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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용 흉상
이길용(1899-미상)의 호는 파하, 월강이며, 일제강점기 동아일보 체육기자, 조선일보 기자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인천으로 생활 근거지를 옮김에 따라 인천에서 영화학교(永和學校)를 마쳤다. 1916년배재학당(培材學堂)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공부하였으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아 1918년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철도국에서 근무하던 중 1919년 3·1독립선언서와 임시정부의 기밀문서를 철도편으로 운송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하다 발각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그 뒤 출감하여 동아일보 사장이던 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 체육기자로 활약하였다. 1923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전조선여자정구대회를 전담, 주관하였다. 한때는 심판을 보기도 하였으며, 1932년에는 『신동아』에 「여자정구 10년사」를 연재하였다. 1924년 11월 조선체육회 실무위원이 되었으며, 1925년 제1회 전조선축구선수권대회 임원, 전조선중학교 농구선수권대회 위원 등을 지냈다. 1924년 조선일보로 이적했다가 1927년송진우의 간곡한 부름을 받고 동아일보로 다시 돌아와 체육 발전에 헌신하였으며, 다른 신문사 기자들과 뜻을 모아 1927년 8월서울영금정(令今亭)에서 조선운동기자단(朝鮮運動記者團)을 조직하여 운동경기의 전문화에 기여하였다. 1932년 8월 로스엔젤레스올림픽에 출전한 김은배(金恩培)와 권태하(權泰夏) 선수가 골인하는 사진에서 가슴의 일장기를 없애 버렸고, 1936년 8월『동아일보』에 「名譽의 우리 孫君 世界制覇의 凱歌」라는 제목 아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 선수의 시상식 사진에서도 일장기를 없앴으며, 『신동아』에 실린 사진에도 일장기가 지워졌다. 이 사건으로 사직당하고 『동아일보』는 정간되었으며, 『신동아』는 폐간되었다. 그 뒤 네 차례에 걸쳐 옥고를 치르고 광복이 되자 조선체육동지회 결성에 적극 참여하였고, 그 결과 조선체육회(현재 대한체육회)를 부활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1945년 조선체육회 상무이사로 선임되었고, 이듬해『동아일보』가 복간되자 사업부 차장으로 복직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서울특별시 고문, 이화여자대학교 이사, 국민당 중앙당 상임위원 등의 사회활동을 하였다. 1949년 10월 대한체육회 공로상을 받았으며, 체육사를 정리하여 『체육연감』과 『대한체육사』가 발간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6·25전쟁 때 납북되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으며, 1989년 한국체육기자연맹에서는 이길용체육기자상을 제정, 매년 수여하고 있다. 1990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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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영, 이시영 6형제 집
이회영(1867-1932)의 호는 우당이며, 일제강점기 신민회 중앙위원, 항일구국연맹 의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1907년 2월 귀국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4월경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梁起鐸)·이동녕(李東寧)·신채호(申采浩) 등과 같이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으로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각 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한편, 만주에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것을 협의하여 간도 용정촌(龍井村)에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고 이상설(李相卨)을 책임자로 하여금 교포 교육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릴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이 특사로 파견되자 서전서숙의 경영을 위해 여준(呂準)을 만주로 파견하였다. 그 뒤 1908년 헤이그에서 돌아온 이상설을 만나기 위해 만주로 찾아가서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한 끝에 국외활동은 이상설이, 국내활동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협의하고 귀국하였다. 우선 교육진흥운동이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판단, 동지들을 각 학교에 파견하여 교육에 진력하도록 하고, 자신도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의 학감으로 취임, 교육사업에 진력하였다. 1909년 봄 양기탁의 집에서 김구(金九)·이동녕·주진수(朱鎭洙)·안태국(安泰國)·이승훈(李昇薰) 등과 비밀리에 신민회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만주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를 후보지로 결정하였다.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의해 강탈당하자 전가족이 만주로 건너가 황무지를 개간하며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매진하였다. 1911년 교민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1912년 독립군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뒤의 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1918년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W.)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에 자극되어 국내외에서 독립기운이 활발해지자 오세창(吳世昌)·한용운(韓龍雲)·이상재(李商在) 등과 밀의한 뒤, 고종의 국외망명을 계획하고, 시종 이교영(李喬永)을 통해 고종에게 상주하여 쾌락을 얻었으나, 고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上海)에 수립되었으나 의견 차이로 분란이 끊이지 않자 상해보다는 북경(北京)에 체류하며 활동을 계속하였다. 1924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중국에 있던 동지들이 상해로 집결하여 조직한 항일구국연맹의 의장에 추대되었다. 1932년 상해사변이 일어나자 행동강령으로 일본군기관 및 수송기관 파괴, 일본요인 및 친일파 숙청, 일본외교기관 폭파 등을 결정하고, 중국국민당과 교섭하여 자금과 무기지원을 확약받았다. 그 해 11월 만주에 연락근거지를 확보하고 지하공작망을 조직하여, 주만일본군사령관 암살을 목적으로 상해에서 대련(大連)으로 향하던 도중, 대련의 일본수상경찰에 잡혀 악독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이시영(1869-1953)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감찰위원장,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1885년(고종 22) 관직에 나아가 10여 년간 형조좌랑 · 홍문관교리 · 승정원부승지 · 궁내부수석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895년 관직을 물러난 뒤로는 중형 이회영(李會榮) · 이상설(李相卨) 등과 근대학문탐구에 몰두하였다. 1905년 외부 교섭국장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을 계기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1906년 재차 평안남도 관찰사에 등용되었고, 근대학교설립 및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그 뒤 1907년 중추원칙임의관, 1908년 한성재판소장 · 법부 민사국장 · 고등법원판사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안창호(安昌浩) · 전덕기(全德基) · 이동녕(李東寧) · 이회영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국권피탈 후 신민회의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 계획에 의거하여 6형제의 가재(家財)를 재원으로 삼아, 1910년말 서간도(西間島)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추가가(鄒家街)로 가족을 거느리고 망명하였다.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大孤山)에서 노천군중대회를 개최하여, 교육진흥 및 독립군양성을 표방한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설립을 주도하였다. 경학사 초대사장에는 이상룡(李相龍)이, 신흥강습소 초대교장에는 이동녕이 추대되었다. 1912년 통화현 합니하(通化縣 哈泥河)에 토지를 매입하여 신흥강습소를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확대 발전시켰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는 유하현 고산자로 이전하였고, 합니하의 교사는 분교역할을 하는 등 1910년대 서간도지역 독립군양성의 총본산이 되었다. 특히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폐교 때까지 재만항일독립군의 핵심 간부로 양성된 독립군들은, 청산리대첩의 주역으로 활동하는 등 1920년대 국외독립전쟁의 골간으로 성장하였다. 1935년 10월 김구 등과 함께 임시정부 지원정당인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을 창당하여 감사를 맡았다. 1938년 중일전쟁 발발로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동한 이후 임시정부 국무위원 · 재무부장 · 의정원의원 등을 역임하며, 광복 직전 임정활동의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조국광복과 함께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환국한 이래 1946년 봄 성균관총재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 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종교(大倧敎) 활동에 진력하여 사교교질(司敎敎秩) · 원로원장 · 사교(司敎) · 도형(道兄) 등의 주요 직책을 역임하였다. 또한, 환국 직후부터 신흥무관학교부활위원회를 조직하여, 신흥무관학교의 건학이념 계승과 인재양성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47년 2월 재단법인 성재학원(省齋學園)을 설립하고, 이후 신흥전문학관(新興專門學館)으로 발전시켜 1 · 2회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그 뒤 한국전쟁으로 일시 침체국면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경희대학교로 계승되었다. 한편, 1947년 9월 공직사퇴 성명을 발표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직을 사퇴하였다. 그러나 1948년 7월 20일 제헌국회에서 실시된 정 · 부통령선거에서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전횡에 반대하여 1951년 5월 9일 국회에 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함과 동시에 국정혼란과 사회부패상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는 요지의 대국민성명서를 발표하고 이승만정부를 떠났다. 1949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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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의거터
이재명(1887-1910)은 일제강점기 이완용피습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평안남도 평양 출신으로, 8세 때 평양 아청리(衙聽里)로 이사하였다. 1904년 미국노동이민사(美國勞動移民社) 모집으로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제1·2차 한일협약이 강제체결되자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1907년 10월 동경·나가사키[長崎]를 거쳐 귀국하였다. 그리고 1909년 1월 전 통감 이토[伊藤博文]가 순종과 함께 평양을 순행하기로 되었을 때, 이토를 암살하고자 동지 몇 사람과 평양역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창호(安昌浩)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을 거쳐 연해주로 갔다. 그 뒤 안중근(安重根)에 의해 하얼빈역에서 이토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였다. 친일매국노 이완용(李完用)·이용구(李容九)·송병준(宋秉畯) 등을 먼저 없애는 것이 국권수호의 첩경이라 생각하고, 여러 동지와 야학당에 모여 이완용은 이재명이, 이용구는 김정익(金貞益)이, 송병준은 이동수(李東秀)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계획하였다. 그 해 9월 상경하여 기회를 엿보던 중, 12월 22일 서울 종현천주교회당(鐘峴天主敎會堂)에서 벨기에 황제 레오폴트 2세(그달 17일 사망)의 추도식에 이완용 등 매국노들이 참석한다는 신문보도를 보고 군밤장수로 변장한 뒤 교회당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11시 30분경 이완용이 식장에서 나와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것을 칼로 허리와 어깨 등을 세번이나 찔러 쓰러뜨리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에 왼쪽 넓적다리를 찔려 중상을 입고 잡혔다. 이 때 운집한 구경꾼들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면서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또한 서울지방재판소에서 방청석을 향해 “몸을 바쳐 나라를 구하라.”고 열변을 토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재판장이 “피고와 같이 흉행한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하고 묻자, 눈을 부릅뜨고 “야만 섬나라의 불학무식한 놈아! 너는 흉자만 알았지 의자는 모르느냐. 나는 흉행이 아니고 당당한 의행을 한 것이다.” 라고 고함을 치기도 하였다. 그 뒤 재판장이 또 “그러면 피고의 일에 찬성한 사람은 몇이나 되는가?” 라고 물었을 때, “2000만 민족이다.”라고 대답하자, 창밖에서 “옳다!” 하는 소리와 함께 흥분한 방청객들이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 재판장에게 호령하며, “야만 왜종들은 퇴청시켜라. 그리고 창밖에 나열한 한국인을 모두 입장시켜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너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하고 노기를 띠었다. 사형이 선고되어 공소하였으나 형이 확정되자, “왜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을 빼앗을 수는 있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재판장을 꾸짖었다. 의거에 공모한 조창호(趙昌鎬)·이동수·김정익 등은 징역 15년, 김태선(金泰善)·김병록(金炳祿)·김용문(金龍文) 등은 징역 10년, 박태은(朴泰殷)은 징역 7년, 김이걸(金履杰)·이응삼(李應三)·김동현(金東鉉) 등은 징역 5년, 이연수(李年遂)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으며, 이동수는 도피하였다가 그 뒤 잡혔다. 1962년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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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세브란스병원)
3·1운동기념 터(세브란스병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중퇴하고 세브란스병원 제약 지배인으로 근무하던 이갑성(李甲成, 1886~1981)이 기독교 계통의 주요 지도자들과 더불어 당시 세브란스병원이었던 이 자리에서 사전 연석회의를 개최한 곳이다. 이갑성은 1919년 2월 11일 남대문 밖 교회를 방문한 이승훈으로부터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 사이에 독립운동을 위한 거사가 논의되고 있음을 전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다음 날인 2월 12일 밤 세브란스병원 음악회가 끝난 뒤 지난 1월 27일 대관원(大觀園) 모임에 참석한 바 있는 한위건·김원벽·김형기·윤자영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김문진·이용설·배동석을 병원 구내 자신의 사택으로 불러 국내외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며 독립운동에 대한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 뒤 이갑성은 한 차례 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대표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독립운동 추진상황을 알렸다. 한편 2월 21일 밤에는 장로회 측의 이승훈·함태영·이갑성·안세환·김세환·김필수·오상근, 감리회 측에서 박희도·오화영·신흥식·오기선·현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장로회·감리회 양 교단의 지도자 연석회의가 이갑성의 집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양 교단 지도자들은 천도교 측과의 합동문제에 대해서는 이승훈과 함태영에게 전적으로 일임하기로 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각자 역할을 분담하였다. 3·1운동에서 기독교와 천도교가 하나로 힘을 합칠 수 있기까지의 과정은 순탄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는 3·1운동 계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현상윤의 노력이 컸다. 현상윤은 3·1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던 동경 유학생의 2·8독립선언이 이루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고, 동경 유학생 대표로 송계백이 국내로 왔을 때 그를 만나 2·8독립선언이 실행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동경에서의 독립운동 소식을 천도교 측에 알림으로써 천도교 측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하였다. 천도교 측과의 교섭은 최남선·최린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3·1운동은 천도교·기독교·불교의 3대 종교계 지도자들이 연합함으로써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종교계 연합의 아이디어는 현상윤·송진우·최남선 등에 의해 제안되었다. 이를 위해 이들은 기독교 측의 이승훈과 연락하여 천도교 측과의 연합을 성사시켰다. 이로써 3·1운동의 실천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송진우·최남선·최린 등의 의견이 맞지 않아 연합이 결렬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현상윤이 이를 중간에서 조정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이갑성은 1919년 3·1운동 당시 34세의 나이에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옥고를 치렀다. 3·1운동기념 터(세브란스병원) 표석은 1993년에 서울역 지하철1호선 4번 출구 앞, 현재 세브란스빌딩 맞은편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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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남대문역전 시위)
서울역전광장 3.1운동은 1919년 3월 5일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들의 주도로 남대문역[현 서울역] 광장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 시위운동이다.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자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부각시키기 위해 천도교, 개신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전 민족적 독립 의사 표명을 위한 3·1독립운동이 추진되었다. 이때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학생단 주도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학생단이 이끈 독립 만세시위는 3월 3일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관했다 귀향하던 수만 명의 군중이 참여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3월 1일의 독립선언의 당위성을 재확인하면서 전국에 만세 시위운동을 확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학생들은 독자적인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는 등 독립운동의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등장했으며, 이후 국내 독립운동에서 주역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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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의병발원 표지석
정미의병은 1907년∼1910년 간에 일어난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칠조약 체결, 군대해산 등을 계기로 전개된 일련의 구국항일무력전의 총칭이다. 해산 군인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은 규모와 전력 면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유생 이외에 평민·천민 출신 의병장이 대거 등장하는 등 상인·공인·노동자·농민 등 전 계층이 의병항쟁에 동참하였다. 1908년 초에는 전국의병진의 연합에 의한 서울진공작전이 추진되어 동대문 밖 30리까지 이르렀으나 패퇴하고 말았다. 특히 호남에서의 의병항쟁이 치열했다. 대규모 의병항쟁으로서는 마지막 항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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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구 집
신석구(1875-1950)의 호는 은재이며, 일제강점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항일운동에 앞장선 감리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33세 때 개성 남부감리교회에서 미국선교사 왕영덕(王永德)의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었다. 서울 서대문 밖의 협성신학교(協成神學校)에서 3년간 수학하고 감리교목사가 되었다. 그 뒤 서울·개성·춘천·원산·남포 등지에서 목회하였다. 3·1운동 때에는 오화영(吳華英)·이필주(李弼柱)·박희도(朴熙道)·최성모(崔聖模)·이승훈(李昇薰)·박동완(朴東完)·김창준(金昌俊)·이갑성(李甲成)·함태영(咸台永) 등과 회합,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붙잡혀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신석구는 재판 도중 조선인의 행복과 자유가 점점 증가하고 있지 않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조선사람으로서는(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한다 해도 그러한 것을 희망하지 않는다. 그것은 조선사람으로 하여금 조선정신을 잃어버리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피고는 조선의 국민성을 잃지 않고 있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독립을 계획하려고 생각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도, “항상 그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담대하게 대답하였다. 출옥 후에도 감리교 목사로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감리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따라 신사참배를 행하던 분위기 속에서도 천안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검거, 투옥되었다. 석방된 뒤에는 신사가 없는 지역인 평안남도 용강군 신유리 교회에 가서 시무하다가, 1945년 2월 이른바 전승기원예배(戰勝祈願禮拜)를 거부해 용강경찰서에 3개월간 구금되었다. 광복 후에는 북한에서 공산당과 대결, 3·1절기념방송사건과 기독교민주당(基督敎民主黨) 비밀결사사건 등으로 다시 투옥되었다. 1949년에는 진남포에서 반동비밀결사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죄목으로 피검,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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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동상
유관순(1902 - 1920)은 1916년 지령리 교회에 자주 들르던 샤프(Alice Hammond Sharp, 한국명 史愛理施) 선교사의 추천을 받아 교비 유학생으로 이화학당 보통과에 편입하였다. 이후 서명학(徐明學), 이정수(李禎洙),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 등과 함께 기숙사에서 생활하였다. 유관순은 1918년 3월 18일 이화학당 보통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 1일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였다. 이화학당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이문회(以文會)를 중심으로 오후 3시만 되면 모두 수업을 중단하고, 조국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회와 시국토론회 및 외부인사 초청 시국강연회 등을 개최하고 있었는데, 유관순도 회원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서거하자 학생들은 자진해서 상복을 입고, 휴교에 들어갔으며, 2월 28일에는 정기모임을 통해 전교생이 적극적으로 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이화학당 학생인 신특실(申特實), 노예달(盧禮達) 등은 파고다공원에서 벌어진 3 · 1 운동에 직접 참여하였고, 당시 고등과 1학년인 유관순은 서명학 · 김복순 · 김희자 · 국현숙 등과 함께 ‘5인의 결사대’를 결성하여, 소복을 하고 기숙사를 빠져나와 대한문 앞에서 망곡(望哭)주1을 한 뒤, 남대문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에 합류하였다. 이후 3월 5일, 학생 연합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화학당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정보를 미리 알아낸 학교 측은 교문을 잠그고, 교사들로 하여금 교정 곳곳을 지키게 하였으나, 많은 학생들이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중 신특실 · 유점선 · 노예달 등은 검거되었고, 교사 김독실(金篤實) 등은 투옥되었다. 이날 유관순도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학생들의 시위가 극심해지자 일제는 3월 10일 전국적으로 휴교령을 내렸고, 학교로 갈 수 없게 된 유관순은 13일 기차를 통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 고향으로 돌아오는 기차에서 친구들이 기차소리를 듣고, ‘동전 한 푼, 동전 한 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하자, 유관순은 ‘대한 독립, 대한 독립’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고향에 돌아온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과 조인원 등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고, 숨겨온 독립선언서를 내놓으며, 병천 시장에서의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유관순과 사촌 언니 유예도는 만세운동에 주민들이 사용할 태극기를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1919년 4월 1일, 조인원 · 유중권 · 유중무 등과 함께 병천 시장에서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이었다. 이날 유관순의 부모를 포함하여 19명이 시위 현장에서 순국하였으며, 30여 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은 주도자로 체포되어 공주교도소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공주영명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구속된 친오빠 유우석을 만나기도 하였다. 5월 9일, 유관순은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았고, 중형을 받은 사람들과 경성복심법원으로 넘겨져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받았다. 함께 재판 받은 사람들은 모두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일제의 재판권을 인정하지 않은 유관순은 상고하지 않았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유관순은 이신애, 어윤희 등과 함께 1920년 3월 1일 오후 2시를 기해 3 · 1운동 1주년 기념식을 갖고,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3천여 명의 수감자들이 크게 호응하여 만세 소리가 밖으로까지 퍼져나갔고, 만세를 외치는 함성에 형무소 주위로 인파가 몰려들어 전차 통행이 마비되고, 경찰 기마대가 출동하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유관순은 물론, 많은 애국지사가 심한 고문을 당하였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英親王)의 결혼 기념 특사령으로 유관순의 형기도 1년 6개월로 단축되었으나,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유관순은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이화학당은 형무소 당국에 유관순 시신의 인도를 요구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자 이화학당 교장 월터(Miss Jeanette Walter)는 이 사실을 미국 신문에 알려 세계 여론에 호소하겠다고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결국 일제는 해외 언론에 알리지 않고, 장례는 극히 조용히 치러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시신을 인도하였다. 정부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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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서울연통부지 표지석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서울연통부(聯通府)는 1919년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내와 연락을 취하고, 국내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비밀리에 만든 조직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 터는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순화동 동화약품의 옛 사옥 자리에 해당한다. 1919년 3·1운동 직후인 4월 13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후 임시정부는 임시정부활동의 선전, 독립운동지도, 군자금모집 등의 목적으로 국내에서의 조직기반을 확대하고자 했다. 이에 만들어진 것이 임시정부 직할의 연통부·교통국(交通局) 등이다. 서울연통부는 국내행정을 담당하는 조직으로, 연통제에 따라 국내의 각 도(道)·군(郡)·면(面)에 비밀행정기관을 두어 명령전달·군자금 모집 등을 담당했다. 그리고 교통국은 통신담당기구로 국내외 정보수집과 분석 등을 담당했다. 임시정부는 군자금 마련을 위해 독립공채를 발행하거나 의연금을 거뒀다. 이 자금은 연통부나 교통국 조직망을 통해 임시정부에 전달됐다. 서울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부를 설치하려는 시도는 상해에서 파견된 이종욱(李鍾郁)이 1919년 10월에 연건동에서 청년외교단(靑年外交團)의 송세호(宋世浩), 대동단(大同團)의 나창헌(羅昌憲) 등과 수차 회합을 가지면서 태동했다. 이때 화천정 5번지 동화약방 주인이자 독립운동가인 민강(閔橿)이 임시정부와의 통신 및 문서 수발을 담당할 연락장소로 자신의 집을 내놓아 이곳이 서울연통부의 연락거점으로 사용된 것이다. 이후 연통제는 각 도에 확대 설치됐으나,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피하여 비밀리에 조직해야 하는 관계로 순조롭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황해도·평안도·함경도는 잘 진행되는 편이었으나, 강원도·경상도·전라도 등지에서는 불가능했다. 연통제는 비밀조직이기 때문에 일제의 감시가 심했고, 활동하다가 비밀이 누설되어 탄압과 수난을 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그 결과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구금된 사람도 많았다. 연통제 활동에 참여한 사람은 교사·학생·전도사·승려 등 직업 및 신분에 관계없이 다양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 연통제는 오래가지 못하고 1921년 후반에 이르러 소멸되고 말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 터는 원래 조선 숙종(肅宗)의 왕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태어난 곳이다. 이후 1898년에 동화약방이 들어섰다가 1930년부터 2014년까지는 동화약품의 사옥이 있었다. 현재 해당 자리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서울연통부 터’를 가리키는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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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순 자결터 표지석
이충순(1877 - 1907)은 대한제국기 육군 보병 참위 출신의 의병이다. 수원의 진위대에 배속된 이충순은 1906년 서울에 주둔하였다. 이어 그는 서울시위대 제2연대 제1대대의 견습 참위로 전임되어 군무에 봉직하였다. 한일 강제 병합을 위해 일제가 군대 해산을 감행하였을 때, 그는 서울시위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1907년 8월 1일 서울 시위대의 해산에 항거하여 군인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남대문 부근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이날 시위대군 전사자는 모두 79명으로, 이충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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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감관저 표지석
통감관저는 이토 히로부미 등 한국 침략을 진두지휘했던 일본인 통감이 거처하고 집무를 하던 곳으로, 강제병합 이후에는 1939년 경무대(현재 청와대)로 이전할 때까지 총독관저로 쓰이기도 했다. 식민통치의 정점에 있던 사람의 집무 및 주거공간으로 쓰였다는 점만으로도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이지만 통감관저가 기억돼야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바로 총리대신 이완용이 1910년 8월22일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을 만나 강제병합을 인정하는 조약에 도장을 찍은 치욕스러운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통감관저는 이처럼 나라의 주권을 타국에 넘긴 부끄러운 역사를 되새기게 하는 곳이지만 최근까지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덕수궁 중명전이 지금까지도 외형을 유지한 채 부끄러운 역사의 교훈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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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 의거 터 표지석
김익상(1895 - 1943)는 일제강점기 총독부폭파, 다나카암살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고양 출신.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전근된 것을 기회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 학교가 있는 중국 광둥[廣東]으로 갔다. 그러나 중국 내전으로 인해 학교가 폐교되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전차 회사의 전차 감독이 되어 잠시 일을 보다가 항일 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1921년 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총독 암살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9월 12일 총독부에 잠입하여 2층 비서과(총독실로 오인)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총독부가 폭발로 인해 혼란 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현장을 빠져 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1922년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 대장인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암살이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동지 오성륜(吳成崙, 본명 李正龍)과 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담당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2차 저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선편으로 황푸탄[黃浦灘]에 도착한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오자, 준비하고 있던 오성륜이 다나카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오던 영국 여인이 다나카의 앞을 막아섬으로써, 총탄은 영국 여인에게 명중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 계획에 따라 달아나는 다나카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마저 불발하여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재빨리 현장을 탈출하려고 할 때 중국 경찰이 추격해 오자 공포를 쏘며 주장로[九江路]를 지나 쓰촨로[四川路]로 달아났으나, 즉사한 영국 여인의 남편이 쏜 권총에 맞고 쓰러져 붙잡히고 말았다. 4월 1일 상해 일본 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5월 3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9월 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누차 감형되어 21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