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검색
TOTAL. 224건
-
조선건국동맹터 표지석
조선건국동맹은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 여운형(呂運亨) 등이 조국 광복에 대비하기 위해 1940년대에 비밀리에 조직한 단체이다. 1944년 8월 10일에 국내의 사회주의자들이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해방을 대비하기 위해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내세우고 현우현의 집인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三光醫院)에서 조직한 비밀결사이다. 이여성(李如星)·이만규(李萬珪) 등의 건국동맹 가담으로 조직이 더욱 확대되자 전국적인 조직망을 펴 많은 사람들을 모았다. 건국동맹은 문서로 남기지 않는다는 ‘불문(不文)’, 말하지 않는다는 ‘불언(不言)’,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는 ‘불명(不名)’ 등 3대 원칙을 세웠다. 아울러 각인각파(各人各派)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제의 모든 세력을 구축(驅逐)하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반추축(反樞軸)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건설부면(建設部面)에 있어 일체 시위를 민주주의적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농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등의 3대 강령에 따라 활동하였다. 연맹은 보조단체로 농민동맹, 부인동맹, 청년노동자운동, 학교 학생운동, 철도종업원운동, 교원세포조직운동 등을 직능별 조직으로 두어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또한 식량대책준비위원회와 함께 일본군 후방을 교란하고 군대를 만들 목적에서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특히 결정적 시기에 해외 한인 반일무장역량과 힘을 합쳐 해방을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쟁취하기 위해서 좌우의 이념과 상관없이 해외의 한인 항일단체와 적극적으로 결합을 추진하여, 중국 옌안[延安] 독립동맹과 연계하면서 조선의용군과의 협동 작전을 펴나가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4일에 일본 경찰에 발각된 뒤 조동호·이걸소 등 간부들이 붙잡혀 투옥되었다. 하지만 8월 11일에 일제의 항복을 미리 알고서 이만규가 독립선언문을 작성하였고,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여운형 등 몇몇 간부는 출옥 후 치안을 염려하여 건국청년치안대를 결성하였다. 해방 후에는 비밀 조직이었던 탓으로 조직 활동의 혼란과 분열이 일어났다. 8월 15일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과 더불어 구성원 사이의 공로 다툼으로 조직의 정통성은 깨졌고, 구성원들은 각각 여러 정당과 정파에 흡수되거나 분산되고 말았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된 뒤에는 서울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 별도의 사무실을 설치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파견 구성원과 조선건국동맹본부 고수파가 함께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 뒤 건국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체한다는 결의에 의하여, 1945년 11월 12일에 조선인민당이 결성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
독립선언문 배부 터(이종일 집)
이종일(1858-1925)은 충청남도 태안 출신으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다. 1898년에 최초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하였으며, 대한황성신문 사장에 피임되었다. 고종황제의 탄신일 경축 기사에 성수만세(聖壽萬歲)가 성수망세(聖壽亡歲)로 오기되어 불경죄로 투옥되었으나 중상모략으로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1906년에 천도교에 입교하여 천도교 월보 과장과 보성 인쇄주식회사의 사장직을 맡았다. 1919년 2월, 오세창으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자신도 이 계획에 참여하여 민족대표로 서명하기로 결심하였다. 2월 27일 이종일이 사장으로 있던 천도교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공장 감독 김홍규에게 명하여, 최남선이 경영하던 신문관의 직공이 짜서 최린의 집에 보관 중이던 독립선언서 활자판을 가져오게 하여 이를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에 김홍규는 인쇄 직공 신영구에게 인쇄하도록 하였다. 이종일은 독립선언서 중에서 2천 매를 28일 보성사 간사인 인종익에게 주어, 1천 5백 매는 전주 천도교구에 보내고, 나머지는 충주로 보내어 밤중에 살포하도록 하였다. 또한 독립선언의 취지를 국내에 보도하고,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박인호, 윤익선과 함께 독립신문을 발간하기로 협의하였다. 이에 송현동에 있는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손병희와 함께 민족대표로 서명한 독립선언서 전말을 기재하고,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원고를 작성하여 윤익선의 명의로 발간하기로 했다. 또 3월 1일 자신이 경영하는 보성사에서 김홍규로 하여금 독립신문을 인쇄케 하여 임준식에게 배포하도록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에 인사동 태화관에 손병희 등과 민족대표로 참석하여 자신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약 100매를 탁상에 놓고, 이 자리에 모인 민족대표에게 돌려보게 하고 함께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3년에 걸쳐 ≪한국독립비사(韓國獨立秘史)≫를 집필하여 발간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압수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
3.1운동책원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하고 있는 본 비는 1919년 중앙고등학교 교장이던 송진우, 김성수, 그리고 교사이던 현상윤 등이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 모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문 작성 등 3.1운동 계획을 세우던 것을 기념하여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가 3·1운동의 태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이상화 시비
이상화(1901 - 1943)는 대구(大邱) 사람이다.일제에 대한 저항시인이며, 대구고보 재학시인 1919년 3월 8일의 대구서문외(西門外) 장날을 이용하여 이만집(李萬集)·김태련(金兌鍊)·김영서(金永瑞) 등과 함께 독립만세 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학생 시절인 1918년,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新羅祭)의 노래」를 발표하여 민족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켰으며, 3월 8일의 서문외 장날의 독립만세 운동 때는 계성중학교(啓聖中學校) 학생들과의 연락책으로 활약하면서 연합시위를 전개하여, 여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그 뒤에도 저항시를 통하여 민족혼을 일깨웠는데 1922년에는 『백조(白潮)』지 창간호에 「나의 침실로」를, 1926년에는 『개벽(開闢)』지 6월호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을 발표하였다. 1923년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잡지 향영(響影)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귀국하여 1924년부터 1934년까지 문단을 제패했던 카프(KAPF : Korea Proletarian Artist Federation)를 발기하여 활동하였다.1935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친형인 이상정(李相定) 중국군 장군과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하고 1937년 귀국하였다. 그러나 곧 대구경찰서에 붙잡혀 2개월간 구금되어 고문을 받고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3.1기념관(중앙고보 숙직실)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에서 인촌 김성수를 비롯 고하 송진우, 기당 현상윤 등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모여 3.1운동을 모의했다. 구체적인 거사 게획은 인촌, 고하, 기당 세사람이 이곳에서 처음 발의했고 인촌을 배후에 두고 49인이 거사를 주도했으며 이들 중 33인이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낭독했다. 중앙학교는 개교 65주년 기념사업으로 1973년 당시 숙직실을 복원하여 3.1기념관을 설치하고 3.1운동 책원지비를 세웠다.
-
3.1독립운동책원지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위치하고 있는 본 비는 1919년 중앙고등학교 교장이던 송진우, 김성수, 그리고 교사이던 현상윤 등이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 모여 독립운동에 필요한 독립선언문 작성 등 3.1운동 계획을 세우던 것을 기념하여 1973년 6월 1일 동아일보사가 3·1운동의 태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
중앙고보 숙직실 터
중앙고보 숙직실이었던 이 곳은 일본에서 추진하던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을 국내에 알려 3.1운동을 촉발시킨 곳이다. 일본 도쿄 유학생 송계백이 1919년 1월 중앙고보를 방문하여 숙직실에서 교사 현상윤, 교장 송진우와 만나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독립 선언서 초안을 전달함으로써 3.1운동을 촉진하였다. 중앙고보 숙직실은 1917년 김성수가 계동 교사를 지으면서 교장 사택으로 사용하였던 곳이며, 현재의 강당 정문 앞에 있던 당시 숙직실은 강당을 지으면서 철거하고 1973년 '3.1기념관'으로 복원하였다.
-
한국스카우트발상지비(조선소년군)
조철호(1890 - 1941)는 일제 치하의 청소년들에게 독립사상과 민족적 단결을 고취하는 것을 목적으로 조선소년군을 창설했다. 1922년 10월 5일 중앙고등보통학교(현 중앙고등학교)의 솔밭 후원에서 8명의 학생을 단원으로 조선소년군 경성제1호대(京城第一虎隊)를 발대하여 조선소년군이 창설됐다. 이것이 연원이 되어 현재의 한국스카우트운동이 시작됐다. 중앙고등학교는 한국스카우트운동의 본산이자 발상지다. 조선소년군의 창설을 기리고자 중앙중·고등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3월 22일 교정에 '한국스카우트발상지비'를 건립하였다.
-
여운형 집
몽양 여운형(1886~1947)은 경기도 양평 출신.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회숙(會叔). 호는 몽양(夢陽). 아버지는 여정현(呂鼎鉉)이며 어머니는 경주 이씨이다. 14세 때에 유세영(柳世永)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陳相夏)와 재혼하였다. 1900년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였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興化學校)와 통신원 부설의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에서 수학하였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4년 중국 난징[南京]의 금릉대학(金陵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독립운동가ㆍ언론가ㆍ정치가. 호는 몽양(夢陽). 대한민국 임시 정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조선중앙일보사 초대 사장을 지냈다. 광복 후에는 건국 준비 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좌우익의 합작을 추진하다가 1947년 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저격을 당해 서거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2008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3.1운동 유적지(유심사 터)
본 사적이 위치한 곳은 3.1운동 당시 불교 잡지 「유심」을 발행하던 출판사 유심사가 있던 곳이다.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이 이곳에서 불교계의 3.1운동 참여를 주도하였다.유심사는 1918년 9월에 창간되어 <유심(惟心)>이라는 잡지를 그 해 12월 까지 제3호를 발간하였으며 주로 불교 수양 잡지를 출판하던 곳이다. 1919년 2월 28일 만해 한용운 선생이 중앙학교 학생 200여명을 이곳에 모이게 하고 독립선언과 거사 준비 경위 등을 설명하고 불교 청년의 역량발휘를 강조하면서 독립정신을 심어주었던 곳이다. 한용운은 계동 43번지에 1918년 8월부터 살다가 1919년 3.1운동과 관련하여 투옥되었다.
-
근우회 동판
근우회는 1927년에 조직되었던 독립운동 및 여성운동 단체이다. 1919년 3·1운동은 조선총독부의 통치 방침에 영향을 주어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문화통치’는 경찰력의 증강을 바탕으로 한 기만적 통치방침이었으나 역설적으로 그간 조선인에게 허용되지 않았던 언론·출판·집회·결사의 공간이 일부나마 열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공간 위에서 각 분야로부터 사회운동이 활발해졌고, 여성운동도 그중 하나였다. 먼저 여성교육과 계몽을 중심에 두었던 여성단체들이 1920년대 전반 주된 여성운동의 명맥을 형성하였다. 조선여자교육협회(朝鮮女子敎育協會)와 조선여자고학생상조회(朝鮮女子苦學生相助會) 등 여성의 교육 및 계몽을 통한 생활개선을 도모하는 단체들이 여럿 생겨나 활동하였다. 특히 종교 단체, 그중에서도 기독교에 기반을 둔 여성들은 활발하게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1920년대 초반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대표적으로는 유각경(兪珏卿), 김활란(金活蘭) 등이 주축이 되었던 조선여자기독청년회연합회(YWCA)가 있었다. YWCA는 근우회 창립 전까지 조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여성단체였다. 이들은 강연회, 강습 등을 통해 여성에게 신지식을 보급하고 여성의 지위 향상 및 해방을 주창하는 한편, 축첩 폐지, 공창제 폐지 등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여성단체들의 활동은 1920년대 민족주의 여성운동의 흐름을 형성했다. 한편 1920년대 초 조선에 사회주의 사조가 소개되고 사회주의 이론에 입각한 사회운동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면서 여성운동에서도 사회주의적 여성해방 이론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여성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무산계급 여성, 여성노동자들이 여성운동 및 여성해방의 주체라고 보았으며 궁극적으로는 무산계급운동에 합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단순한 여성의 지위 향상에 운동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이 사회변혁운동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기반 위에서 1924년 5월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가 창립되었으며,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이 각 분파마다 조직되었다. 북풍파(北風派)·화요파(火曜派) 계열의 경성여자청년동맹(京城女子靑年同盟) 및 서울파의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위의 민족주의 계열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계열 여성운동은 각기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종교적 기반으로 인하여 여성의 권리에 대해 보수적인 인식을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여성 대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무산계급 여성들의 현실을 타개해 줄 구체적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1923년 이후부터는 비교적 침체 상태에 접어든 상태였다.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운동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성에 대한 첨예한 이론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지만 고등교육을 받은 여성들에 의한 도시 중심의 운동이었기 때문에 역시 여성의 대다수인 지방과 농촌 여성들에까지 대중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1926년 초 조선 사회운동계에 민족협동전선을 결성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그 결과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자연스럽게 여성운동 진영에서도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을 아우르는 전국적 규모의 여성단체를 결성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이념 및 지도력 부재를 협동전선을 통해 돌파하고자 하였고,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봉건유습 타파라는 실질적인 여성해방 과제를 포용하고 기존의 대중성 부족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근우회는 여성해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다른 가치와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던 운동 진영들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
서울 3.1독립운동기념터 표지석(보신각 앞)
본 사적이 위치한 보신각 앞은 1919년 3.1독립만세시위의 중심지로서 4.23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선포한 곳이다. 이곳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의 성과를 기념하고자 본 안내석이 건립되었다. 한성정부는 일제 강점기인 1919년 4월 23일 한성(서울)에서 선포된 임시정부로, 3.1운동 이후 국내외 애국지사들이 조선의 독립에 대비해 결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