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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봉산 병풍바위 암각문
화봉산 병풍바위 암각문은 면암 최익현과 이 고장의 출신 대학자 유기일이 자주 만나던 바위로 유기일의 시와 최익현이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화봉산은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으로 산 아래에는 이항복 선생의 사당인 화산서원이 있다. 원래는 꽃뫼(화산/花山)라고 불렸는데 산 인근에 위치한 화산 서원에서 수학하는 선비들이 화봉산이라고 부르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전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이 산 위에서 횃불을 피워 위험을 알렸기에 화봉산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화봉산 중턱에 있는 이 병풍바위는 최익현과 유기일이 자주 만나던 바위이며 바위에 새겨진 유기일의 시와 최익현의 글씨가 음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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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필 묘
유진필(1885-미상)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전국에서 퍼져나가자 뜻을 모아 논산시장일에 궐기하기로 결의하고, 5일 오전 4시, 공회당에 모여 간단한 점검 후에 논산 우시장에서 여러 지역의 부락민과 합세하여 오전 9시부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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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원 추모비
3·10 면천 학생 독립만세운동은 충청남도 당진시 면천면에 소재했던 면천 공립 보통학교 학생들이 1919년 3월 10일에 일으킨 독립만세운동이다. 당시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원용은은 형 원용하와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고종의 인산에 참례한 후 귀향하여 만세 운동을 계획하였다. 원용은은 동급생인 박창신(朴昌信), 이종원(李鍾元)과 뜻을 함께한 후, 오후 4시경 전교생 90여 명을 인솔하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는 현수막을 들고 면천의 동문 밖에서 시내를 관통해 공립보통학교까지 시위를 전개하였다. 반장인 이종원은 행렬의 질서를 유지하고 이탈자를 막기 위해 대열의 선두에 섰고, 부반장인 박성은(朴性殷)은 대열의 후미에 섰다. 이 과정에서 학생들은 일본 헌병에게 억압당했고, 공립 보통학교 교사들에 의해 만류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우리의 독립을 당당하고 힘차게 외쳤고, 면천 공립보통학교 학생의 독립 열기를 드높였다. 만세 운동이 끝난 뒤, 많은 학생들이 일제 경찰에게 취조와 고문을 받았다. 특히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던 원용은과 박창신은 공주 형무소에 이감되었다가 4개월 만에 석방되었고 결국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종원(1899~1985)은 면천공립보통학교 3.10 만세운동 당시 최고학년 급장으로 전체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도록 원용은 등과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고 거사일에는 행진의 선두에서 학생들을 지휘 통솔하고 이끌었다. 후일 만세운동 당시의 상황을 회고록에 자세히 기록하여 소중한 기록이 오늘날까지 알려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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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산사(최익현, 최면식 사당)
채산사는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에 있는 최익현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1976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채산사는 1906년 최익현의 우국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유림들의 발의로 건립되었으나 1927년과 1943년 일본군의 훼철과 유림의 재건이 반복되던 중 1975년 건물을 모두 해체 복원한 것이다. 사당 주위를 담장으로 둘렀으며 입구는 3칸의 솟을 삼문으로 꾸몄다. 사당은 이벌대의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의 평면규모를 이루고 있는데 정면칸은 개방된 퇴칸으로 이루어졌다. 지붕은 정면과 배면쪽으로만 면이 구성된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측면의 박공부에 풍판을 달아 목재 마구리(직각으로 자른 끝면)의 부식을 방지했다. 전면은 서까래위에 각이 진 부연을 덧달아 처마를 길게 빼낸 겹처마이고 배면은 서까래로만 이루어진 홑처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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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돈 추모비
황의돈(1890-1964)은 충청남도 서천 출생의 역사학자이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호는 해원(海圓)이다. 전통적인 유학 가문에서 태어나 1894년 할아버지 황태현(黃泰顯)으로부터 한학을 공부해 17세 되는 1906년까지 한서 수십 권을 통독할 정도로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쌓았다. 1907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근대식 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 보습과(補習科)에 입학해 1년 만에 수료하고 그 뒤 2년간은 서울과 일본의 동경(東京)을 내왕하며 근대 학문을 섭렵하였다. 1909년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존망의 위기에 놓였음을 직시하고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 중영촌(中營村)으로 이주, 명동학교(明東學校)를 창설하고 국사교육 등을 통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1910년 일제의 강압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귀국,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국 방면으로 다시 망명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승훈(李昇薰) 등의 만류로 망명을 포기하고, 안주·가산·정주 등지에서 국사교육을 맡아 후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1년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국사교육을 맡았으며, 1913년에는 향리에 돌아와 청년들에게 국사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1916년 YMCA강당에서 국사 강연을 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일본 경찰에 붙잡혔으며, 재직하고 있던 휘문의숙의 교사직에서 파면되기도 하였다. 1920년 이후 약 20여 년 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국사와 한문를 강의하였고, 휘문고등보통학교와 중동학교의 교원도 겸임하였다. 1938년 이후 일제의 침략전쟁인 중일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학교에서의 국사·국어교육이 금지되자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다. 조선일보사 기자 재직시에는 고적조사를 담당했으며, 오지영(吳知泳)의 『동학사』 서문을 쓰기도 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기자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은거하였으며, 52세 때인 1942년에는 불교에 귀의하여 오대산에 입산, 방한암(方漢巖) 선사에게 사사하였다. 그 이후 말년에는 주로 국사와 불교의 선과의 결합을 시도하였다. 1945년 광복이 되자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며 후진 교육에 진력하다 75세로 죽었다. 그의 생애는 자신이 술회하였듯이 초년에는 한문학, 중년에는 사학(史學), 말년에는 선학(禪學)에 종사하는 등 세 번이나 배움의 길을 바꾸었으며, 이는 국권상실 시대에 국사교육을 통해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그 주된 뜻이 있었다. 저술로는 『대동청사(大東靑史)』·『조선신사(朝鮮新史)』·『중등조선역사(中等朝鮮歷史)』 등의 사서와 『화담 서경덕전』·『이목은전』·『안의사(중근)전』·『손의암(병희)전』 등 전기 다수, 그리고 「갑오혁신운동과 전봉준」 등 여러 편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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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미만세운동 유적비
기미만세운동 유적비 1919년 4월 4일부터 발발한 양양의 만세운동은 함홍기, 권병연, 김학구 의사 등 3명이 경찰서 현장에서 왜경의 총칼에 피살된 후 연일 각 면으로 확산되었다. 동년 동월 9일 현북면에서도 궐기 대회를 마치고 양양으로 들어가 합세할 계획이었으나 지체한 시간 관계로 기사문리 주재소를 공격하기로 당초 계획을 변경하여 "관고개"를 넘어 주재소 앞에 이르러 만세를 연호하다가 미리 잠복하고 있던 일제 수비대와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현장에서 9명이 피살되고 11명이 중상을 당하였다. [ 피살자 ] 현북면 하광정리 - 전원거, 중광정리 - 임병익, 명지리 - 홍필삼, 명지리 - 김석희, 어성전리 - 고대선, 어성전리 - 황응상, 미곡리 - 문종상도천면 동초리 - 진원팔, 동초리 - 이학봉 [ 부상자 ] 현북면 하광정리 - 이봉우, 하광정리 - 김응옥, 상광정리 - 오세관, 상광정리 - 오문환, 상광정리 - 오세풍, 상광정리 - 황중칠, 어성전리 - 함병원, 어성전리 - 강춘실, 어성전리 - 정홍엽, 어성전리 - 김봉구, 미곡리 - 홍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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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철 초혼비
나철(1863~1916)은 29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권지부정자를 지내다가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6월 동지 이기(李沂)·오기호(吳基鎬) 등과 같이 일본에 건너가 정계요인을 역방하면서 "동양평화를 위해 한(韓)·청(淸)·일(日)이 동맹할 것과 일본은 한국에 대하여 선린의 교의로서 독립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였다. 귀국 후에는 박제순(朴濟純)과 이지용(李址鎔)이 정권 싸움을 하는 것을 보고 폭발장치를 한 상자를 보내 이들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다시 오적(五賊)을 제거하기로 모의하고 동지규합과 자금모집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박대하(朴大夏)·이홍래(李鴻來) 등과 같이 권총을 구입하여 수차에 걸쳐 이들의 처단을 시도하였으나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다시 재의거를 계획하였으나 서창보(徐彰輔)가 붙잡혀 사건전모가 폭로되자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간의 유형(流刑)을 선고받아 그해 7월 12일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지도(智島)에 유배되었으나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후 그는 평소에 믿고 있던 단군성도를 숭상하여 항일투쟁에 힘을 기울이다가 민족갱생의 도(道)는 국조단군의 교(敎)를 부활함에 있음을 깨닫고 1910년 7월에 단군교를 대종교로 창교(創敎)하여 제1세 교주에 추대되어 김 헌(金獻)·윤세복(尹世復)·이원식(李元植) 등과 같이 활약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하여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북만주 10여 개소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사업을 펴는 한편 항일 구국운동에 헌신하다가 귀국하였으며, 1916년 9월 12일(음력 8월 15일) 황해도 구월산에 입산하여 삼성사에서 일제의 폭정에 대하여 울분을 참지 못한 나머지 동포에게 유서를 남기고 일왕과 일의회에 견책의 장서를 보낸 다음 국가와 교(敎)를 위하여 자결 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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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원 묘
유제원(?~?)은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의 장남이며 팔도창의대장 의암 유인석의 조카로, 아버지인 유홍석의 의병 활동을 적극 도왔으며, 1911년 4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요녕성 동남부 압록강 변에 자리하고 있는 관전현에서 항일활동을 하였다. 의암 유인석의 지시에 따라 의병을 거느리고 환인현과 관전현의 접경지대인 혼강 양안, 관전현 보달원과 소고령지, 그 주변 등지에서 향약계, 농무계 등 반일 단체를 조직하여 황무지 개간, 후진양성 등에 진력하였으며, 의병을 거느리고 의진 밀영(密營)을 건립하여 비밀리에 의병훈련장을 만들어 놓고 의병 훈련을 시키는 등 국권회복운동을 도왔다. 1915년(을묘년) 10월 2일 사망 후 중국 요녕성 해성시 회인현 대아하에 안장되었다가 1930년 아들 유돈상이 춘천시 남면 관천리 선영하에 이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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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묘
윤희순(1860~1935)은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이면서 독립운동가로 유제원의 아내이다. 군자금 모금 및 무기와 탄환을 제조‧공급하는 탄약 제조소 운영,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대 조직, 〈안사람 의병가〉 등 8편의 의병가 작사·작곡, 4편의 경고문 제작·배포하는 등 여성들의 의병 활동을 이끌어내기에 적극 앞장섰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조선독립단 활동, 노학당이라는 학교를 세워 항일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장남 유돈상이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 후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음) 서거하였으며, 중국 요녕성 해성시 묘관둔 북산에 안장되었다. 사후 59년 만에 손자 유연익에 의해 발굴된 유해는 1994년 10월 17일 고국으로 봉환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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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돈상 묘
유돈상(1894~1935)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11년경 할아버지 유홍석과 아버지 유제원(柳濟遠), 어머니 윤희순(尹熙順)을 따라 만주로 건너가 만주, 몽고, 중원에 흩어져 있는 애국자들을 모집한 끝에 음성국, 음성진 등 180여 명의 동지를 얻어서 복벽운동 단체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일명 조선독립단)을 조직하였으며, 이후 홍익단(弘益團)과 합세하여 일본 당국을 공격하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기밀이 누설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군대 양성의 절실함을 깨닫고 음씨 형제 및 중국인 장경호와 함께 학교를 세우고 민족정신 교육과 인재 양성을 위한 군사훈련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8년에는 귀국하여 강원도 춘천, 충청북도 제천 등지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31년 다시 만주로 건너가 무순(撫順)에서 독립단을 재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고문 끝에 42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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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독립군 무명용사 위령탑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대한독립군용사들은 조국을 되찾기 위해 국내는 물론 만주, 연해주 지역등에서 처절하게 독립투쟁을 하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산화하였다. 이 탑은 독립군 무명용사들의 혼백을 받들기 이해 광복회 주관하에 일년여의 공사를 거쳐 2002년 5월 17일 제막식을 하였으며, 5단의 기단위에 좌대는 원형으로 삼태극을 만들었고, 독립군들의 머리를 맞대고 회의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3개의 탑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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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 동상
이봉창(1900 -1932)는 일제강점기 일왕투탄의거와 관련된 독립운동가로, 서울 출신이다. 이명은 기노시타(木下昌藏)이다. 1921년경 한 · 일 간의 임금 격차 문제에 눈을 뜨고 항일의식이 싹텄다. 1924년 9월 자택에 항일 단체인 금정청년회(錦町靑年會)를 조직, 동 총무가 되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한민족의 생계가 위협받는다는 생각에 방랑 생활보다는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맹세, 1930년 12월 중국 상해로 갔다. 1931년 1월 한국인 거류민단 사무실을 찾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호소했으나 민단 간부들이 이봉창의 거동을 수상하게 여겨 받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뒤 김구(金九)가 이봉창의 진의를 알고 자신이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시켜, 이봉창의 소신대로 일본천황폭살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거사 자금이 여의치 못해, 월급 80원을 받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와 악기점에서 일하며 확실하게 준비를 하였다. 원로 이동녕의 승인하에 김구도 군자금모집을 펴던 중 재미 동포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고 거사를 촉진시켰다. 당시 중국군 대령으로 복무하던 왕웅(王雄), 즉 김홍일(金弘壹)에게 부탁해 상해공병창에서 수류탄 1개를 구입하고 김현(金鉉)으로부터 또다시 수류탄 1개를 입수하였다. 이 수류탄을 받은 즉시 거사자금 300원을 가지고 1931년 12월 13일 안중근(安重根)의 막내동생인 안공근(安恭根)의 집에서, 양손에 수류탄을 들고 선서식을 마친 뒤 17일 일본 동경으로 향하였다. 1932년 1월 8일, 동경 요요키[代代木] 연병장에서 만주국 괴뢰황제 부의(溥儀)와 관병식을 끝내고 경시청 앞을 지나가는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명중을 시키지는 못하고 체포되어 토요다마[豊多摩]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사건으로 이누가에[犬養] 내각이 총사퇴하고 다수의 경호 관련자가 문책당하였다. 그 해 10월 비공개재판에서 전격적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10일 이치가야형무소[市谷刑務所]에서 사형에 처해졌다. 이봉창의 거사가 알려지자 중국의 각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하였다. 특히, 중국 국민당 기관지인 『국민일보』는 “한국인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했으나 불행히도 명중시키지 못하였다.”고 보도하여 모든 중국인의 간절한 의사를 대변하여 주었다. 그러나 이 보도가 나간 후 푸저우[福州]에 주둔하던 일본 군대와 경찰이 국민일보사를 습격, 파괴함과 동시에 중국 정부에 엄중 항의하는 등 중 · 일 관계가 매우 악화되었다. 또한 일본군은 중국인 자객을 산 뒤 일본 일련종(一蓮宗)의 승려 한 명을 암살하게 하여, 이를 빌미로 제1차상해사변(第一次上海事變)을 일으키는 등 그 파급 양상이 심각하였다. 1946년 7월 6일 이봉창의 유해를 서울 효창원에 안장하고 국민장으로 모셔져 오늘에 이른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