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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공원
김도연(1894-1967)은 일제강점기 2·8독립운동, 조선어학회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이칭은 상산(常山)이다. 경기도 양천군 남산면 염창리(현 서울 강서구 염창동 증미마을)출신으로 어려서 등촌동 허씨댁 서당에서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15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아현동 태극학교, 보성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공부했다. 1914년 긴죠 중학교 3학년에 입학하였고, 1919년 게이오[慶應]대학 이재학부를 수료했다. 도쿄 유학 시절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9개월의 금고형을 선고받고 동경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4월 출옥하였고, 1921년 일본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22년 학업과 항일운동을 위해 미국으로 유학, 웨슬리안대학교 3학년에 입학하여 경제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여 1927년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1년 워싱턴의 아메리칸대학 대학원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초기부터 북미한인유학생총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주도적으로 학생운동을 펼치는 한편, 한인사회의 발전과 해외동포 구제를 위해 노력했고, 특히 1927년부터 윤치영(尹致暎), 장덕수(張德秀) 등과 함께 대한인동지회 가입,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 등을 통해 이승만(李承晩) 지지 활동을 전개했다. 1932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강사를 지내다, 1934년 조선흥업주식회사를 창립했다. 1942년 일제가 조작한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 체포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의 선고를 받았고, 함흥형무소에서 석방될 때까지 약 2년간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여운형(呂運亨)의 건국준비위원회 참여 권유를 거부한 장덕수와 함께 한국민주당 건설에 주력하며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6년 남조선 민주의원 의원과 남조선 과도정부 입법의원에 당선되었다. 1948년 5월 제헌국회 총선거 때 한국민주당 소속으로 서대문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국회 초대 재정경제분과 위원장에 선출되었고, 1948년 8월부터 1950년까지 초대 재무부 장관으로 활동했다. 1954년 제3대 민의원, 1958년 제4대 민의원, 1960년 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8월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국회의 인준투표에서 부결되었고, 민주당 구파동지회를 결성해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였으나,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의원자격이 상실되었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 6대 국회에서는 야당의 참패하였는데, 한일협정 문제가 사회 이슈로 등장하자 강력한 야당 출현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65년 5월 자유민주당과 민정당이 합당, 민중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김도연은 같은 해 6월 민중당 대표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8월 한일협정 비준에 반대해 의원직을 사퇴했다. 이후 제7대 국회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생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고(1963년) 1967년 숙환으로 영면하여 사회장을 치렀고 북한산 순국선열 묘역에 안장되었다. 1991년에 애국장을 수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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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옥 동상
권기옥(1901-1988)은 일제강점기 때 남경 국민정부 항공서 부비항원, 대한애국부인회 사교부장 등을 역임한 비행사 · 독립운동가 여성이며 이칭은 임국영(林國英)이다. 3·1운동 참여 후 상해로 망명했다. 1925년 운남 육군항공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가 됐다. 장개석의 국민혁명군 소속 비행사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단체와 교류하다가 일본 밀정 모함을 받고 체포·수감되었다. 이후 임시정부 산하 한국애국부인회 재건, 광복군 비행대 편성 구상 등의 활동을 했다. 해방 후 한때 정치활동을 했으며, 한중문화협회 부회장, 재향군인회부인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1988년 4월 19일 87세로 별세하자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2003년 국가보훈처가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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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 순교기념비
주기철(1897-1944)은 일제강점기 마산 문창교회, 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순교하였다. 주기철은 경상남도 웅천 출신으로 1921년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 1926년 졸업하였다. 1926년 부산 초량교회의 목사로 부임하였고, 경남성경학원을 세워 후진교육에 힘썼다. 1931년 9월 마산 문창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였고, 저명한 목사로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1936년 여름,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고 그 교회에는 민족주의자 조만식(曺晩植)·유계준(劉啓俊)·오윤선(吳胤善) 등이 출석하고 있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강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그는 1939년 7월 경상북도 의성의 농우회사건(農友會事件)에 연루되어 검속되었다가 1940년 2월에 석방되어 평양으로 돌아온 뒤, 산정현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도’를 최후로 교인들에게 전하였다. 이 설교 사건으로 경찰이 이틀 후에 그를 검거하였고, 그때 산정현교회 목사직을 파면 당하였다. 파면은 평양노회의 결의형식이었다. 그리고 산정현교회도 동시에 폐쇄되었다. 감옥에서 5년간 고생하다가 1944년 4월 13일 병감(病監)으로 옮겨지고 4월 20일 부인 오정모와 마지막 면회를 한 뒤 4월 21일 감옥에서 병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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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정 터(김성숙 집 터)
김성숙(1898-1969)은 호(號)는 운암(雲巖)이고 이명(異名)은 성암(星巖),창숙(昌淑)등이 있다. 1916년 출가하여 용문사, 봉선사에 있으면서 '성숙'이라는 법명을 받음. 이 곳에서 손병희, 김법린, 한용운 등과 교류함.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격문을 뿌려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중국에 건너가 창일당, 의열단, 광저우 혁명,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선연맹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고 약산 김원봉 선생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지도위원 겸 정치부장을 지냈으며 1942년 민족전선연맹을 해체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통합 후 내무차장, 국무위원 등을 지냈다. 1945년 몽양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였으나 여운형의 피살로 세력이 기울었으며 이후 근로인민당 재건 사건, 통일사회당 사건 등으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는 혐의로 옥고를 치름. 1964년 지인들이 비나 피하라는 의미의 ‘피우정(避雨亭)’을 지어줌, 1969년 4월 12일 별세하였다. 1982년 정부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2004년 7월 국립묘지에 유해를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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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학회회관
서북학회는 1908년 서북 · 관서 · 해서지방 출신자들이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이다. 서북학회는 1909년 초 신민회와 같이 독립전쟁전략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여 독립군기지건설에 주력하여 국외독립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국내활동 특히 교육운동은 일제하 민족운동의 원동력이었다. 서북학회 구성원들은 지금은 제국주의 시대로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나 민족이 힘이 약한 나라나 민족을 침탈하는 우승열패(優勝劣敗)나 약육강식 논리만이 적용되는 시대로 열패자인 약자는 실력양성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기본 인식 위에 궁극목표는 국권회복·인권신장을 통하여 근대문명국가의 달성에 있었다. 민력양성을 위해 민력 결집은 시급한데, 방법은 단체설립과 단체 상호간의 단합으로 서북학회 설립도 여기서 비롯되었다. 애국계몽운동은 1907년 중엽에 이르러 관서와 관북지방에서 뿌리를 내려 일정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전 민족적 전 국가적 차원으로의 확산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일제의 강압책으로 국권회복운동이 더욱 어렵게 되자, 이러한 제약을 보다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해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를 통합하여 1908년 1월 조직하였다. 구성원은 주로 평안도·함경도·황해도민이다. 주요 임원은 이동휘(李東輝)·안창호(安昌浩)·박은식(朴殷植)·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최재학(崔在學) 등이었다. 임시회장 이동휘의 지도 하에 서우회관(西友會館)에서 조직회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장으로 정운복(鄭雲復), 부회장 강윤희(姜玧熙), 총무 김달하(金達河)를 선출하였다. 1909년에는 회장으로 오상규(吳相奎), 부회장 정운복, 총무 김명준(金明濬)을 선출하였다. 조직은 서우학회·한북흥학회를 토대로 하였다. 서울에 총사무소를 두었으며, 회장 1명, 부회장 1명, 총무·부총무 각 1명, 평의원 30명, 사찰원(司察員), 회계 각 1명, 서기 2명이었다. 월보(月報) 간행을 위해 주필 1명, 편집 1명, 협찬원(協贊員) 19명을 두었다. 개별 사무를 처리할 때는 위원이나 총대(總代)를 정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31개 지역에 지회를 설치하고 69개 지역에 지교(支校)를 두었다.「사립학교령(私立學校令)」·「학회령(學會令)」 등 애국계몽운동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자, 1909년 2월 이후에는 37개 지역에 학사시찰위원(學事視察委員)을 선정, 지회·지교 활동을 보완하였다. 서북지방민으로 국권 회복을 원하는 사람이면 관(官)·민(民)을 막론하고 누구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회원은 2,300명 정도에 이른 것으로 추산되며, 신지식층·신흥시민층을 중심으로 한 광범한 시민층이었다. 항일교육구국운동은 국민들에게 신교육의 절실한 필요를 계몽하는 것이었다. 교사 양성에 주력하는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 노동자 교육을 위한 수상야학(水商夜學)·측량과(測量科)·심학강습소(心學講習所)·농림강습소(農林講習所) 등을 설치,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각 지역 사립학교 교무의 지도와 후원을 통하여 전개되었다. 계몽강연활동은 학회의 여러 모임, 특히 운동회를 통해 광범위하게 파급되었다. 당시 상황을 알리고 애국심을 고취시켰으며 실력양성운동에의 참여를 촉구하였다. 1908년 2월부터 『서북학회월보』라는 학보를 발간, 1910년 1월까지 계속하였다. 학보를 통해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과 민권론(民權論)에 기반을 둔 실력양성론·단체론·애국론·교육구국론·실업진흥론·사회관습개혁론 등을 전달하여 민중의식을 계발하고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민족산업진흥운동이 중요시된 것은 서북학회의 사회적 기반이 신흥시민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실업교육을 장려하고, 특히 일제의 경제적 침략과 관련해 농림(農林)의 진흥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좀더 광범한 지역과 대중에게까지 애국계몽운동을 확산시키고자 하였다.「사립학교령」·「학회령」·「기부금품모집취체규칙(寄附金品募集取締規則)」·「지방비법(地方費法)」 등 일제의 탄압에 대한 구체적 대응책을 제시하여 민중들이 적극 대처하도록 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 뒤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화되고 서북학회 분쇄책이 시도되자, 1909년 독립전쟁 전략을 채택하여 국외에서는 독립군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립운동에 주력하였다. 국내에서는 사립학교 유지방법 강구 등의 교육운동과 농회·농림강습소 설립, 민족산업 진흥운동 등을 계속 추진하였다. 이 학회는 애국계몽운동을 광범위하게 확산시켰을 뿐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을 진정한 국권회복운동으로 전개되게 하였다. 1909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만주 등지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군 기지를 조성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국외 독립군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기관지로는 『서우(西友)』를 계승한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가 있다. 1910년 9월 강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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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묘
유일한(1895-1971)은 주식회사 유한양행(柳韓洋行) 창업자이다. 1939년 중국에서 한인독립운동단체인 광복진선(光復陣線)과 민족전선(民族戰線)이 하나로 통합되고 중·일(中日)간의 전쟁이 고조되던 즈음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동년 8월 미주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되다.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執行部)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후원과 외교 및 선전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주 민병대 소속으로 일명 맹호군(猛虎軍)인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를 편성하는데 적극 후원하였다. 1942년 당시 미육군 전략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펄벅과 교유하기도 한 그는 동년 8월 로스엔젤레스 시청 앞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현기식(懸旗式)에 참여하여 이승만(李承晩)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등의 축사를 낭독하는 등 맹호군 창설과 현기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한편, 동년 10월 미국정부 전략청(戰略廳)에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기획연구부(企劃硏究部) 위원장이었던 그에게 전략청의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는 연구서 작성을 권유하자, 1943년 11월 맹호군 사령관 김용성(金容成), 이사 송헌주(宋憲澍) 등과 함께 한국인이 태평양전쟁에 보다 유효하게 참가하기 위한 『한국과 태평양전쟁(Korea & Pacific War)』이란 비망록을 작성·간행하여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동시에 지속적으로 군자금을 출연하여 독립자금을 적극 후원하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아시아와 아메리카(Asia and the America)』란 잡지에 「한국과의 교역을 권한다(Do Business with Korea)」라는 기고문을 게재하여 한국의 사정을 세계에 널리 홍보하였으며, 1945년 1월에는 미국 버지니아주 핫스프링에서 태평양연안 12개국 대표 160명이 참석한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 회의에 정한경·전경무(田耕武) 등과 함께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우리의 독립 당위성을 강조하는 모임을 개최하고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론화하는 외교적 성과를 이룩하였다. 또한 곧 이어 동년 1월 미군의 한국침투작전의 일환인 냅코(Napko) 작전계획에 따라 캘리포니아주에 특수공작을 위한 한인훈련부대가 설치되자, 이에 입대하여 제1조 책임자로 선임되어 무기·비무장전투법·지도읽기·파괴·무전·촬영·낙하산훈련·비밀먹 사용법·선전·일본인의 특성 등에 대한 훈련을 받으며 임시정부의 OSS작전과 양면작전을 전개하여 국내에 침투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의 항복으로 인해 국내정진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1946년 귀국하여 유한양행을 민족자본 사업으로 육성하는 한편, 육영사업에도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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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3.1운동시발지 표지석
경기도 시흥 지역에서는 민족 광복 운동사에 중요한 사건인 3.1운동이 3월 말에서 4월 초까지 수암면과 군자면 일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무단통치(武斷統治)에 맞서 지역민을 조직하여 하부 통치 기구인 면사무소와 경찰관 주재소에 몰려가 만세 운동을 펼쳤다. 그 과정에서 수암면의 유익수, 윤병소, 홍순칠, 윤동욱, 김병권, 이봉문과 군자면의 강은식, 김천복, 권희, 장수산 등의 마을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주동한 혐의로 형을 받았다. 정부는 이들의 공을 기려 독립운동 유공자로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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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덕 의거 기념비
안광덕(안광득 1897-1933)은 충북 영동(永同) 사람이다.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梅谷面 玉田里)에 거주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듣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3일과 4일 양일간 매곡면은 각 촌락이 모두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옥전리·노천리(老川里)에서는 밤을 이용하여 주민 100여명이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음날 4일 오전 11시경에는 시위군중 약 800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노천리 면사무소에 쇄도하였다. 그는 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시위군중과 함께 추풍령(秋風嶺)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그리하여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형을 언도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하여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위소되고 징역 1년 2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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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광덕의 묘
안광덕(안광득 1897-1933)은 충북 영동(永同) 사람이다. 영동군 매곡면 옥전리(梅谷面 玉田里)에 거주하였으며,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음을 듣고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3일과 4일 양일간 매곡면은 각 촌락이 모두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절규하였다. 옥전리·노천리(老川里)에서는 밤을 이용하여 주민 100여명이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다음날 4일 오전 11시경에는 시위군중 약 800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노천리 면사무소에 쇄도하였다. 그는 면사무소 앞 광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고창하였으며 시위군중과 함께 추풍령(秋風嶺) 헌병분견소로 몰려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벌이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그리하여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대전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3월형을 언도받았으나, 공소를 제기하여 5월 3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위소되고 징역 1년 2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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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안 상
윤기안(1899 - 1990)은 평안북도 박천(博川) 사람이다. 1919년 3월 4일 대동군 율리면 무진리(大同郡栗里面茂辰里)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당시 이곳의 기독교(基督敎) 학교의 교사로서, 이날 동료교사·학생·주민들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해 5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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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미리사 흉상
차미리사(1880 - 1955)는 일제강점기 근화여학교 교장, 근화학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여성운동가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경기도 고양 출신. 미리사는 세례명이다. 남편이 죽은 뒤 기독교에 입교, 미국인 여선교사를 통하여 선진국의 실정 및 여성의 사회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01년 여선교사의 알선으로 중국 유학의 기회를 얻게 되어 인천에서 떠나는 중국 화물선에 몸을 숨겨 상하이[上海]로 출국한 뒤 쑤저우[蘇州]에 있는 버지니아여학교에 입학하였다. 1905년에 졸업하고 양주삼(梁柱三)과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기 위하여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여러 활동을 하였다. 그 뒤 캔자스(Kansas) 주의 더스칼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17년 미국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8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귀국하였다. 귀국과 동시에 배화여학교(培花女學校)의 교사와 기숙사 사감에 취임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는 국내외 비밀 연락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3·1운동 이후 종교교회(宗橋敎會)에 여자 야학강습소를 설치,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문맹퇴치와 계몽운동에 헌신하였다. 1920년 조선여자교육협회를 조직하고, 이듬해 순회여자강연단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계몽강연을 실시하였다. 이때 4개월간 73개소에서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웠으며, 1921년 10월 강연회에서 얻은 찬조금으로 근화여학교(槿花女學校)를 설립, 교장에 취임하였다. 1934년 2월 안국동에 재단법인 근화학원(槿花學園)을 설립하여 재단이사장을 역임하였다. 그 뒤 ‘근화’라는 명칭이 무궁화를 상징한다는 일제의 시비에 따라 명칭을 덕성학원(德成學園)으로 바꾸었다. 광복이 되자 그 동안 계획해 왔던 여성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추진, 1950년 덕성여자초급대학(현재의 덕성여자대학교)을 설립하였고, 그 뒤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2002년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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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 집
정인보(1893~1950)는 서울의 동래정씨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에 활동했던 대표적인 역사학자이자 한학자이다. 당대 양명학의 대가 중 한명인 이건방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한일합당 직후에는 상하이로 건너가 박은식,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귀국 후에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한학과 역사학을 가르쳤으며,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특히 신민족주의 역사가의 대표민물로서 우리 민족의 고전을 널리 알리는 데에 노력했으며, 1930년대에는 조선학운동을 일으키면서 조선후기 실학에 대한 연구를 주도하였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에 협력하지 않고 창동리에 은거했다. 1947년 국학대학의 학장이 되었고, 이승만 정부가 들어선 후 초대 감찰위원장에 선임되었으나, 정부의 간섭이 심해지자 사임하고 국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6.25전쟁 때에 북한국에 의해 납북되었다가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