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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쿠샤 전시관
테일러의 본업은 광산업이었다. 1919년 2월 28일 우연히 조선호텔을 들렀다가 고종황제의 국장 취재를 맡아줄 사람을 찾는다는 듣고 통신원(기자)의 일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로 그날 테일러의 아들이 세브란스병원에서 태어났고 그는 간호사들이 외국인 전용 병실 침대 밑에 인쇄된 독립선언서를 숨기는 것을 목격한 뒤, 이를 입수해 보도하여 한국의 독립운동 소식을 세계에 알렸다. 독립 운동뿐만이 아니라 3·1운동 관련 기사로 한국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던 테일러는 3월 3일 치러진 고종의 국장도 취재했다. 테일러는 고종의 국장 취재 이후 3·1운동 관련 후속 보도를 이어갔다. 그는 4월 16일 일본군이 3·1운동에 대한 보복으로 경기도 화성시 제암리 교회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을 찾아 취재했다. 그의 기사는 뉴욕타임즈 4월 24일자에 ‘일본군이 한국인을 학살했다고 전한다(Say Japanese Troops Massacred Koreans)’ 제하 기사로 게재됐고 일본에서 발간되던 영자지 ‘재팬 애드버타이져(The Japan Advertiser)’ 4월 27일과 29일자에도 보도됐다. ‘제암리 학살사건’ 외에도 테일러는 3·1운동을 주도했던 독립투사에 대한 재판도 취재했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13일자에 실린 손병희 선생(1861~1922) 등 독립투사 재판 관련 기사에는 “신문기자석에 처음으로 서양 사람 한 명이 들어왔다. 이 사람은 재판의 광경을 제일 먼저 세계에 소개할 미국 연합통신사의 통신원 테일러 씨더라”고 게재돼 있다. 테일러는 1923년 종로구 행촌동 내, 권율 장군의 집터로 알려진 곳에 붉은 벽돌집을 짓고 조선에서의 삶을 영위하지만 일본제국주의가 정점에 치닫던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 당한다. 테일러는 일본의 패망 이후, 미국 정부와 미군정에 편지를 보내며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노력하지만 1948년 6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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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고당 터(민창식 집)
감고당은 조선 숙종 계비 인현왕후 민씨가 살던 친정집이다. 인현왕후는 14살에 왕비로 간택되었다가 장희빈의 모함으로 폐서인되어 6년간 감고당에 갇혀 살다가 환궁하였다. 이후 이 자리는 일제강점기 애국지사 민창식 선생이 6.10 만세운동에 사용할 격문 외 4종의 격문 5만장을 인쇄한 장소이자 선생의 생가 자리로 쓰이게 된다. 현재 도봉구 쌍문동 덕성여자대학교 정문 앞에 이 자리를 기념하는 표지석이 설치되어 있다. 민창식은 중동학교(中東學校)에서 수학한 후 대동인쇄사와 경성일보·매일신보 등의 신문사 인쇄직공으로 일했다. 1920년대 들어 연우사(鉛友社) 동인,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 회원, 혁청당(革靑黨) 당원으로 활동하며 화요회 회원이 되었다. 1925년 서울에서 경성인쇄직공조합(京城印刷職工組合)을 결성한 민창식은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인쇄직공 등의 노동자 권익 확보를 위해 힘쓰며 대동인쇄주식회사(大東印刷株式會社)·창신인쇄주식회사(倉新印刷株式會社) 파업 등에 참여했다. 당시 대동인쇄주식회사의 직공 파업은 인쇄소 직공들의 불합리한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일어난 것으로, 회사 측은 직공 측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해놓고는 오히려 주모자 등을 해고하였다. 이에 다시 들고 일어난 인쇄소 직공들의 투쟁은 직공들의 승리로 끝난 바 있었다. 이러한 때에 그는 직공들과 함께 동맹 휴업을 벌이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부산직공파업 때에도 이를 원조코자 ‘착취계급과 피착취계급’을 강연하기도 했다. 같은 해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 가입한 민창식은 활동범위를 넓혀 청년운동 및 사회주의 활동을 벌여 나갔다. 1926년 3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에 입당하여 경성부 위원으로 인쇄직공조합이 설치된 경성부 제2구 제1야체이카의 책임자가 되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 당시 격문의 인쇄와 배포를 담당한 민창식은 만세운동의 전국확대를 위해 원산과 평양 등지에서 선전문을 배포하던 중 일경에 붙잡혔다. 1928년 2월 경성지방법원에 징역 3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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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묘
윤봉길(1908 - 1932)의 본관은 파평이며, 본명은 윤우의, 호는 매헌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자극을 받아 식민지 노예 교육을 배격하면서 학교를 자퇴하였다. 이후 열네 살 때는 인근 마을의 서당인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공부하며 사서삼경 등 중국고전을 익혔다. 1929년 부흥원(復興院)을 설립하여 농촌 부흥 운동을 본격화하며 일본 경찰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30년 만주로 망명하던 윤봉길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으나, 결국 만주로 탈출해 김태식(金泰植), 한일진(韓一眞) 등과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1931년 8월 활동 무대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옮겨 동포 실업가 박진(朴震)이 경영하는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한 뒤 새로운 활동을 모색하였다. 그해 겨울부터는 임시정부의 김구(金九)를 찾아가 독립운동에 신명을 바칠 각오를 호소하기도 하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의 이봉창(李奉昌)이 일본 도쿄에서 일본 왕을 폭살하려다가 실패하며 상하이의 정세가 복잡해지자 윤봉길은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4월 29일 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겸 전승축하기념식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하였다. 윤봉길의 거사로 상하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상하이의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등이 즉사하였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중장,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수류탄 투척 후 현장에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이후 1932년 11월 20일 오사카형무소에 수감, 1932년 12월 19일 총살되었다. 윤봉길은 1932년 일본에서 총살된 후 표식도 없이 매장되었다. 해방 후 유해봉안추진위원회의 주도로 1946년 3월 6일 사형장에서 남쪽으로 3㎞ 떨어진 가나자와[金澤]시 노다[野田]산 시영공동묘지 북측 통행로에서 윤봉길의 유해를 발굴하여 서울특별시 효창동의 효창공원에 국민장으로 안장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정부는 윤봉길의 공적을 기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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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묘
안중근(1879 - 1910)은 일제강점기 이토저격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16세가 되던 1894년, 아버지가 감사(監司)의 요청으로 산포군(山砲軍: 수렵자)을 조직해 동학군 진압에 나섰을 때 참가하였다. 1904년에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해외 망명을 결심, 산둥[山東]을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알고 지내던 프랑스인 신부로부터 교육 등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충고를 듣고는 다음 해 귀국하였다. 1906년 3월에 진남포 용정동으로 이사해 석탄상회를 경영하였다. 정리한 뒤에는 서양식 건물을 지어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곧이어 남포(南浦)의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학교 경영에 전념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이 되면서 반일운동을 행동화하였다. 이 해 7월에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북간도로 망명하였다. 3, 4개월 뒤에는 노령으로 갔다. 노브키에프스크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한인청년회 임시사찰이 되었다. 이곳에서 이범윤(李範允)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고, 엄인섭(嚴仁燮) · 김기룡(金起龍) 등 동지를 만나 동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의병 참가를 권유하였다. 의병지원자가 300여 명이 되자 김두성(金斗星) · 이범윤을 총독과 대장으로 추대하고 안중근은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무기를 구해 비밀리에 수송하고 군대를 두만강변으로 집결시켰다. 1908년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다음으로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제3차의 회령전투에서는 5,000여 명의 적을 만나 혈투를 벌였지만 중과부적으로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뒤 노브키에프스크 · 하바로프스크를 거쳐 흑룡강의 상류 수천여 리를 다니면서 이상설(李相卨) · 이범석(李範奭) 등을 만났다. 노브키에프스크에서는 국민회 · 일심회(一心會) 등을 조직했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해 애국사상 고취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 · 엄인섭 · 황병길(黃丙吉)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회(斷指會, 일명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 · 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하였다. 9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동보(遠東報)』와 『대동공보(大東共報)』의 기사를 통해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大藏大臣) 코코프체프(Kokovsev, V.N.)와 하얼빈에서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오는 것을 알았다. 안중근은 우덕순(禹德淳, 일명 禹連後) · 조도선(曺道先) · 유동하(劉東夏)와 저격 실행책을 모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코코프체프와 약 25분간의 열차 회담을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이토가 러시아 장교단을 사열하고 환영 군중 쪽으로 발길을 옮기는 순간 안중근은 침착하게 걸어가 이토로 추정되는 사람에게 4발을 쐈다. 다시 이토가 아닐 것을 대비해 주위 일본인에게 3발을 쐈다. 처음 쏜 4발 가운데 3발은 이토, 1발은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도시히코[川上俊彦]의 오른팔을 맞혔다. 이어서 쏜 3발은 비서관 모리타이지로[森泰二郞], 만주철도이사 다나카세이타로[田中淸太郞]를 맞혔다. 1발은 플랫폼에서 발견되었다.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한국의용병 참모중장, 나이 31세로 자신을 밝혔다. 거사 동기에 대한 질문을 받자 이토가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 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사령의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의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3월 26일 오전 10시, 뤼순감옥(旅顺监狱)의 형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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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동상(탑골공원)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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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 기념관
안창호(1878-1938)는 호는 도산(島山)이며 일제강점기 이토히로부미 암살사건, 상해 훙커우공원 폭탄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다. 평안남도 강서 출신으로 1895년 청일전쟁 이후 상경하여 언더우드가 경영하는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서구문물을 접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필대은과 함께 평양에서 관서지부조직을 맡게 되었다. 이 때 민중의 각성을 촉구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 1898년 서울 종로에서 이상재(李商在) · 윤치호(尹致昊) · 이승만(李承晩) 등과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였으며, 1899년에는 강서군 동진면 화암리에 강서지방 최초의 근대학교인 점진학교(漸進學校)를 설립하였다. 190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1905년 4월 대한인공립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하였다. 귀국 후 1907년에 이갑(李甲) · 양기탁(梁起鐸) · 신채호(申采浩)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 『대한매일신보』를 기관지로 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07년 평양에 대성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기관인 태극서관(太極書館)을 건립하였으며, 평양에 도자기회사를 설립하여 민족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1909년에는 박중화(朴重華) · 최남선(崔南善) · 김좌진(金佐鎭) · 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 및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다. 1909년 10월에 있었던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암살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하여 체포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山東省)에서 민족지도자들과 청도회의(靑島會議)를 열었다. 그러나 자금관계와 급진파의 반대로 실패, 시베리아를 거쳐 1911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3년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설하여 본국에서 이루지 못한 대성학교 · 신민회 · 청년학우회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한, 1914년 11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장에 선출되었다. 1915년 6월 23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회장에 취임하며 동포의 단결을 강조했다. 1919년 3 · 1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방략 작성, 연통제(聯通制) 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하였다.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취임한 지 2년째인 1921년에 임시정부 내각 통일을 위하여 노력하다 실패하여 사임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주장하였다. 1924년에는 북중국 만주방면을 시찰, 여행하며 이상촌(理想村) 후보지를 탐사하고 난징에 동명학원(東明學院)을 설립하였다. 1924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사업을 추진하였다. 1927년 길림에서 군사행동단체의 통일과 대독립당(大獨立黨)의 결성을 토의하던 중 동지 200여 명과 함께 중국경찰에 감금되었다가 중국 내 사회여론이 비등하게 되어 20일만에 석방되었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이동녕 · 이시영 · 김구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대공주의(大公主義)를 제창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폭탄사건으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로 송환되었다. 4년의 실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5년 2년 6개월만에 가출옥하여 지방순회 후 평안남도 대보산(大寶山) 송태산장(松苔山莊)에서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사건(修養同友會事件)으로 흥사단 동지들과 함께 다시 일본경찰에 붙잡혀 수감중,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대학부속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졸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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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일리 만세광장
서울특별시 강동구 상일동 수변공원 일대에 조성된 광장이다. 1919년 당시 광주군 구천면 상일리에서 있었던 3.1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광장으로 조형물, 사진, 독립운동가들의 어록, 시비 등이 함께 있다. 현재 서울 강동구 상일동은 1919년 당시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상일리였다. 1919년 3월 26일부터 만세 시위가 시작되어 다음 날인 3월 27일 서부면 감일리 주민 40여 명이 초이리(草二里)의 서부면사무소 앞으로 가서 만세를 부르고 면사무소에 돌을 던졌다. 또한, 구천면 상일리(上一里)의 헌병주재소 앞까지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 행진하며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때 구천면 길리(吉里)·명일리(明逸里)·암사리(岩寺里) 사람들도 만세를 부르려고 상일리 헌병주재소로 모여들어 시위대는 900~1,000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를 공격하자 헌병이 발포하여 시위대 2명이 사망하였다. 이 중에 농민이자 감일리(현재 하남시 감일동) 구장이었던 구희서(1872-1951)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기소되었고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을 선고받고 항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도장관보고서에 따르면 3월 26일 광주군 구천면 상일리에서 '마을 인민 소란'이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 이를 참고로 거칠게나마 30~80명이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3월 27일 시위는 선교사의 세브란스 병원 보고 자료 4건을 합하여 볼 때 구천면 상일리 소재 상일리헌병주재소와 서부면 초이리 소재 서부면사무소에서 만세시위를 벌인 사건 모두를 포함하며 서부면 일대의 야간 산불 시위도 해당 시위에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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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진 집
김석진(1843-1910)은 조선 후기에 홍문관장령, 삼도육군통어사,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자는 경소(景召) 호는 오천(梧泉)이다.1860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종친부(宗親府) 벼슬을 거쳐 홍문관의 관직을 지냈다. 그 뒤 삼도육군통어사 등을 지냈다. 1896년 궁내부 특진관에 이어 1901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에 이르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다음 해 1월 23일 오적신(五賊臣)을 처형할 것을 상소했다. 상소문에서 김석진은 협박에 의한 조약은 공법상 폐기가 가능하니 외부대신을 불러 여러 외국 공사에게 성명을 내라고 청하였다. 그러나 왕의 승낙이 떨어지지 않았고, 조병세(趙秉世)가 조약에 반대하다 순사하자 김석진은 조문길에 남대문 근처 한 점포에서 아편을 산다. 다시는 대궐에 들어가지 않고 나라를 위해 죽기로 결심하고 기회를 보고 있었다. 1910년 우리나라를 병탄한 뒤 조선의 전직 고위 관료들에게 작위 또는 은사금을 주던 일제가 남작의 작위로써 김석진을 회유하려 하자, 이를 치욕으로 여겨 1910년 9월 8일 아편을 먹고 자결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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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낙균 안내판(한천로 애국지사 거리)
신낙균(1899-1955)은 일제강점기 경성사진협회 회장, 동아일보 사진과장 등을 역임한 사진기자이다. 1915년 인천공립상업학교 염직과를 졸업한 후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영어학교에서 1년, 동양대학 문화학과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24년에는 동경사진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7년에 졸업하였다. 같은 해 서울로 돌아와 중앙청년기독교청년회(YMCA)학교 사진과 교사가 되어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관계 저서인 『사진학개설』을 출간하였다. 1929년 2월부터 경성사진사협회 제3대와 4대 회장을 맡았고, 1934년 7월 동아일보 사진과장으로 입사하였다. 1936년 8월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 우승하자 8월 24일자 『동아일보』는 일본 아사히신문사로부터 입수한 손기정 선수의 수상 장면을 게재하면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말소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신낙균을 포함한 관련자 여러 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만 33일간의 취조와 고문을 당한 끝에 풀려났으나 장차 언론기관에는 일체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야 했다. 그는 이로 인해 신문사를 떠났고, 1953년에는 수원 북중학교의 물리학 강사로 재직하였다. 1990년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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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묘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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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황각
서울특별시 강북구에 있는 일제강점기 에 건립된 천도교의 수도원이다.의창수도원(義彰修道院)이라고도 한다.1969년 09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천도교 제3대 교주인 의암(義庵) 손병희(孫秉熙)가 1911년 가을에 2만 7946평의 밭과 임야를 구입하여, 1912년 여기에 건물을 세우고 그 이름을 봉황각이라고 하였다. 천도교 교조 최제우(崔濟愚)가 남긴 시문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라는 낱말을 딴 것이다. 현재 걸려 있는 현판은 오세창(吳世昌)이 썼는데, ‘봉(鳳)’자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황(凰)’자 또한 당나라 명필 회소(懷素)의 서체를, ‘각(閣)’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米芾)의 서체를 본뜬 것이다. 손병희는 우리나라가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 천도교의 신앙생활을 뿌리내리게 하는 한편, 지도자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수련장으로 이 집을 지었다. 손병희는 또한 1912년 4월 15일부터 이곳에서 지방교역자 21명을 선발, 지명하여 수련을 시키기 시작하였는데, 1914년 4월까지 3년 동안에 걸쳐 483명을 수련시켰다. 손병희 자신도 1912년부터 7년 동안 이곳에 살면서 천도교의 발전책과 구국운동을 구상하였다. 1919년 3·1운동의 구상도 이곳에서 하였으며, 특히 3·1운동 때 이곳을 거쳐간 간부들이 주도적 구실을 하여 3·1운동과 인연을 가진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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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 묘
손병희(1861-1922)는 충청북도 청원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여 1884년 교주 최시형을 만나 지도를 받았다. 1894년의 동학혁명 때에는 통령으로서 북접(北接, 동학 교단 조직의 하나)의 동학혁명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과 호서지방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전하자 원산, 강계 등지에서 은신 생활을 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자로서 3년간 지하에서 교세 확장을 위해 힘쓰다가, 1908년 박인호에게 교주 자리를 인계하고 우이동으로 은퇴하여 수도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국에 가까워져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려던 때에, 미국 윌슨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평소에 뜻을 같이하고 있던 보성고등보통학교장(普成高等普通學校長) 최린, 천도교 도사 권동진, 오세창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제반 사항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1월 말, 그들과 함께 먼저 동지를 모아서 민족의 대표자로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그 선언서를 각지에 배포하여 국민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켜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키게 하는 한편,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파리강화회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조선의 독립에 관한 의견서를 제출하고, 또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써 줄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고, 그 제반 계획의 실행을 최린에게 맡겼다. 이에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 대한 동지 규합이 진행되었다. 2월 26일 최린이 최남선과 수차 협의 끝에 독립선언서와 청원서 및 의견서 등의 초안을 작성하자,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과 함께 이를 검토하였다. 그리고 2월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천도교 기도회 종료 보고와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천도교 도사 임예환, 나인협, 홍기조, 박준승, 양한묵, 권병덕, 나용환, 장로 이종훈, 홍병기, 교인 김완규 등에게 독립만세 운동의 취지를 설명하고,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3월 1일 오후 2시경 태화관에는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사람 가운데,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참석하였다. 손병희는 민족대표 중의 대표자로서 엄숙한 독립선언식의 진행을 주도하여, 이종일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100매를 탁상 위에 놓고 돌려보도록 한 후, 한용운의 인사말에 이어 만세삼창을 외치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되어, 서울 상춘원(常春園)에서 요양 중 병사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