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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기념관
함석헌(1901 - 1989)은 해방 이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인간혁명』, 『역사와 민족』 등을 저술한 작가. 문필가, 민중운동가이다.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0년 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류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을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1947년 3월 월남하여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였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면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기탄없이 비판하였고,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면서 자유당정권에 도전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로 군사혁명정권에 도전하였다. 1962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Quaker敎)와의 친밀관계를 굳혔다. 1967년 장준하(張俊河)의 국회의원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70년 4월≪씨ᄋᆞᆯ의 소리≫를 창간하였고,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주요저서로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인간혁명≫(1961)·≪역사와 민족≫(1964)·≪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통일의 길≫(1984) 등이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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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법린 묘
김법린(1899 - 1964)은 해방 이후 제3대 민의원, 원자력원장, 동국대학교 총장 등을 역임한 승려. 독립운동가, 정치인, 학자이다. 경상북도 영천 출신. 필명은 철아(鐵啞), 호는 범산(梵山)이다. 14세에 출가하여 1915년 동래 범어사(梵魚寺)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3 · 1운동 때 영남의 불교계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을 졸업하였으며, 이듬해 프랑스로 건너가서 1926년 파리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 1928년 백성욱(白性郁) · 김상호(金尙昊) 등과 함께 불교청년회의 중흥을 도모하였고, 1929년 조선불교선교양종승려대회를 개최하였다. 1930년 한용운(韓龍雲)의 뜻을 이어 일제에 대항하는 비밀결사조직인 만당(卍黨)을 결성하였다. 1930년 일본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에서 불교를 연구하였으며, 1931년 동경에서 조선청년동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부터는 다솔사(多率寺) · 해인사(海印寺) · 범어사 등의 사찰을 다니면서 불교의 교학을 강의하는 한편, 독립정신의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1938년 만당사건으로 진주에서 검거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흥에서 투옥되었다. 그러나 감옥에서 풀려나와 다시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불교계에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1945년 겨울 불교중앙총무위원직을 맡았을 때에는 미군정장관 하지를 만나 일본인 승려들이 머물렀던 사찰을 종단에서 인수할 수 있게끔 협의하는 등, 여러 면에서 불교혁신운동을 벌였으며, 동국학원(東國學院)의 이사장직을 맡아 동국대학교의 발전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1952년 문교부장관에 임명되었고, 195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이 되었으며, 제3대 민의원으로 피선되는 등 정치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1959년 원자력원장을 역임하였고,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3년 동국대학교 총장이 되어 학교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세속을 떠났던 승려의 신분이면서도 독립운동과 정치활동, 교육계의 활동에 주력하였으며, 불교계의 정화와 발전을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던 행정가 · 학자로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주요논문으로는 「정교분립(政敎分立)에 대하여」 · 「3 · 1운동과 불교」 · 「12인연에 대하여」 등이 있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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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리사 묘
차미리사(1880 - 1955)는 일제강점기 근화여학교 교장, 근화학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여성운동가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경기도 고양 출신. 미리사는 세례명이다. 남편이 죽은 뒤 기독교에 입교, 미국인 여선교사를 통하여 선진국의 실정 및 여성의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에 몸을 숨겨 상하이[上海]로 출국한 뒤 쑤저우[蘇州]에 있는 버지니아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에 졸업하고 양주삼(梁柱三)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뒤 캔자스(Kansas) 주의 더스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국내외 비밀 연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 이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순회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때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었다. 광복이 되자 그 동안 계획해 왔던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그 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2002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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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 집
송진우(1887 - 1945)는 일제강점기 동아일보사 사장, 한국민주당 수석총무 등을 역임한 언론인. 정치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신평(新平). 호는 고하(古下). 어렸을때 이름은 옥윤(玉潤). 전라남도 담양 출생. 송훈(宋壎)의 넷째아들로, 어머니는 양씨(梁氏)이다.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귀환한 후 중앙중학교의 교장으로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었다.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사장에 취임, 이후 30여 년 간 『동아일보』를 이끌었다. 1916년에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中央學校) 교감이 되었으며 이어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8년 김성수 · 현상윤(玄相允) · 최린(崔麟) ·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중앙학교 숙직실을 근거지로 독립운동을 펼 방책을 꾸며 천도교와 기독교의 궐기가 확정되고 양교계의 행동통일이 이룩되어 3 · 1운동으로 결실되었다. 3 · 1운동이 일어난 며칠 뒤 구속되어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 다음해 10월 경성복심법원 판결에서 적용법조문 관계로 무죄선고를 받고 곧 출옥하였으나 사실상 1년 반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21년 동아일보사가 주식회사로 되면서 김성수의 뒤를 이어 3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로부터 1940년 강제 폐간될 때까지 사장 또는 고문 · 주필 등으로 동아일보와 운명을 같이하였다. 1922년에는 『동아일보』를 통하여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을 벌인 데 이어 민립대학설립운동(民立大學設立運動)을 제창, 추진하였으며, 1923년 재외동포위문회를 조직하고 국내 각지를 순회하여 위문금품의 모집운동을 개시하였다. 1924년 4월에 동아일보사 사장을 사임, 이해 10월에 동아일보사 고문에 취임하고 다음해에 주필에 취임하였다. 1925년에는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제1회 범태평양회의에 서재필(徐載弼) 등과 함께 참석하고 귀국한 뒤, 「세계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라는 논설을 12회에 걸쳐 집필, 연재하여 한반도의 앞날을 예언하였다. 1926년 3월 국제농민본부에서 보낸 3 · 1절 기념사 관계로 『동아일보』가 제2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이때 주필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자 정인보(鄭寅普)와 유칙(遺勅)주1의 작성을 획책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또, 같은 해 11월 ‘국제농민본부기념사’ 사건으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어 복역하던 중, 다음해 2월 일본의 새로운 왕의 즉위를 기념하는 특사로 출옥하였다. 1927년 10월에는 김성수의 뒤를 이어 다시 동아일보사 제6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28년 제3회 범태평양회의가 일본 경도(京都)에서 개최되어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참석하였으며, 1930년에는 『동아일보』 창간 10주년기념축사 관계로 제3차 무기정간을 당하고 그 해 9월에 속간하였다. 1931년 4월에 『동아일보』를 통하여 이충무공유적보존운동을 일으켜 모금으로 아산 현충사를 중수하였다. 1931년부터 4년간은 동아일보사를 중심으로 문맹퇴치를 위하여 하기 방학에 ‘브나로드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만주에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자 이 사건이 일본의 한중이간책(韓中離間策)임을 사설로 논파하여 한중민간의 보복중지를 호소하며, 또 희생된 중국인의 위문사업을 전개하여 뒷날 장개석(蔣介石) 국민정부주석으로부터 은패(銀牌)를 받았다. 1933년에는 동아일보사가 6년간의 준비 끝에 마련한 새 철자법에 의한 활자를 사용하는 등 한글의 보존과 발전에 힘썼다. 1934년 『동아일보』의 사설로써 신사참배 거부를 옹호 지지하여 종교의 자유를 지지하였다. 1936년 8월에는 베를린올림픽대회 마라톤우승자 손기정(孫基禎)의 운동복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日章旗)를 지워버린 사진을 신문에 게재한 사건으로 『동아일보』가 제4차 무기정간을 당하자 총독부의 압력으로 11월에 사장을 사임하였다. 다음해 6월 『동아일보』가 복간되어 고문에 취임하였으나, 1939년 12월 총독부로부터 『동아일보』의 자진폐간을 강요당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194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객들에게 『동아일보』 폐간의 부당함을 역설하고 귀국 도중 피검, 구속되어 다시 폐간을 강요받아 같은 해 8월에 『동아일보』는 강제로 폐간되었다.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서 총독부로부터 학도병 권유유세 등 대일협력을 강요받았으나 “『동아일보』는 내 입이요 내 귀며 호흡하는 코요 손과 발인데, 그 전부를 잘려버린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수 있는가!” 하며 거부하고 병을 핑계로 드러누웠다. 1943년 주식회사 동아일보사 청산위원회가 해체되고, 동본사(東本社)가 설립되자 사장에 취임하였다. 1945년 8월 11일 일본총독부측과 해방 후 치안권 위임 등을 제안 받았으나 그의 정세 판단에 따라 거부하였고, 이후 조선총독부는 여운형과 접촉하였다. 광복이 되자 1945년 9월 7일 국민대회준비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김성수, 김병로, 원세훈(元世勳), 장덕수(張德秀), 서상일(徐相日) 9월 16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이 결성되자 중앙집행위원회 수석총무에 추대되고, 12월 1일 『동김병로 아일보』가 복간되어 제8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12월 28일에는 신탁통치문제로 아놀드(Arnold, A. V.) 미군정장관과 회담을 통하여 반탁시위의 정당성을 강조하였으며, 29일 밤에는 경교장(京橋莊)에서 임시정부요인들과 회담하였다. 미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운동으로 반탁에 대한 신중론을 피력하고 자택으로 돌아온 뒤 다음날 30일 상오 6시 한현우(韓賢宇)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서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죽었다. 1963년 3월 1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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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 3사자 동상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는 일제강점기 탄압을 피해 지금의 서울시 도봉구로 피난하였다. 가인 김병로는 1934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219-5번지에 거주하였으며, 고하 송진우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219-5번지, 위당 정인보는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도봉구 창동 733-4번지에 거주하였다. 사람들은 도봉구에 은둔한 세 위인을 일컬어 '창동3사자'라 칭하였다. 도봉구는 근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창동 3사자의 재조명 및 구민의 애국심 고취를 위해 '창동 3사자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을 2016년부터 추진하여 이 동상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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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로 집 터
김병로(1887 - 1964)는 일제강점기 항일운동 관련한 각종 사건을 수임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던 변호사이다. 해방 이후에는 정치인이자 법조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전라북도 순창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이고 호는 가인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해에 향리의 용추사를 찾아온 최익현의 열변에 감화, 1906년 20세 때 7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을 습격하였다. 변호사 시절 많은 독립운동 관련사건을 무료 변론하였으며, 여러 방면에서 사회활동으로 독립운동에 공헌했다. 1923년 허헌 · 김용무 · 김태영 등과 서울 인사동에 형사공동연구회를 창설하였다. 겉으로는 연구단체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항일 변호사들이 공동전선을 형성, 법정을 통해 ‘독립운동이 무죄’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 후원단체였다. 이 연구회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무료 변론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을 돌보는 일까지 했다. 10여 년 동안 맡았던 사건 가운데에는 여운형 · 안창호 등에 대한 치안유지법위반사건, 김상옥의사사건, 광주항일학생운동, 6 · 10만세운동, 정의부 · 광복단사건, 조선공산당사건 등이 있었다. 한편 1927년에 이상재의 뒤를 이어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이 되었고, 광주학생사건 때는 진상조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32년 보성전문학교의 이사로서 운영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김성수에게 인수를 알선하였으며, 신간회가 해체되고 사상사건의 변론에서도 제한을 받게 되자, 1932년부터는 경기도 양주군으로 내려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될 때까지 13년간을 은둔생활로 일관하였다. 따라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일제의 배급도 받지 않았다. 1964년 1월 13일 간염으로 서울 인현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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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시경 구 묘
주시경(1876 - 1914)은 일제강점기 『국어문법』, 『말의 소리』 등을 저술한 학자. 국어학자이다. 본관은 상주(尙州). 초명은 상호(相鎬), 일명 한힌샘 · 백천(白泉). 황해도 봉산 출생. 아버지는 주학원(周鶴苑)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이다. 둘째아들로 둘째아버지 주학만(周鶴萬)에게 입양되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우다가 양아버지를 따라 1887년 6월에 상경하였다. 국어운동은 특히 한어개인교사, 상동사립학숙 국어문법과 병설, 상동청년학원 교사 및 국어야학과 설치, 국어강습소 및 조선어강습원 개설 등에서 심혈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후에는 숙명여자고등학교를 비롯하여 무릇 9개교에서 가르치는 한편, 일요일에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수많은 후진을 깨우치기에 ‘주보따리’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동분서주하며 정열을 불태웠다. 그가 가장 정성을 다한 국어연구는 국문동식회를 비롯한 의학교내 국어연구회 연구원 및 제술원, 학부 국문연구소 주임위원(奏任委員), 국어강습소 졸업생과 설립한 국어연구학회, 조선광문회 사전편찬 등의 활동을 통하여 깊어졌다. 그의 연구는 새받침을 처음으로 주장한 1897년 『독립신문』에 발표한 논설 「국문론」에서 그 방향이 시사된 바와 같이 우리말을 핵심으로 한 국어문법의 체계화였다. 주된 업적은 필사본 『국문문법』(1905), 유인본 『대한국어문법』 (國文講義, 1906), 국문연구소 유인본 「국문연구안」(1907∼1908), 『국어문전음학』(1908), 필사본 『말』(1908년 경), 국문연구소 필사본 『국문연구』(1909), 유인본 『고등국어문전』(1909년 경) 등이며, 학문적 축적을 거쳐 대표적 저술인 『국어문법』(1910)을 이룩하였다. 이 책은 독자적으로 개척한 초기국어문법의 하나로서 국어의 특성에 입각한 음운 · 품사 · 구문 · 어휘의 4부를 갖추고 있다. 특히, 그 구문론은 직소분석(IC분석)의 원리가 엿보이는 구문도해를 최초로 이룩한 것으로 크게 평가되고 있다. 그의 연구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거듭된 그 수정판(1911 · 1913), 유인본 『소리갈』(1913년 경)을 거치는 동안에 순우리말로 서술하기에 그 나름대로 성공한 『말의 소리』(1914)를 저술하였다. 마지막 저술인 이 책은 구조언어학적 이론을 구체적으로 창안한 세계 최초의 업적으로 높이 평가된다. 즉, 음운론에서 음소(音素, phoneme)주1에 해당하는 ‘고나’의 발견, 형태론으로 어소(語素, morpheme)주2에 해당하는 ‘늣씨’의 발견은 서구언어학에 수십 년 앞선 큰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수리학을 바탕으로 한 논리적 구성으로 심화시켜 이러한 학문을 이룩하였는데, 그것은 황무지에서 국어학을 개척한 공로로 인정된다. 그는 또한 이러한 논리에 입각해서 새받침에 의한 표의주의적 철자법, 한자폐지와 한자어의 순화, 한글의 풀어쓰기 등 급진적인 어문혁명을 부르짖었다. 그의 이러한 학문과 주장은 학교와 강습소에서 길러낸 많은 후진이 형성된 후 주시경학파를 통해서 이어졌으며, 후대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의 후진양성에 관해서는 새로 나타난 「한글모죽보기」(1917년 경)에서 최현배(崔鉉培) · 신명균(申明均) · 김두봉(金枓奉) · 권덕규(權悳奎) · 정열모(鄭烈模) · 이규영(李奎榮) · 장지영(張志暎) · 정국채(鄭國采) · 김원우(金元祐) · 안동수(安東洙) 등 550여 명의 강습생 명단으로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국어국문의 과학적 연구와 교육이 민족의 독립과 발전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8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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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섭 문학비
주요섭(1902 - 1972)은 일제강점기 「추운 밤」, 「사랑손님과 어머니」, 「봉천역식당」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다. 호는 여심(餘心) 또는 여심생(餘心生). 평양 출신. 목사 주공삼(朱孔三)의 8남매 중 둘째 아들이다. 시인 주요한(朱耀翰)의 아우이다. 평양에서 성장하였다. 1921년 4월『개벽(開闢)』 제10호에 단편소설 「추운 밤」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여대생과 밍크코우트」(1970)에 이르기까지 40편 가량의 단편소설을 비롯하여 「구름을 잡으려고」(1923)와 「길」(1938) 등 4편의 장편소설과 「첫사랑」(1925)과 「미완성(未完成)」(1936) 등 2편의 중편소설을 남겼다. 「김유신(Kim Yu Shin)」(1947과 「The Frost of the White Rock」(1963) 등의 영문 소설도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대략 4단계의 변모 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첫째는 「추운 밤」부터 「인력거군(人力車軍)」(1925)·「살인(殺人)」(1925)·「개밥」(1927) 등이 쓰여진 1921년부터 1927년까지의 시기로 주로 극빈한 사람들의 생활과 갈등을 동정하는 시선과 인도주의적 자세로 그려보였다. 이것은 이른바 신경향파로 지목되는 당대의 유행적 경향과도 일치한다. 둘째는 「할머니」(1930)에서 「사랑손님과 어머니」(1935)·「아네모네의 마담」(1936)·「추물(醜物)」(1936)·「봉천역식당(奉天驛食堂)」(1937)·「왜 왔던고」(1937)에 이르는 시기로, 문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도 바로 이 때이다. 그의 대표작 및 성숙한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며 기성 윤리나 외모 또는 배신으로 인한 사랑의 좌절이나 향수 등을 그려 삶의 의미를 추구하였다. 셋째는 1946년부터 1958년까지의 시기로 「입을 열어 말하라」(1946)·「대학교수(大學敎授)와 모리배(謀利輩)」(1948)·「해방일주년(解放一周年)」(1948)·「이십오년」(1950) 등을 통하여 광복 후의 무질서와 혼란을 고발하고 비판하면서 사회의식을 각성하고 자아의 자각을 탐색하여나갔다. 넷째는 1960년부터 1970년까지의 시기로 「세 죽음」(1965)·「열 줌의 흙」(1967)·「죽고 싶어하는 여인」(1968)·「여대생과 밍크코우트」 등을 통하여 삶과 죽음의 문제, 인간다운 삶의 문제 등을 다루었다. 이러한 변모 과정은 근대적 리얼리즘의 일반적인 성격이 한국 문학 속에서 보편적인 태도와 기법으로 나타나게 되는 데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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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기념관
유일한(1895-1971)은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이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다.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하였다. 1942년 당시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펄벅과 교유하기도 한 그는 동년 8월 로스엔젤레스 시청 앞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현기식(懸旗式)에 참여하여 이승만(李承晩)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등 맹호군 창설과 현기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동년 10월 미국정부 전략청(戰略廳)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企劃硏究部) 위원장이었던 그에게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자,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金容成), 이사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 & Pacific War)』이란 비망록을 작성·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정한경·전경무(田耕武)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론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또한 곧 이어 동년 1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의 일환인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특수공작을 위한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에 입대하여 제1조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비무장전투법·지도읽기·파괴·무전·촬영·낙하산훈련·비밀먹 사용법·선전·일본인의 특성 등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OSS작전과 양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에 침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국내정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194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민족자본 사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육영사업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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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묘
이승만(1875-1965)의 호는 우남, 초명은 이승룡이며,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제1, 2, 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이권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열린 만민공동회에 참여하면서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4월 일간지인 『매일신문』을 창간해 기재원(기자)과 주필을 지냈으며, 8월에는 『제국신문』을 창간해 편집과 논설을 담당하였다. 11월 투서사건으로 독립협회 간부들이 체포되자 이에 대한 항의 시위를 주도하였고, 이들이 석방된 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1899년 1월 박영효(朴泳孝)와 관련된 고종 황제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1904년 8월까지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그가 구금된 직후 주한미국공사였던 알렌이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지만 거부당하였고, 1899년 1월 말 탈옥을 시도하다 실패해 종신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감옥에서 『청일전기(淸日戰紀)』를 편역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또한 『신영한사전』을 편찬하였으며, 『제국신문』에 논설을 투고하였다. 『독립정신』은 그가 출옥한 이후인 1910년 LA에서 처음으로 출판되었다. 『청일전기(淸日戰紀)』는 1917년 하와이에서 출간되었다. 1904년 8월 9일 특별 사면령을 받고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같은 해 11월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圭卨)의 주선으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1905년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University)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한 직후 한국에 왔던 선교사의 주선으로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Hugh A. Dinsmore), 국무장관 존 헤이(John Hay)와 면담하였다. 1905년 4월 세례를 받았고, 8월에는 태프트(William H. Taft) 국무장관의 주선으로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만났다. 이승만은 이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청원하였지만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을 지지하는 정책을 취하게 되어 성과를 거두지 못 하였다. 대학 재학 시 미국의 대외정책이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도록 활동하였던 스티븐슨(Stevens, D.W.)을 암살한 전명운(田明雲)과 장인환(張仁煥)의 재판에 통역요청을 받았으나, 미국 사회 내의 부정적 여론을 이유로 거부하였다. 1910년 3월 재미동포 조직이었던 국민회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8월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청년부 간사이자 감리교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 1912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의 압박을 받자, 같은 해 4월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미국 미네소타에서 열린 국제감리교대회 참석을 빌미로 도미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 귀국 때까지 계속 미국에서 활동하였다. 국제감리교대회 참석 후 네브라스카(Nebraska)에 갔다가 1900년대 초 옥중에서 만났던 박용만(朴容萬)의 도움으로 1913년 2월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같은 해 8월부터 호놀룰루에서 한인감리교회의 한인기독학원을 운영하였으며, 『태평양잡지』를 발간하였다. 이승만은 이 시기 ‘105인 사건’의 실상을 다룬 『한국교회핍박』을 저술하였고, 옥중 저서인 『독립정신』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또한 ‘한인기독학원’을 ‘한인중앙학원’으로 개명하고 민족교육과 선교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지 1년이 지날 무렵 박용만이 무력투쟁을 위해 국민군단을 창설하자, 이에 이승만은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이승만은 재미동포의 가장 큰 조직이었던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고, 국민군단의 일본군 선박 폭파미수사건을 계기로 박용만이 하와이를 떠난 후 국민회를 주도적으로 운영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민족자결주의 주창하면서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을 구상하였고, 이승만은 한국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둘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1919년 2월 25일 윌슨 대통령에게 제출하여 장차 완전한 독립을 준다는 보장 하에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 것이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9월 6일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으로 추대하여 1920년 12월부터 약 6개월 동안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는 1921년 5월 워싱턴에서 개최될 군축회의(The Washington Disarmament Conference)에 참석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미국으로 갔다. 1925년 3월 11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이승만을 탄핵해 대통령직을 박탈하였다. 임시정부 인사들은 이승만이 주장한 국제연맹 위임통치안을 미국에 의한 위임통치로 오해하고 강하게 비판하였다. 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직접 직책을 수행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함께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의를 무시하였다는 것도 주요한 이유였다. 조소앙은 이 탄핵안을 반대하였지만, 대다수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도한 탄핵안은 통과되었다. 의정원의 폐지령에도 불구하고 구미위원부의 활동은 1929년까지 계속되었고, 이승만은 여기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였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병옥, 허정, 장택상 등이 당시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왔던 유학생들이었다.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을 도맡았던 이승만은 1932년 11월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임무를 받고 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3년 1월과 2월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국제연맹에서의 활동이 인정받으면서 1933년 11월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외무위원회 외교위원, 1940년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42년 8월 29일부터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일본의 패망과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방송을 시작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미국 전략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과 연락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미군과 함께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결하는 활동을 하였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미국과 소련이 얄타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합의한 후에는 소련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10월 16일 귀국하였다. 귀국 직전 일본 도쿄에서 맥아더 장군, 하지 미군정 사령관과 회합을 한 후 귀국한 이승만은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과 한국민주당의 영수직을 거절하였다. 그 대신 1945년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해 회장에 추대되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5년 7월 19일 하와이 호놀룰루 요양원에서 사망하였다. 같은 해 7월 27일 가족장으로 영결식이 있었고,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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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묘역
국립서울현충원은 1993년 상해만국공묘에 안치되어 있던 상해 임시정부 요인 5위의 영현을 환국봉안하면서 임시정부요인 묘역을 조성하였다. 임시정부요인 묘역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 직위를 역임한 순국선열 18위가 모셔져 있다. 한국통사, 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해 민족혼을 일깨웠던 박은식 대한민국임시정부 2대 대통령을 비롯해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지사의 유해 5위를 1993년 8월 상해만국공묘로부터 모셔 오면서 조성된 묘역이다. 위쪽 묘역에는 국가원수급인 박은식, 이상룡, 홍진, 양기탁 4위가 모셔져 있고, 아래쪽 묘역에는 국무총리를 역임했던 노백린, 외무총장을 역임했던 신규식, 광복군총사령관을 역임했던 지청천 장군 등 14위가 모셔져 있다. 이 곳에 계신 순국선열 18위는 다음과 같다. 양기탁 국무령, 홍진 국무령, 박은식 2대 대통령, 이상룡 초대국무령, 황학수 생계부장, 이유필 내무총장, 박찬익 외무총장, 김인전 의정원의장, 신규식 국무총리, 노백린 국무총리, 김동삼 국무원, 조경한 국무위원, 지청천 군무부장, 오영선 법무총장, 김성숙 국무위원, 이강 의정원의장, 손정도 의정원의장, 윤세용 국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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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열대
충열대는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해 국내는 물론 중국, 러시아, 미국 등지에서 의병활동과 독립투쟁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후 묘역에 안장된 순국선열 및 애국지사들과 시신도 없고 후손도 없어서 무후선열제단에 위패로 봉안된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추모하는 제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