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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리여수 가게 터
일본인 외리여수가 운영하던 잡화상이 있던 곳으로, 만세운동 때 주민들이 가게를 망가트린 대가로 외리여수가 큰 손해배상을 요구하여 주민들은 연대 피해 보상에 의해 큰 생활고를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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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면사무소 터
원곡 양성지역의 3.1운동은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일어난 만세 운동으로 농민층이 주류가 되어 일으킨 대표적인 항쟁이다. 이 지역의 만세운동은 특히 2,000여명이나 되는 다수의 민중이 참여하였고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일본인 상점 가옥 등을 파괴 혹은 방화하는 등 공격적인 양상을 띄고 있다. 더불어, 경부선 철도 차단을 시도하는 등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3.1운동 중에서 3대 만세운동(황해도 수안군 수안면의 시위, 평안북도 의주군 옥상면의 시위 포함)으로 손꼽힐 정도로 규모가 컸다. 그 중에서 양성면사무소는 일제가 양성 주민들을 관리, 통솔하고자 설치한 행정기관으로, 주민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불을 지르고 돌을 던져 부수어 저항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벽화와 안내판, 조형물이 당시 독립에 대한 열망을 기리고 정신을 기억하는 의미로 설치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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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독립운동 역사마을(양성주재소 옛 터)
안성 3.1운동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주요 시위가 있었던 장소(양성 주재소 옛 터)에 세워진 기념 사적이다. 4월 1일 오후 8시경,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최은식(崔殷植) 등이 1,000여 명의 원곡면민들을 주동해 외가천리에 있는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장을 선두에 내세워 횃불을 들고 양성면으로 시위행진하였다. 이들은 양성면에 있는 경찰관주재소·우편소·면사무소를 파괴하기로 결의하고 양성면에 도착할 무렵, 동항리에 있는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귀가하던 1,000여 명의 양성면민들이 합류됐고, 이로써 시위군중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양성주재소로 몰려가 일본인 순사부장을 불러내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주재소에 불을 놓아 전소시켰다.이어 일본인이 경영하는 잡화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집을 습격해 기물을 파괴, 방화한 뒤 우편소를 파괴하였다. 또한, 인근 주재소와의 연락을 두절시키기 위해 전신주 3개를 도끼로 찍어 쓰러뜨렸다. 또, 면사무소로 가서 서류와 기물을 파괴하고 뒷산으로 올라가 독립만세를 삼창한 뒤 해산하였다. 이튿날 새벽 4시에 귀향한 원곡면민들은 다시 원곡면사무소를 파괴, 방화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만세운동 때 잡혀 옥고를 치른 사람만도 126명이나 되었다. 이렇게 만세 군중이 불태워버린 양성 주재소는 보다 주민의 감시와 통제가 쉬운 위치로 옮기게 된다.(양성면 동항리 342-1) 이 장소는 만세 군중에 의해 불타버린 양성 주재소의 옛 터가 있던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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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공립보통학교 터
양성공립보통학교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난 시위지이다. 1919년 3월 11일 오전 11시, 양성공립보통학교(현 양성초등학교) 교정에서 학생들에 의해 안성 최초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날의 만세운동은 학생들의 피해를 우려한 교사들에 의해 제지되었지만 양성면에서 일어난 만세운도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안성4.1만세운동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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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집 터
이정근(1856~1919)은 1919년 4월 5일 화성군 향남면 발안(華城郡鄕南面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오후 발안 장터에서 안상용(安相容)·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김덕용(金德用)·강태성(姜太成) 등과 함께 1천여 명의 시위군중의 선두에 서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부상자가 발생하자, 그는 격노한 시위 군중과 함께 일경들에게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었다. 한편 그는 이날의 무력 충돌 때 일본 경찰이 휘두른 칼에 찔려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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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유해발굴 터
제암리 학살사건은 3·1운동 당시 일본 군대가 경기도 수원군(지금의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서 주민을 집단적으로 살해한 만행사건이다. 제암리 사건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다.1919년 4월 15일 오후 2시경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일본 육군 중위가 이끄는 일단의 일본군경이 앞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제암리에 도착해서 마을 주민 약 30명을 제암리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주민들이 교회당에 모이자 아리타는 출입문과 창문을 모두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같은 학살을 저지른 일제는 증거인멸을 위해 교회당에 불을 질렀으며, 아직 죽지 않은 주민들이 아우성을 치며 밖으로 나오려고 하였으나 모두 불에 타 죽었다. 이때 교회당 안에서 죽은 사람이 23명, 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이었다.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일제는 인근의 교회건물과 민가 등 31호에 불을 질러 또다시 살상자를 내었다. 이와 같은 일제의 만행은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스코필드는 현장으로 달려가 그 생생한 모습을 사진에 담아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해서 미국에 보내어 여론화하였다. 1982년 제암리학살현장의 유적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제암리 유해발굴터는 제암리 학살사건 당시 순국한 23인 열사의 유해가 발굴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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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창 집 터
김용창(1926~1945)은 경기도 수원(水原) 사람이다. 1941년 10월, 서울로 상경하여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법문학부(法文學部) 사환, 체신국 경성보험관리소(京城保險管理所) 직원으로 근무하는 한편, 야간에는 덕수공립상업학교(德壽公立商業學校)에 재학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43년 6월경부터 동 근무지의 대우가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별이 있음을 알고, 이 때부터 한국역사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여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그 후 1944년 4월 중순경 같은 학교 동료인 김익설(金益卨)에게 소기(小磯) 조선총독의 민족차별정책을 비난하였으며, 5월에는 보험관리소 사무실에서 동료들을 대상으로 "미국·러시아·상해 방면에서 조선인이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조선이 독립하면 나는 일본인을 쫓아 버릴 작정이다. 이번 전쟁에 일본이 패한다 하더라도 조선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히려 못 이기는 편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등 민족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5월 초순 보험관리소 대변소의 판자 벽에 연필로 "반도 2천 6백만 동포여. 자 일어서라! 조선 독립의 때가 왔다. 지금 와서 지원병이니 징병이니 하고 있다. 아아! 가련하도다"라고 써 붙이는 등 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하다가 소위 치안 방해 혐의로 일경에 붙잡혔다. 1944년 1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4월 3일 옥중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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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원식 집 터
홍원식(1877~1919)은 경기도 화성(華城) 사람이다.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安相容)·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김덕용(金德用)·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한말(韓末)의 군인으로서 1907년(융희 1)의 군대해산에 반대하여 일본군과 직접 대결하다가 부상하여, 고향인 제암리로 내려와 김성열(金聖烈)·안종후(安鍾厚) 등과 함께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를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이 때 이 사실을 수사하기 위해 파견된 일본 헌병 두명을 타살하고 피신생활을 하던 중 3·1운동을 맞았다. 그는 4월 5일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마침내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원(水原)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되어 이 보복으로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하였다. 그 후에도 제암리(堤岩里)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유전준부(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基督敎)·천도교(天道敎)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이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부인과 함께 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유전준부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같은 만행으로 23명이 현장에서 죽고, 이어 일본군경은 고주리(高舟里)로 달려가 6명을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일본군은 그들의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 때 그도 일제의 만행으로 그의 부인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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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헌 집 터
김정헌(1876~1919)은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安相容)·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김덕용(金德用)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마침내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그러자 수원(水原)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되어, 보복적으로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하였다. 그 후에도 제암리(堤岩里)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아왔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유전준부(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基督敎)·천도교(天道敎)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유전준부 중위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같은 만행으로 현장에서 23명이 죽고, 이어 고주리에서 6명이 죽었는데, 일본군은 그들의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 때 그도 일제의 만행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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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용 집 터
김덕용(1900~1919)은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安相容)·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마침내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그러나 수원(水原)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되어, 이 보복으로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하였다. 그 후에도 제암리(堤岩里)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유전준부(有田俊夫)라는 일본군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基督敎)·천도교(天道敎)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고 부인과 함께 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유전준부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같은 만행으로 23명이 현장에서 죽고, 이어 고주리에서 6명이 죽었는데, 일제는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 때 그도 일제의 만행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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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락 집 터
안종락(1871~1919)은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鄕南面 發安) 장날을 이용하여, 안진순(安珍淳)·김덕용(金德用)·안상용(安相容)·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마침내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원(水原)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되어, 이 보복으로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하였다. 그 후에도 제암리(堤岩里)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본인 중위 유전준부(有田俊夫)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基督敎)·천도교(天道敎)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에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유전준부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같은 만행으로 23명이 현장에서 죽고, 일본군은 그들의 만행을 인근 고주리(高舟里)에까지 뻗쳐 6명을 살해하고,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이 때 그도 일제의 만행으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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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옥, 안종엽, 안종환, 안명순, 안관순 집 터
안종옥(1861~1919), 안종엽(미상~1919), 안종환(1899~1919), 안명순(1900~1919), 안관순(미상~1919)은 1919년 4월 5일 향남면 발안 장날을 이용하여, 안진순(安珍淳)·김덕용(金德用)·안상용(安相容)·강태성(姜太成) 등과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이날 1천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터를 행진하였는데, 마침내 일본 경찰과 충돌하여 그들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군중은 투석으로 대항하여 일본인 순사부장이 돌에 맞아 죽고, 많은 일본인 거주자들도 부상하였다. 이렇게 되자 수원에서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대량으로 증파되어, 이 보복으로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고문하였다. 그 후에도 제암리 일대는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4월 15일 오후 2시경 일본인 아리타 도시오 중위가 인솔한 20여 명의 군경이 제암리에 도착하여, 민간인들에게 알릴 일이 있다고 속여 기독교·천도교인 약 30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들은 아무 의심 없이 교회안으로 들어갔다. 이 때 아리타 도시오는 출입문과 창문을 잠그게 하고 집중사격을 명령하였다. 이같은 만행으로 23명이 현장에서 죽고, 일본군은 그들의 만행을 고주리에까지 뻗쳐 6명을 살해하고, 학살만행 현장을 은폐시키기 위하여 교회에 불을 지르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같은 일제의 만행은 외국인 선교사들의 분노를 사게 하여, 4월 17일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W.Schofield)는 현장으로 달려가 사진을 찍어, 「수원에서의 잔학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본국에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양식있는 일본인들조차 분격케 하여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저팬 크로니클(Japan Chronicle)」등은 학살사진과 목격자의 증언까지 곁들여 상세히 보도하였다. 일제의 만행으로 독립운동가 다섯 분 모두 제암리 학살사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