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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의병 무기 제조, 훈련장 유적기념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 위치하고 있는 항일 의병 무기 제조, 훈련장 유적기념비는 해당 장소에서 정미의병 시기 유홍석(柳弘錫)의 춘천의병들이 전투에 사용할 화약을 제조하고 전투 훈련을 받던 곳을 기념하는 사적이다. 춘천의병은 부족한 무기를 보충하고자 여의내골에 무기 제조창을 마련하여 각 가정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모아 화약이나 무기를 만들어 전투를 준비하였다. 아울러 군사훈련이 부족한 의병들을 훈련시키고 전략, 전술을 마련하는 춘천의병의 항일기지였다. 유홍석의 며느리인 윤희순(尹熙順)은 가정리의 고흥류씨 집안 사람들과 마을 주민들을 독려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여 여의내골 주산에서 놋쇠와 구리를 구입하고 무기와 탄환을 제조, 공급하였으며, 의병가를 지어 부르게 하여 의병 훈련을 진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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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내골 의병 훈련장
춘천시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 있는 의병 훈련장은 1907년 대한제국의 광무(고종)황제를 퇴위시키고 군대마저 강제 해산시킨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으려 한 것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참혹한 세태에 통분한 춘천 의병장 외당 유홍석과 여성 의병장 윤희순의 주도로, 700여 명의 청년과 중노년층은 물론 여성, 할머니까지 합세하여 무기와 화약을 제조했으며 여성이 병술 훈련까지 동참했던 치열한 의병 투쟁의 현장이자 춘천의병의 항일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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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성지 발원비(주일당)
충의의 성지인 춘천시 남면 가정리는 한일 강제 합병으로 국권이 상실되었을 당시 13도의군 도총재로 구국 충절의 일생을 바친 의암 유인석이 출생하고 김경달, 유중악 등 15인의 의병장과 국내 최초 을미의병 여성 의병장인 윤희순을 배출한 가정서사(柯亭書社) 주일당(主一堂)이 소재한 곳이다. 주일당 입구 오른쪽에 충의성지 발원비(忠義聖地 發源碑)가 있다. 본 비는 기단 2m, 높이 3.6m, 폭(가로 약2.3m, 세로 약 3.6m) 규모이며, 국권 회복을 위해 헌신한 가정리 지역 의병들의 독립 및 희생정신과 충·효·의 사상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해 2011년 11월 15일 충의성지발원비 건립위원회에서 세운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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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석 묘
유하석(1849~1907)은 의암 유인석의 동생으로 1895년 12월 15일 유인석이 제천에서 거의하자 1896년 1월에 의병진에 입진하여, 동년 7월 유인석이 의병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항일정신의 확산을 위해 만주로 갈 때 동행하였다. 1897년 10월 일시 귀국하여 사돈인 권일선이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을 인수하여 전달하는 등 만주에서 유인석을 도와 활동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거족적 항쟁을 위해 1907년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다가 10월 28일 향리인 가정리에서 거사를 위한 비밀회의 중 의병의 정신적 지주인 유인석을 잡고자 혈안이 된 일경의 기습 방화 공격을 받았으며 흉검에 의해 참살되었다.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6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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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석 묘
유영석(1875~1907)은 화서 이항로의 문인으로 당대의 대학자이던 족숙(族叔) 유중악에게 수학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시행으로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1896년 1월 이소응의 춘천의병진에 유홍석 등과 함께 참여하여 가평 일대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 이후 1907년 7월 광무황제 퇴위사건과 정미7조약, 그리고 8월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유홍석, 유중악 등과 모의하고 춘천 가정리 항곡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유재곤, 박선명, 박화지 등과 함께 의진에 가담하여 춘천 진병산, 가평 주길리 등지에서 일제와 치열한 혈전을 벌였다. 그러나 유홍석 의진은 관군에 비해 열악한 장비 및 훈련 부족으로 주길리 전투에서 의병장 유홍석이 부상당하였고, 유영석은 음력 8월 19일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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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홍석 묘
유홍석(1841~1913)은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의암 유인석의 재종형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였던 윤희순의 시아버지이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에 통분함을 금치 못하여 일제에 복수할 것을 결의하고 유중락·유봉석·김경달과 함께 거의하였다. 그 후 호좌의진이 형성되어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자 이에 합류하여 서무(庶務)를 관장하였으며, 여러 차례 적과 접전하였다. 그러나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던 이강년을 제외한 이춘영·안승우·김백선 등 의병장이 전사하자 의진을 해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907년 민긍호·이강년과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춘천 원주 등지에서 유영석· 유제곤·박선명 등에게 명하여 의병 600명을 모집하여 가평에서 일제와 교전하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만주 환인현(桓仁縣)에 망명한 뒤 1913년 11월 21일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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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중락 묘
유중락(1842~1922)은 1895년 8월에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시행되자 유중악·유봉석·이소응 등과 춘천에서 의병을 선창하였고 1896년 초에는 충북 제천에서 유인석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항쟁을 결의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을 계기로 정미의병이 일어나 경기도 가평에서 의병을 일으켜 주길리 전투에서 격전을 치렀으나 패전하고 은신하여 후진 교육에 전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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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동 묘
유해동(1891~1981)은 의병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의암 유인석(毅菴 柳麟錫)의 아들로 강원도 춘천(春川) 출신이다. 1896년 을미의병의 자진 해산 후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의 한계성을 타개하고자 유인석을 따라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1907년 귀국하여 유인석 의진에서 의병장의 비서직을 맡아 부친을 보좌하며 의병활동에 투신하였다.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던 정미의병을 규합하던 중 일본군의 기습 방화 공격을 받아 변장하여 탈출한 후,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해외기지 건설을 목적으로 1908년 러시아로 향한 부친 의암을 보좌하면서 1915년 부친이 임종할 때까지 독립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뒤 의병장 박장호를 보좌하면서 해외 독립운동기지 구축에 진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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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기 구 묘
지용기(1867~1907)는 춘천 서면 방동리 출신으로, 1895년 을미사변 당시 춘천군 이방 아전(衙前)이었다. 1896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이소응 등이 이끄는 춘천의진에 참가하였고, 유인석 의진으로 옮긴 후 유인석이 서북 대행군하자 화천전투 때 잔류하여 줄곧 춘천·화천·양구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지용기는 1907년 정미의병 당시 박선명·최영석·박운선 등과 가평을 중심으로 의병 300여 명을 소모하여 춘천·가평·지평 일대에서 의병항전을 전개하다가 화천군 사내면에서 8백여 명의 독립의군부대를 편성하였다. 관찰부 소재지인 춘천으로 진입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가평군수 염규환 등 10여 명을 회유한 후, 경기 강원의 도계이며 춘천 가평의 군계인 싸리재를 넘어 춘천군 서면 방동에 대장소를 설치하는 동시에 380명의 의병으로 포진하였다. 일본군의 예상지 못한 경로의 급습에 지용기 의병부대는 낭패를 당하였으며 방동 뒤쪽 골짜기로 후퇴를 한 후 대오를 가다듬었으나 바로 추격해 온 일본군과 방동과 사기막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신식무기에 의세가 꺾인 지용기 의병부대는 2시간 전투 끝에 지용기 의병대장 외 14명이 전사하고 생포되거나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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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순 유적지
윤희순(1860~1935)은 한국 최초의 여성 의병 지도자이면서 독립운동가로 유제원의 아내이다. 군자금 모금 및 무기와 탄환을 제조‧공급하는 탄약 제조소 운영, 여성 30여 명으로 구성된 여성의병대 조직, 〈안사람 의병가〉 등 8편의 의병가 작사·작곡 및, 4편의 경고문 제작·배포 등 여성들의 의병 활동을 이끌어내는 데 적극 앞장섰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조선독립단에서 활동하였고, 또한 노학당이라는 학교를 세워 항일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운동에 전력을 다했다. 윤희순은 장남 유돈상이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한지 11일 만인 1935년 8월 1일(음)에 서거하였으며, 중국 요녕성 해성시 묘관둔 북산에 안장되었다. 사후 59년 만에 손자 유연익에 의해 발굴된 유해는 1994년 10월 17일 고국으로 봉환되었으며, 10월 20일 춘천시 남면 관천리 고흥유씨 선영에 남편 유제원과 합폄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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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억 추모비
남궁억(1863~1939)은 1884년에 최초의 영어학교인 동문학 수료 후, 고종황제의 통역관에 임명되었다. 1893년에는 내부 토목국장으로 임명되어 종로와 정동 일대 도로를 정비하고 파고다공원(현, 탑골공원)을 세웠다. 1896년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였고 1898년에는 나수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였으며, 1907년 양양의 현산학교를 설립해 구국교육을 펼쳤다. 또한 같은 해 대한협회를 창립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홍천군 서면 모곡리로 낙향하여 1919년에 모곡학교를 설립해 역사교육과 무궁화 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11월 기독교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인 십자당이 발각되어 일제의 감옥에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 병고에 시달리다가 1939년 서거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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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응 묘
이진응(1847~1896)은 춘천 남면 하방곡리(현, 강촌리) 출신이자 이소응의 종형으로,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1896년 1월 습재 이소응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거의하였다. 춘천의병대장 이소응은 각지에 격문을 보내 의병에 나설 것을 촉구하고, 춘천 관찰사 겸 선유사인 조인승을 처단하였다. 이후 서울 방면으로 진격하여 가평 부근 벌업산 전투에서 관군과 혈전을 벌였으나 관군에 의해 춘천의진이 패하자 이소응 의병장은 병력 증강을 위해서 경기도 지평 감역으로 있던 맹영재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2월 17일 이소응은 결국 제천에 있는 유인석의 의진에 합류하였다. 종제인 이소응이 지평으로 떠난 후 이진응은 춘천의진을 이어받아 의병 활동을 하던 중 2월 8일 현 춘천시 약사동에서 관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이진응의 사후에는 그의 동생 이경응이 이진응의 의병을 이어받아 싸웠으나 패하고, 남은 의병을 이끌고 강릉의진 민용호에게로 갔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