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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론 독립만세기념비
1919년 3월 27일 원주 노림리의 노림의숙(魯林義塾) 교사 홍남표, 어수갑의 영향을 받아 한범우, 한돈우, 한민우, 한태우, 김성수, 정현기, 김일수 등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고, 3월 말 이근원, 정우진, 이근성 등 배재학당(培材學堂) 학생들이 법천리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했으나 광고문이 사전에 발각돼 미수에 그쳤다. 4월 8일 표광천, 지천복 등의 주도로 주민 수십여 명이 참여한 봉화 시위가 법천리에서 전개됐다. 법천리 봉화 시위는 이틀 후 손곡리로 이어져 11일 밤 김복기, 정완용, 이재관, 이은교 등의 주도 아래 주민 수십여 명이 참여한 봉화시위가 연속적으로 전개됐다. 이를 계기로 원주권 전역에 만세운동의 불씨를 일으키게 되었다. 『부론독립만세운동기념비』는 부론면의 항일독립운동사와 항일독립만세운동사에 대한 내용과 함께, 노림리, 법천리, 손곡리 출신의 부론독립만세운동 유공자 16인의 명단이 오석에 새겨져 있다. 자주독립을 외쳤던 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2008년 11월 17일 원주시에서 건립하였으며, 부론면사무소 앞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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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기악 사적비
한기악(1898 - 1941)은 강원도 원주군 부론면 흥호리 출신으로, 언론인, 교육자, 독립운동가였다. 중앙학교와 보성전문 졸업 후, 1919년 일본 동경에서 기독청년회 회원으로 있으면서 3·1독립운동시 독립선언서를 각계에 배포하는 등 활약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수립 및 법무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초 귀국하여 동아일보 창간에 참여 및 시대일보 편집국장, 조선물산장려회 이사회에서 선전부 이사, 민립대학 기성회를 조직하여 대학 건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초에는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해체될 때까지 활발한 구국운동을 벌였다. 1928년부터 4년 간 조선일보사 편집국장으로 언론을 통한 민족계몽을 위해서 노력하였으며, 1935년부터는 중앙고보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41년 6월 20일 학교 사택에서 별세하였다. 사적비는 일석 이희승이 글을 썼고, 철농 이기우가 글씨를 새겼다. 월봉 한기악 선생 사적비 건립위원회에서 1981년 6월 20일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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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초면 독립만세 기념비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만세운동은 3월 20일 천도교구장 최종하와 천도교인을 비롯한 지역 면민들이 횡성과 소초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월 27일 장꾼으로 가장하여 횡성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격렬한 시위행진을 주도하며 선봉에 섰던 강만형이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4월 1일 횡성읍내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서 강달회와 하영현이 일제의 발포에 피살된 것이 도화선이 됐다. 피살 소식이 전해지면서 구한말 의병으로 활약하다 둔둔리에 숨어 살며 서당 훈장을 하던 박영하와 평장리, 신현철 등이 주축이 되어 4월 5일 부채고개에 집결한 600여 명이 소초면 사무소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했다.『소초면 독립만세기념비』는 소초면의 독립만세운동의 배경과 소초면 독립만세운동 약사에 대한 내용과 함께, 소초면 출신의 독립만세운동 유공자 34인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자주독립을 외쳤던 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2006년 4월 5일 건립하였으며, 소초면 사무소 앞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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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의병 봉기기념탑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안창리는 일제의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에 항거하여 1896년 1월 12일(을미년 11월 28일)에 이춘영·안승우·김백선 등이 의병을 일으킨 곳으로, 을미의병 봉기의 거사지임을 기념하고 애국충정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열들의 고귀한 정신을 높이 선양하기 위해 2002년 1월 12일 원주시에서 「을미의병 봉기 기념탑」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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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찬 추모비
이은찬(1878 - 1909)은 원주 부흥사면(현, 판부면) 출신의 한말 의병장으로, 1907년 8월 1일 일제에 의해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9월 원주에서 해산군인 등 500명의 의병을 모은 뒤 경북 문경의 이인영을 찾아가 총대장으로 추대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의 의병 모집에 진력하여 경기도 양주로 집결한 의병들이 13도창의대진소(13道倡義大陣所)를 편성하고 서울 공략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같은 해 12월 소속부대원과 함께 임진강 유역에서 활약하던 허위를 총대장으로 추대하여 크게 위세를 떨쳤다.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만주 간도지방으로 항일운동의 거점을 옮겨 군사를 양성하고자 하였으나 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일본 밀정에 의해 1909년 3월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 해 6월 27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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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 부조
김영학(1877 - 1932)은 3·1독립운동 당시 양양(襄陽)의 기독교회 목사로서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으며, 동년 10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지부(支部)로서 양양군단(襄陽郡團)을 결성하고 군단장(郡團長)으로 활약하며 조직확대에 힘을 쏟았다. 1920년 1월 강원도단의 조직이 발각되어 일경에 붙잡혀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그는 국외로 나아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 1922년 9월에 노령(露領) 해삼위(海蔘威) 방면의 선교사로 자원하여 노령 지역에서 선교사업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가 1929년 소련 공산당에 붙잡혀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시베리아에 복역 중 1933년 옥중에서 별세했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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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신사 추모비
해월 최시형(1827~1898)은 조선 말 동학의 제2대 교주로서 일찍이 고아가 되어 조지소에서 일하다가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의 후임으로 제2대 교주가 되었다. 동학이 탄압받던 시기에 관헌의 눈을 피해 포교에 힘썼고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의 동학 경전을 발간했다. 동학의 육임제(六任制) 조직 확립 및 전국에 육임소를 설치하는 한편 1893년 이후 교조 신원 운동에 전력했는데, 당시 교조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 아래 추진되던 시위운동에 일체의 폭력사용을 금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94년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했고, 동학군의 재기포(再起包) 때 북접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령, 1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여 남접군에 합세했다.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의 혼성군에게 연패하자 영동, 청주로 피신했다가 1898년 원주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6월 2일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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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수 묘
김인수(1899 - 1961)는 충북 괴산(槐山) 사람으로. 1919년 3월 19일 괴산장터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3월 24일 괴산장날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괴산읍 장날인 3월 19일에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대열에 참가하였는데, 경찰대가 출동하여 붙잡혔으나 면서기의 신분이었기에 훈방되었다. 이후 그는 구창회 등과 함께 거사를 의논하는 데 참가하였고, 3월 24일 약 7백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며 만세운동을 전개하던 중 홍성희가 괴산경찰서로 연행되자 모자를 휘두르며 시위군중을 이끌고 경찰서로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다 붙잡혀 1919년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27년 6월 신간회(新幹會) 경성지회 간사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200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김인수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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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연 묘
이두연(1881 - 1949)은 강원도 횡성(橫城) 사람으로, 1919년 4월 12일 횡성군 서원면 분일리에서 송병창 집에 모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주민 70여명을 규합하여 봉화를 올리며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에 의해서 붙잡혔다. 이해 5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된 이두연의 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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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우 묘
이종우(1880 - 1951)는 강원도 횡성(橫城) 사람으로, 1919년 4월 12일 횡성군 서원면 분일리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하여 주민 50여 명을 규합, 봉화를 올린 후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행진을 벌이다가, 일경의 무력탄압에 의해 시위가 중지되었으며, 다른 동료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혔다. 같은 해 5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92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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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기념비
1919년 3월 1일을 기해 전국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던바, 원주시 매호리에서도 애국심에 불타는 선열들이 선봉이 되어 1919년 4월 12일 밤 9시경 주민 50여 명이 향산 뒷산에 올라 궐기를 시작하였으니 순식간에 온 주민 200여 명이 합세하여 수동, 상촌, 조항을 거쳐 섬강까지 돌진하여 만세운동을 펼쳐 상실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민들 중 일본헌병에 체포되어 송병기는 10월, 성태현와 박민희는 8월, 유정근은 7월, 이두연·이종우·이정헌·김옥봉은 각각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러한 매호리 주민들이 독립운동에 기여한 역사적 사실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매호리 노인회에서 1989년 3월 1일에 기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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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업 기미독립만세 기념비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에서는 1919년(기미년) 4월 9일 낮과 밤 2차례에 걸쳐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원현복·김상익·윤산악·이재손·원성규·김성관·이현순·홍대성·홍학성·함원동 등 주민 550여 명이 강인한 응집력으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낮에는 사제리 백사장에서, 밤에는 자감촌 뒷산 자지봉에서 일본사람을 쫒아내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미독립만세기념비』는 1919년 4월 9일 기미년 흥업 독립만세운동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90년 4월 4일 흥업면민 일동이 건립하여 흥업초등학교에 세웠으며, 2005년 10월 5일 한라대학교 교정으로 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