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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천 지단
박광천(1853~1910)은 경기도 양평 사람이다. 1907년 8월경 의병장 김상진(金相鎭)의 부하가 되어 강원도 홍천군 동신대 동은교동에서 활동하던 중에 친일 밀고자를 처단한 후 붙잡혔다. 그후 1909년 11월 2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소위 강도 및 살인죄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항고하였으나 동년 12월 23일 경성공소원과 1910년 1월 27일 고등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교수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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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복 지단
이재복(1881~미상)은 이정숙(李正肅)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같은 해 8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륵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재복은 이같은 시기인 1908년 3월부터 같은 해 7월까지 이정숙 의진에 투신하여 활약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강원도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일본수비대와 총 4회의 전투를 수행하는 등 치열한 반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붙잡혀 1908년 9월 1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유형 7년을 받아 고초를 겪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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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상필 묘
나상필(1884~1940)은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내 군자금 모금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음력 7월경 서울 창성동에서 임시정부로부터 밀파된 요원 정상섭(鄭祥燮)을 만나 군자금 모집방법을 협의하였다. 그 결과 충남 논산으로 내려가 그 곳에 있던 윤교병(尹喬炳)과 함께 군자금 모집방안을 상의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논산군 노성면 병사리의 윤교병과 합류한 뒤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1919년 음력 11월경 윤교병과 함께 논산군 논산면에 거주하는 윤일병(尹一炳)으로부터 100원을 모금하였고, 1920년 3·4월에도 2회에 걸쳐 역시 윤일병으로부터 260원을 모금하였다. 1920년 음력 4·5월경에는 윤교병과 함께 논산군 노성면 죽촌리 거주 윤임중(尹任重)으로부터 350원을 모금하였다. 이어 같은 해 음력 6월경 윤교병과 함께 경북 봉화군 법전면 척곡리의 강창문(姜聞昌)을 찾아가 이시영(李始榮)이 임시정부에 합류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있는 사실을 알리고 군자금을 요청하여 그로부터 40원을 모금하였다. 같은 해 7월경에는 윤교병과 함께 충남 보령군 미산면 용수리의 이시우(李是雨)로부터 40원을 모금하는 등 1919년 말부터 1920년 7월까지 전후 6회에 걸쳐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경성지방법원에서 1921년 10월 28일 소위 제령 7호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4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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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치서 묘
차치서는 양평의병에 참여한 의병이다. 김백선, 안승우, 이춘영은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양평의병 중에는 대를 이은 의병 가문이 눈에 띄는데 연안차시 가문의 차치서는 그의 조부, 아버지와 함께 양평의병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흥안씨의 안종응, 안승우, 안기병 역시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양평 을미의병은 을미의병 중에서도 양평에서 일어난 의병이다.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마을은 안종응, 안승우, 안기영 3대가 출생하여 세거한 곳으로 을미의병의 발상지이다. 당시 양동은 지평현 상동면이었으므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이춘영과 김백선은 현재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 안승우 생가에서 안종응과 함께 양평의병을 창의하기로 하고, 안창에서 최초 의병이 집결하여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원주, 충주성 등을 점령하며 위세를 떨쳤다. 양평 을미의병(지평의병) 발상지 사이실마을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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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현 묘
전석현(1884~미상)은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전국적인 독립만세시위가 발발했다는 소식은 양평군에도 전해졌다. 용문면 광탄리, 강하면 면사무소 앞, 양서면 면사무소, 고읍면, 청운면 용두리 시장, 양근읍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각 지역에서 시위가 발발했다는 정보를 들은 전석현과 이종성(李鍾聲)은 양동면에서도 속히 의거할 것을 결의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각 부락에 배포하는 동시에 많은 동지를 규합하였다. 미리 약속했던 1919년 4월 7일에 양동면사무소 앞에 많은 군중이 모였고 이날은 때마침 석실리 양동장날이라 장사꾼과 합세하였다. 전석현은 선두에 서서 선언문을 낭독하고 이종성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니 군중은 일제히 호응하였다. 군중은 시가지를 돌며 시위하고 양평읍내로 향하였다. 시위대가 각 부락을 지날 때마다 남녀노소가 문 앞에서 손을 흔들며 만세를 따라 불렀다. 그 때 용두리 헌병대가 양평으로 연락하여 불시에 기마헌병대 수십 명이 들이닥쳤다. 일사불란한 시위대가 계속 만세를 부르고 행진하니 일병이 총을 쏘아 사상자가 많이 났다. 군중은 목적지인 양평을 가지 못하고 전석현과 이종성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전석현은 6월 24일 경성지방법원 여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받았다. 그는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4월 24일 출옥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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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종엽 묘
김백선, 안승우, 이춘영은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다. 이때 안종엽은 물자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07년 13도 창의군이 창설될 때 역시 물심양면으로 협조했다. 1908년 귀가 도중 친일패당으로 추정되는 자객으로 인해 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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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덕 묘
김백선은 1895년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격분하여 지평 포수 400여 명을 설득하여 1895년 음력 11월 28일 원주 안창리에서 지평의병(을미의병)을 창의하였는데, 이때 김백선과 가까웠던 김진덕은 그와 함께 창의 출병하기로 한다. 김진덕은 친제 4명을 비롯하여 종제 10여명을 모아 출병에 참여하도록 설득했다.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양평 을미의병은 을미의병 중에서도 양평에서 일어난 의병이다.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는 을미의병의 발상지이다. 당시 양동은 지평현 상동면이었으므로 ‘지평의병’이라고도 한다. 이춘영과 김백선은 현재 양동면 석곡리 사이실 안승우 생가에서 안종응과 함께 양평의병을 창의하기로 하고, 안창에서 최초 의병이 집결하여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원주, 충주성 등을 점령하며 위세를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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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문 묘
을미의병은 조선 말기 최초의 대규모 항일의병이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왕후폐위조칙이 발표되자 유생들은 폐위조처에 반대하고 일본군을 토벌·구축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단발령 시행이 더해지자 일반 백성들까지 반일·반정부 항쟁에 나서서 친일파를 처단하고 관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지방의 유력 유생 중심으로 구성된 의병대의 규모는 지역별로 수천에서 수만 명에 달했고 서울·경기 지역에서 시작된 의병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내각이 친러파로 교체되고 단발령 철폐와 미납 공세 탕감 조처가 내려지면서 점차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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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세열 묘
유세열 여주 이천 지역에서 항일의병 투쟁을 이끈 의병대장이었다. 일본군의 허점을 찌르며 의병활동을 이어가던 그에게 화난 일본군은 그의 집에 방화를 일으키기도 했다. 그 후 그는 고향을 떠나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상계리로 거처를 옮겼다.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지라도 그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같은 의병활동을 하던 최익현, 이강년 등과 항일 의거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일본 관헌에게 붙잡힌 그는 심한 고문을 받고 풀려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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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희 묘
최동희(1890~1927)는 서울 종로 사람이다. 천도교 제2세 교주인 해월 최시형(崔時亨)의 아들이다. 1919년 이채우(李采雨)·김영순(金永淳) 등과 함께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천도교 의정회 혁신파에 소속되었다가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7월에는 천도교 중심의 고려혁명위원회를 조직하여 부위원장 겸 외교부장으로서 이종훈(李鍾勳)·홍병기(洪秉箕)·송 헌(宋憲)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김광희(金光熙)·강도희(姜道熙) 등과 함께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갔다. 1926년 4월 5일에는 길림에서 양기탁(梁起鐸)·현정경(玄正卿)·오동진(吳東振)·곽종대(郭鍾大)등과 천도교 혁신파인 김봉국(金鳳國)·이동구(李東求)·송 헌(宋憲) 그리고 노령에서 온 그를 비롯하여 이규풍(李奎豊)·주진수(朱鎭秀) 등과 혁명원로들이 독립투쟁을 결의하고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게 되자 그는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1927년 1월 26일 지병이 악화되어 중국 상해 적십자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영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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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우 묘
심상우는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유촌리에서 출생했다. 당시 일본이 운영하는 보통학교(마전공립학교)는 다닐 수 없다며 입학을 거부하고 마전향교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왕산 허위선생의 격문을 보고 선생의 휘하로 들어가 의병부대 제3분견대(파견대)장의 임무를 맡아서 관공서 습격 등 크고 작은 전투를 벌였다. 1908년 10월 15일 백석리 가루재(하우고개 주변 현 중앙추모공원 자리)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바위틈에서 일본군의 흉탄에 맞아 전사했다. 심상우 의병장의 시신은 당시 일제 감시의 눈을 피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으로 묘를 정했으며 전사 당시 26세로 미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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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삼현 묘
최삼현(1890~1953)는 후손들의 증언에 따르면 충북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잔갈, 일명 ‘흐느실’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어떻게 의병 활동에 가담하게 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최 지사의 친척과 절친했던 박순종 씨에 의하면 5년여 간 의병활동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순종 씨가 도장까지 찍어가며 1983년 작성한 진술서를 보면 “자네들은(최씨의 형제자매 지칭)는 우리가 아니면 태어나지도 못했다. 최 지사가 의병활동을 하다가 일본놈들에게 쫓겨 우리 집에 왔을 때 광안에 빈독을 엎어 그 곳에 다섯 달이나 피신시켜 줬다. ‘의병을 숨겨주다 들키면 징역가니 더 이상 피해를 줄 수 없다’며 (최 지사가)스스로 떠났다”고 전했다. 몇 해에 걸친 도피생활 끝에 최 지사는 의병 동료 2명과 함께 1912년 용인으로 숨어들어와 인근 동네 부잣집으로 흩어져 정착을 했다. 최 지사는 가창리 학자골 안씨댁에 밥만 먹여주는 조건으로 농사일을 하게 됐고 20대 중반 이웃 김씨 집 데릴사위로 결혼을 했다. 의병들의 삶이 대개 그러했듯이 최 지사도 결혼 후 5남 2녀를 두고 해방될 때까지 ‘최돌산’이라는 가명으로 과거 의병 활동 행적을 철저히 숨기고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