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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상징조형물
경상북도독립기념관 내에는 3.1운동 및 임시정부 100주년 상징조형물 밖에도 다양한 시설이 함께 위치해 있다. 2002년에 안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로 발기하여 2007년 개관한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의 설립 목적은 경북독립운동사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 조사‧연구, 전시, 교육함으로써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켜온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정신을 계승하고 민족문화의 정체성 확립 및 올바른 국가관을 정립하는데 이바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설립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안동은 유교문화권의 핵심지역으로 선비정신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곳이며, 퇴계 학맥의 정통을 계승한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수 많은 유학자들이 국난 극복을 위해 노력한 결과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 및 자정순국자를 배출한 곳이다. 살아있는 유교문화와 경상북도 독립운동 역사를 교육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배우는 21세기 국민정신의 교육장으로 발돋움하고자 안동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을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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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의성경찰서
이곳은 일제강점기 의성경찰서가 있었던 곳이다. 3.1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의성농우회를 조직하여 농촌 계몽 운동으로 민족 독립의 방안을 모색한 농촌 계몽가 등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은 의성경찰서에서 갖은 고문과 수난을 당하였다.특히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평양에서 의성으로 압송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끝까지 일제에 저항했던 주기철 목사, 의성 춘산면 지역 목회 중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순교한 권중하 전도사 등이 이곳에서 박해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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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 순국지
김태원(1870~1908)은 대한제국기 전남 장성의 호남창의회맹소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의병장이다. 별명은 김준(金準) 또는 김참봉, 자는 태원(泰元), 호는 죽봉(竹峰)이며 의병장 김율(金聿)의 형이다. 순릉참봉(順陵參奉)을 지내다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에 투신하였다. 그러나 동학군의 행태에 실망한 김태원은 잠시 수원에 옮겨 살다가 귀향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김태원은 고을 아전들의 탐학을 바로잡기 위해 관찰사에게 호소하여 이를 해결하여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906년 동생 김율과 호남에서 의병을 일으켜 고창·영광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듬해 기삼연(奇參衍)의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에 가담하여 선봉장이 되어 나주·함평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1월 김율과 합진, 동복(同福) 무동산(舞童山)에서 요시다[吉田勝三郎] 기병부대 150명과 접전, 요시다의 목을 베었다. 이때 담양 추월산성(秋月山城)에서 총상을 치료중이던 기삼연이 붙잡혀 광주에서 총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호남의소(호남의소)라고 부대이름을 바꾸어 일진회원, 밀정, 자율단원 등을 처단하였으며, 납세거부투쟁을 유도하였다. 1908년 5월 장성(長城) 토물[土泉] 뒷산에 성을 쌓고 전투를 벌였으며 광주 어등산(魚登山)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정부는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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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 기념비
최흥종(1880~1966)은 광주(光州) 사람으로, 오방은 그의 호이다. 1919년 3월 2일 광주에서 서울에 상경하여 3월 5일에 일어난 학생단체의 제2의 독립만세시위에 찬동하고 동일 8시경 남대문(南大門) 역전에서 벌어진 대시위에 참가하여 시위하던 중 인력거에 올라서서 〈신조선신보(新朝鮮新報)〉와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인쇄물을 배포하고 대한문(大漢門) 앞에서는 인력거에 올라서서 조선독립이라 쓴 대형 태극기를 높이 흔들어 시위군중을 선도하며 지휘하다가 붙잡혔다. 이로 인하여 1919년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1920년 2월 2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0년 9월 1일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의 광주지회장을 역임하였고, 1927년 10월 29일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장을 역임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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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남산교회
대구남산교회 내에는 여러 독립운동 사적이 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쁜 소식을 널리 알렸던 남산교회의 종과 더불어,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한 백남채 장로, 김태련 장로, 김용해 성도, 이만집 목사의 부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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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욱 집(윤동주 유고 보존)
전라남도 광양에 있는 정병욱의 집이다. 이곳은 윤동주 시인의 원고를 해방 후까지 보관하였던 곳이다. <서시>, <별헤는 밤> 등의 시를 발표하며 항일 정신을 고취하였던 윤동주(1917~1945)는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그의 원고를 친우인 정병욱(1922~1982)에게 맡겨 이곳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1944년 1월, 태평양전쟁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일제는 조선인 청년 학도들까지 전쟁터로 내몰았고 이때 군에 징집되는 정병욱은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유고 보존을 부탁하였다. 집의 나무 마루 밑에 원고를 보관하고 다른 물건을 올려두어 원고를 은닉하였다가 마침내 광복 후 1948년 시집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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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율성 집
정율성(1914~1976)은 전라남도 화순군에 거주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이다. 부친을 따라 1917년 광주에서 화순으로 이주하였고, 1922년 능주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4년 다시 광주로 이주하면서 숭일소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졸업하였다. 이듬해 전주 신흥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33년 의열단 호남 지역 모집책인 셋째형 정의은(鄭義恩)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갔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항일 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여러 독립운동을 펼쳤고 난징과 상하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첩보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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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유적지
1889년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하였다. 집안은 부유한 명문대가 였으며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 1905년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 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 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다. 1915년 비밀결사 조직 대한광복회에 가입했고, 1916년에는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도 활동하였다. 1917년 대한광복회의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었으나, 예심에서 면소판정으로 석방되었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대한광복회 조직이 와해되면서 체포 위기에 처했으나 만주에 있어 체포는 면했다. 그 해 12월 무오(戊午)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汪淸縣]에 두고 5분단(分團)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 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羅仲昭:참모총장)·박영희(朴英熙:부관)·이범석(李範奭: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白雲坪)·천수평(泉水坪)·마록구(馬鹿溝)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 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 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黑龍江]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崔振東) 등과 연합하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 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 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 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 김봉환(金鳳煥)의 감언이설에 빠진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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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흥 집
김규흥(1872~1936)은 충북 옥천(沃川) 사람이다. 1919년 임시정부의 파견원으로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0년대 초 북경에서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을 세우며 무장투쟁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1908년 중국으로 망명한 그는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임시정부에 참가하였으며, 한국 독립을 위해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던 김규식을 지원하고자 파리로 파견되었다. 그는 파리에서 김규식 등과 함께 한국의 독립문제를 국제사회에서 보장받기 위해 힘을 쏟았으나, 열강의 외면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파리강화회의 이후 중국에 돌아온 그는 북경을 활동 무대로 삼아 박용만(朴容萬) 등과 함께 무장투쟁노선에 입각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무장투쟁방략을 추진한 군사통일회의를 주도하던 박용만 등은 대조선국민군(大朝鮮國民軍)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나, 이를 위해서는 자금의 확보가 필요한 일이었다. 김규흥은 그와같은 무장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1921년 박용만과 함께 흥화실업은행(興華實業銀行)을 설립하였다. 흥화실업은행은 겉으로는 금융기관을 표방하였으나, 실은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방편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이들은 주식금 모집을 위장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모집된 자금으로 이들은 북경과 만주지역에 토지를 구입하는 한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을 불러모아 경작케 하면서 농한기에는 훈련을 실시하여 점차 각 군사단체를 통일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923년 대규모의 주식금 모집 계획이 뜻과 같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한인사회의 건설 및 군사양성의 계획을 달성하지는 못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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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규 순교비
최인규 권사(1881~1942)는 강원도 삼척군 북삼면(현 동해시)에서 태어났다. 마흔 살이 된 1920년, 마을에 찾아온 서양인 선교사의 헌신에 감동을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최인규 권사는 1933년 당시 교역자가 없었던 천곡교회를 이끌기 위하여 가족과 함께 샘실마을(천곡동)로 이주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가 오자, 최인규 권사와 천곡교회 사람들은 ‘신사참배는 곧 우상숭배’라며 신사참배에 동참하지 않았다. 감리교단은 이미 신사참배를 국가의식으로 인정해 받아들였지만 그는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신사참배는 물론 창씨개명과 동방요배 등 일제의 모든 압박을 거부하며 믿음을 지켰다. 결국 최인규 권사는 신사참배 거부 주동자로 몰려 1940년 5월 구속되었다. 온갖 고문에도 굴하지 않자 일제는 그에게 창피를 주기 위해 똥지게를 지고 마을을 돌게 하였으나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는 그의 신념은 바뀌지 않았다. 함흥에서 열린 재판에서도 최인규 권사는 “신사참배는 절대 할 수 없다. 예수를 박해하던 로마도 망했다. 일본도 회개하지 않으면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고 호통을 쳤고, 결국 2년형을 받았다. 1941년 사상범을 수감하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고, 이곳에서도 끈질긴 회유가 이어졌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같이 수감되어 있던 어느 목사가 “일단 신사참배하겠다고 말하고 나가라”고 조언하자 최 권사는 ”당신이 목사인 줄 알았는데...“라며 돌아앉아 다시는 마주보지 않을 정도로 확고한 믿음을 지켰다. 결국 계속되는 고문에 1942년 12월 16일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천곡교회는 1943년 최인규 권사가 순교한 후 일제의 강압과 주민들의 이주 등으로 인해 문을 닫았다. 대전 인근 야산에 가매장되었던 최인규 권사의 유해는 해방 후에야 친척의 손에 의해 고향으로 옮겨질 수 있었다. 1947년 3월에는 삼척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인 삼척제일교회 마당에 인근 7개 지역 교회가 함께 순교기념비를 세웠다. 또 1986년 11월에는 최인규 권사의 유해를 새로 복원한 천곡교회 마당으로 옮겼고, 순교기념비를 새로 세웠다. 최인규 권사의 순교기념비는 삼척제일교회와 천곡교회 두 곳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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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묵 묘
횡성의 만세시위는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3월 27일 횡성 장날에 신경묵을 포함한 천도교인들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으나 주도인물 12명이 검거되면서 끝났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다시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천도교인이 계획을 추진하였지만, 횡성청년회 윤태환(尹泰煥)과 횡성감리교회 정해경(鄭海景)도 참여하였다. 횡성군수가 직접 면사무소에서 폭동에 대비하라는 훈시까지 하는 등 일제 관헌의 대비가 엄중한 가운데 4월 1일 천도교인들은 횡성의 길목을 지키고 상점을 미리 폐쇄하였다. 원주 소초면 둔둔리 천도교인인 하영현(河永賢)과 강사문(姜士文) 등이 주민을 인솔하여 횡성으로 왔다. 4월 1일 횡성 장터에 모인 1,300여 명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몽둥이·돌·장작으로 문을 닫지 않은 상점, 관공서 앞의 광고판, 군청의 건물 등을 파괴하며 무력시위를 펼쳤다. 그러나 일제 관헌들은 시위에 미리 대비해 관공서의 중요 문서를 숨겼으며 직원들도 오후에 모두 도망쳤다. 시위가 진행되던 중 일본헌병 상등병인 고지마[小島了]가 말을 타고 거리에 나타났다. 군중은 헌병을 보자 격분하였다. 최동수(崔東壽)가 그를 말에서 끌어내려 밟고 때렸다. 이 때 총소리가 울리자 군중의 움직임은 일단 멎었다. 저녁 무렵에 다시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분견소로 향하였다. 헌병들이 원주로부터 출동한 일제보병의 지원을 받고 뒷산에 매복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군중의 선두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일제의 총격으로 법주리 강승문, 둔둔리의 하영현·강달회 등 5명이 즉사하고, 8명 이상이 부상당하였다. 4월 2일에도 만세시위를 계속 전개하며 검거된 자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일제는 4월 2일부터 시위 주도자를 검거하여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 가혹한 고문과 태형 등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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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화지 묘
박화지(미상~1907)는 춘천 남면 후동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 정미의병 당시 류홍석, 유영석, 유제곤, 바선명 등과 함께 의병 활동을 하였다. 이때 맡은 역할은 의병 소모장 이었다. 의병 소모장은 의병들을 모으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류홍석을 비롯한 춘천의병은 약 60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은 6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신동면 증리 진병산과 가평 주길리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이 싸움에서 의병장 유영석이 전사하는 등 패전을 했다. 이에 류홍석 의병진이 패하자 박화지는 집에 돌아와 숨어 지냈다. 이때 일본인들이 박화지를 잡으려고 후동리 마을을 급습해서 주민들을 모아놓고 “의병들이 숨어있는 곳과 박화지가 있는 곳을 알려주지 않으면 모두 죽이겠다.” 고 협박을 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박화지는 “내가 나가 죽으면 주민 모두가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하며 동리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왜적 앞에 나타나 체포되었다. 그는 갖은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의기를 지키다가 끝내 일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