원도 춘천에서 거의한 지용기 의병의 대장소를 자신의 집에 설치하게 하고, 전답을 팔아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에는 천도교 춘천교구장으로 있으면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윤도순(尹道淳) 등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3월 28일 춘천 읍내 시장에서 박순교(朴順交)·허기준(許基俊)·허현(許鉉) 등과 함께 수십 명의 시위군중들을 이끌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로 인해 시위 현장에서 헌병경찰에게 붙잡혀 고초를 겪고 1919년 4월 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받았다. 이후 공소하였으나 6월 11일 경성복심법원과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각각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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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록탑
「상록회」는 1936년 춘천고등학교(당시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만든 단체로, 독서를 통한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자주독립을 주창했다. 1938년 일제에 의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이 벌어져 137명이 체포되었으며, 그중 10명이 2년 6개월 실형을 받아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고, 그중 백흥기는 옥사했다. 그 후 제2차 상록회 사건으로 이어져 1941년에는 또다시 24명의 학생들이 수감되었고 이 가운데 이광훈, 고웅주 등 2명이 옥사했다. 애국충정으로 산화한 상록회원들의 얼을 기리고 이를 계승·발전시켜, 춘천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의 상록정신을 드높이고자 춘고동문회에서 1967년 4월 25일 제43회 개교기념일을 기해 『상록탑』을 건립하였다. 탑의 전면에는 상록탑 건립 취지문을, 좌측에는 광복을 가리키는 상록회원들의 모습을 조각하였고, 탑의 3개의 지주는 둥근 구를 받쳐 든 모양으로 그들의 애국정신과 의지를 표현하고 그들의 넋의 결실이 온 누리에 광명을 뿌리는 태양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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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항일애국선열 추모탑
강원도 항일애국선열 추모탑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국의 독립과 국권 회복을 위해 항일활동을 전개한 강원지역 애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나아가 후손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탑의 모양은 의병들이 사용하였던 창을 의미하며 동시에 민족정기와 정의를 상징한다. 19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강원도 춘천시 중도에 최초로 건립되었으며, 이후 현 위치로 이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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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당 3.1독립만세운동기념비
평창읍과 원당리 주민들이 2020년 11월 30일 마을 중심인 원당리 261번지에 원당 3.1독립만세운동기념비를 건립했다. 기념비에는 일제 강점기인 1919년 원당리에서 생활하며 항일운동의 선봉에 섰던 손상봉·유영묵·김흥지 3인의 독립운동 발자취가 새겨져 있다. 일제 강점기에 원당리에 거주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3인의 잊혀진 역사를 발굴하여 애국심과 민족혼을 널리 알리기 위해 건립한 기념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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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원 사당(창의사)
김덕원(1876~1946)은 강원도 홍천(洪川) 사람으로, 동학에 입도 후 갑오동학농민혁명에도 참여하여 물걸리 동창을 습격해 동학혁명군의 군자금과 군수품을 확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동학군의 마지막 항전지인 홍천 서석 자작고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3일 내촌면 물걸리(동창마을의 비석거리, 현 팔열각 일대)에서 내촌면, 화촌면, 서석면, 내면, 인제군 기린면 등지의 주민 수천 명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던 중 일본 헌병이 시위대열에 무차별 발포하여 현장에서 8명이 순국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입게 되자 시위군중에게 해산할 것을 명하고 피신하였다. 일본 헌병들은 물걸리 마을로 덮쳐 그의 본가에 불을 질러 가재를 전소시키고 계속 추적하므로 3년 간 피신 생활을 하던 중 일경의 검속에 체포되어 4년 간의 옥고를 치렀으며,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양 눈을 실명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