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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우조 어록비
양우조 어록비는 1940년 가을에 쓴 <나의 가진 민족주의>라는 제목의 어록을 새겨놓았으며, 뒷면에는 양우조 약력이 새겨져있다. 양우조(1897 - 1964)의 호는 소벽, 이칭은 양묵, 양명진이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 광복군 총사령부 참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5년 상해로 망명했다가 1916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가 재미대한인국민회에 가입, 활동하였다. 1921년에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 안창호(安昌浩)의 가르침을 따랐다. 1929년 다시 상해로 건너와 안창호·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화남(華南) 및 남양군도(南洋群島) 시찰특파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혁신사(革新社)를 창립해 문화사업도 전개하였다. 1931년 임시의정원의원 중국대표로 선임되었으며, 1932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부의 화남특파원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군자금 조달에 힘썼다. 1936년에는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중앙위원이 되었다. 1937년 10월 쓰촨성[四川省] 치장[綦江]에서 국무원(國務員)을 개선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회를 특설하자 선전위원이 되었다. 1937년 한국독립당 중앙조직부장·훈련부장을 역임하였다. 1941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생계부(生計部) 차장에 취임해 교포의 생활과 지위 향상을 도모하였다. 광복군이 결성되었을 때에는 총사령부 참사 겸 정훈처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발전에 기여하였다. 1942년 10월에는 임시의정원 예산결산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4년 충칭[重慶]한국인기독교청년회이사 겸 덕육지육부장(德育智育部長)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1946년 5월에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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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역사관 간토학살 100주년 추모비
관동대학살은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 때 일본 관헌과 민간인들이 한국인과 일본인 사회주의자를 학살한 사건이다. 1920년대 전반 일본은 하나의 큰 시대적 전환기에 직면하였다. 밖으로는 한국·중국의 민족해방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안으로는 공황으로 노동운동·농민운동·부락해방운동이 사회의 저변을 뒤흔들었다. 여기에 일본의 군부와 국가주의자들은 ‘과격사회운동취체법’ 제정을 시도하고, 이들 운동에 대한 탄압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일어난 대지진으로 민중이 공황 상태로 빠져 버리자, 일본 군부와 군국주의자들은 당면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기회라 여기고 민중의 보수적 감정을 이용하였다. 대지진이 일어난 직후인 1923년 9월 1일 정부에 출병을 요청함과 동시에 계엄령 선포를 준비하였다. 다음 날 동경과 가나가와현(神奈川縣)의 각 경찰서 및 경비대로 하여금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라는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뜨리도록 하는 한편 각 경찰서에 진상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폭동’의 전문을 준비해 2일 오후부터 3일 사이에 전국의 지방 장관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타이완총독부에도 타전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인 폭동’의 터무니없는 소문이 일본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가운데 2일 오후 6시 긴급 칙령으로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령은 처음 동경부와 인접 군에 선포되었으나, 3일에는 가나가와현, 4일에는 사이타마현(埼玉縣)과 지바현(千葉縣)에도 확대되었다. 이같은 계엄령 아래에서 군대·경찰을 중심으로, 또한 조선인 폭동의 단속령에 의해 각지에 조직된 자경단(自警團)에 의해 6천여 명의 조선인 및 일본인 사회주의자가 학살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시체조차 찾지 못하였다고 한다. 학살이 가장 먼저 행해진 동경과 가나가와현에서는 군대와 경찰이 중심이 되어 행해졌고, 지바·사이타마현 등지에서는 민족배외주의자를 중심으로 한 자경단에 의해 행해졌다. 이들 자경단은 죽창·일본도·곤봉·철봉 등을 들고 도망치는 한국인들을 붙잡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심지어 경무서내로 도망친 한국인들까지 쫓아 들어와 학살하였는데도 일본 관헌은 사실상 이를 방조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는 10월 20일 학살 사건의 보도 금지를 해제하였으나 그들은 군대·관헌의 학살은 모두 은폐하고, 그 책임을 자경단으로 돌리는 데만 급급하였다. 그 뒤 일부 자경단원은 형식상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으나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모두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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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호국인물 구조물
유관순(1902~1920)은 일제강점기 아우내 3·1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에 태어나 1920년에 사망했다.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나 1916년 선교사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을사늑약 이후 조국독립을 위한 기도회와 시국토론회·강연회 등에 적극 참여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붙잡혔으나 곧 석방되었다. 전국적으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으로 돌아와 서울 소식을 전한 후 4월 1일 병천시장에서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검거되어 투옥 중에도 옥중만세운동을 벌였고, 오랫동안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18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1947년 유관순 열사 기념사업회가 결성되었으며, 1951년 순국의열사 심사위원회에서 순국의열사로 선정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1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이동녕(1869~1940)은 천안 목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연안(延安), 호는 석오(石吾), 자는 봉소(鳳所)이다. 북간도 용정에 이상설 정순만 등과 같이 서전의숙을 설립하고 청소년 교육에 힘 썼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 이회영, 김구, 이동휘 등과 신민회를 조직하고 활약하였으며,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13년에는 남만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해삼위로 가서 이상설과 함께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1925년부터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내무총장, 국무총리, 국무위원 겸 주석을 역힘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한 후 반평생을 해외에서 임시정부를 이끌어 조국광복의 일념에 투쟁하던 그는 1940년 3월 13일 72세 때 사천성기강(四川省綦江)에서 과로로 영면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장(國葬)으로 장례를 치렀으며, 광복 후인 1948년 9월 22일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를 봉환 사회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병옥(1894~1960)은 충청남도 천안의 독립운동가, 교육자, 경찰관이자 정치가이다. 191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의 조직결성에 참여하였으며, 뉴욕 거주 동포들을 중심으로 한인회를 조직하고 총무를 맡아 독립운동의 진상을 미국에 알리는 등 외교활동에 힘썼다. 1927년 신간회의 결성에 참여하여 35명의 간사 중 일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으며 1929년 신간회 복대표위원회에서 교육부장과 경성지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에서는 이에 호응하여 민중대회를 개최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준비하던 중 조병옥을 비롯한 주요 간부들이 일경에 붙잡혀 그는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32년에 조선일보 전무 겸 영업국장을 맡아 민족언론의 육성에 힘썼으며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붙잡혀 2년간의 예심 끝에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아 풀려났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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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만 공적비
이상만(1884~1955)은 충청남도 홍성 사람이다. 1919년 3월 한국독립운동본부 지령으로 중국 북경에 파견되어 박정래(朴正來)·조두진(趙斗珍)·유장연(劉璋淵)·전재홍(田在弘)·유중한(柳重韓)·연병주(延秉柱)·최훈식(崔勳植) 등과 더불어 신대한동맹회를 조직하고 동 회장에는 박정래를 추대하였으며, 그는 동회 총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일원으로 여러 방면으로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임되어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1941년 9월 회계원 검사원으로 선임된 그는 이듬해 10월에는 회계검사원 검사관이 되었으며 임시의정원 의장이던 김붕준(金朋濬)의 탄핵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광복군의 행동준승(行動準繩) 9개항의 취소를 요구하는 등 조국의 광복을 위한 통일된 정국의 방향을 모색하는데 주력하였다. 1943년 5월에는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중앙감찰 위원에 선출되었다. 1944년 의정원회의에서 제5차 개헌을 단행하여 지도체제를 개편하게 되자 동년 6월에 그는 국무위원 겸 검사원장이 되어 활약하였으며, 1945년에는 화중구(華中區) 한교선무단장이 되었다. 1946년 임정 주화(駐華)대표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는 대만 한교협회 이사장으로 우리교포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안전 귀국 등의 제반 업무를 처리하다가 과로로 인하여 병을 얻고 1949년에 귀국하여 요양 중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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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진 공적비
권동진(1861~1947)은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천도교인이며, 서울에서 자랐다. 한에 함안군수와 육군참령을 역임하였고, 그 후 개화당에 들어가 혁신운동을 전개했으며,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때 일본으로 망명하였다가 천도교에 입교하여 도사가 되었다. 귀국 후 1919년 2월 상순경에 최남선(崔南善)과 최 린(崔麟)의 독립 선언서를 보고, 손병희(孫秉熙)·오세창(吳世昌)과 함께 그 취지에 적극 찬성하였다. 또한 일본제국주의의 무단정책을 비난하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민족자결주의를 적극적으로 지지·찬동하는 요지의 청원서와 파리강화회의의 참가국 위원들에게 제출할 의견서 초안을 검토하고 이에 찬동하였다. 그리고 손병희·오세창과 함께 천도교인의 대표로서 2월 25일부터 27일 사이에, 당시 천도교 기도회의 종료보고와 국장을 참배하기 위하여 상경한 천도교 도사 및 교인들에게 독립만세운동계획을 알리고, 민족대표로서 같이 서명할 것에 찬동을 구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지방에 거주하는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모였다. 그는 이 때 민족대표단의 1인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신간회의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계속 조국 광복과 민족 정신 앙양에 노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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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응 공적비
김용응(1869~1959) 1919년 4월 충청북도 괴산군에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려는 영남의 학생들에게 그 방법 등 편의에 대해 조언했다. 1925년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사회운동자동맹 발기준비위원회에 괴산을 대표한 발기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1927년 10월 23일 괴산청년회관에서 신간회 괴산지 발기회를 개최하고 설립을 준비작업을 맡았다. 11월 26일 열린 신간회 괴산지회 설립대회에서 지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2월 27일 괴산청년회 주최로 열린 ‘충청북도 사회운동자 간담회’의 좌장으로 회의를 이끌었다. 1928년 5월 13일 안철수(安喆洙) 등과 함께 괴산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열흘 동안 취조를 당한 후 24일 동지 8명과 함께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공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8월 6일 예심이 종결되면서 정운석과 함께 면소 처분을 받고 다음날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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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해 공적비
정주해(1892~1942)는 충북 괴산 사람이다. 1919년 3월 괴산에서 있었던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후 이청천(李靑天)부대에 참가하여 노령 이만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부터 1930년 5월초까지는 하얼빈도외(哈爾濱道外)에서 동성호(東省號)라는 여관을 경영하면서 독립운동의 연락처로서 활용하였으며, 동년 5월 1일 하얼빈일본영사관 습격사건에 관련되어 일경에 검거되었다. 1942년 11월에 대종교 하얼빈시 안평가(安平街)의 서무사원으로 일경의 대종교 탄압시 대종교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고문으로 죽을 지경에 처하여 가석방된지 5일만에 하얼빈시 안평가에서 영면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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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능식 공적비
송능식(1898~1963)은 충북 괴산 사람이다. 그는 1919년 3월 19일 이래 4월 2일까지 괴산군 괴산면, 청암면, 소수면 등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1919년 4월 2일 괴산군 소수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한 유해륜(柳海崙)·경권중(慶權重) 유지 등이 괴산군내의 괴산면·장연면·청천면 등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고무되어 추진되었다. 4월 2일 새벽 2시 경, 괴산군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가한 적이 있는 송능식의 주도로 시위군중 500여 명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옥현리의 면사무소를 습격하기 위해 몰려갔다. 그런데 사전에 이러한 정보가 새어나가 일경의 무력적 저지로 일단 중지되었다. 이날 밤 8시 경, 시위군중 300여 명은 다시 집결하여 면장집을 습격하고 각 동리를 돌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다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경은 그날 밤부터 대대적인 검속을 실시하여 주도자들을 체포하였다. 송능식은 이 일로 붙잡혀,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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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익 공적비
김상익 선생은 1910년 경술 한일합방으로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현직을 버리고 일가족을 이끌고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 용화리 늘티 장바위로 낙향하였다. 당시 이곳 일대가 항일의병 양성의 본거지로 총책을 맡은 한봉수 의병대장과 손잡고 슬하에 장남 世應, 차남 漢應, 3남 貞應, 4남 聲應, 5남 洛應 등 5형제와 함께 온 가족이 피복제조 세탁과 무기제작 수리 그리고 고향인 수리에 추수해 놓은 수백석의 양곡을 육마로 운반하여 군량으로 보급하고 밤에는 독립운동 낮에는 왜병에 약탈등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 수백석지기 재산을 소개하고 고향에 돌아와 호구지책에 급급하면서도 여생을 후회없이 마쳤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넷째 아들이신 김성응 선생이 독립유공자의 유족이며 독립유공자라 하여 충청북도 초대 내무부장에 취임한 바 있었으며, 6.25동란때 이로 인하여 납치되어 피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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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공적비
김태규(1896~1962)는 충북 괴산 사람이다. 그는 3·1독립운동 직후 국내에서 성립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재무부장으로 활동했다. 동단은 1919년 5월 조용주(趙鏞周)·연병호(延秉昊)·이병철(李秉徹) 등이 외교활동을 행동지침으로 표방하고 서울에서 결성한 것으로서, 본부인 중앙부를 서울에 두고 국내의 각처와 해외 조직으로 상해 지부를 설치하였는데, 중앙부의 부서 구성은 총무를 중심으로 외교부·재무부·편집부·외교원·외교특파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동단의 활동은 외교선전 활동과 관련된 외교원의 해외 파견 및 기관지 〈외교시보(外交時報)〉의 발간 등 선전물 간행이 주된 것으로서, 재무부장의 책임을 맡았던 그는 이같은 활동에 필요한 자금지원을 관장했다. 그러던 중 동년 10월에 그는 외교 연구를 목적으로 상해에 파견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임시정부 충북 괴산군 조사원으로 임명되었다. 이러한 임무를 띠고 국내에 다시 들어왔다가 동년 11월말 동단의 조직이 발각됨으로써 일경에 붙잡힌 그는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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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희 행적도
조명희(1894~1938)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출생했다. 호는 포석(抱石)이다. 1919년 12월 17일 조명희는 황석우(黃錫禹) 등이 조직된 의권단에 몸담았다. 의권단은 사회주의자와 연계를 맺어 재경친일자와 밀정 등을 징계할 것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희곡 작가, 연극운동가, 시인, 소설가로 창작 활동을 했다. 1928년 6월 5일 자신의 창작집 『낙동강(洛東江)』과 이기영의 작품집 『민촌(民村)』이 출판되자, 한국 최초로 창작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7월 27일에는 서울 공평동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회관에서 본 동맹의 경성지회 설립대회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항일과 카프 활동을 계속하자 일제의 그에 대한 탄압이 더욱 심해졌고 생활상의 곤란도 심하였다. 1928년 8월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인학교에서 교원이 되었다. 연해주에서 1928년 10월에 「짓밟힌 고려」라는 산문시를 발표했다. 「짓밟힌 고려」는 일제 식민지하에 한국인의 궁핍상과 민족의 비참상을 묘사했다. 항일투쟁과 계급투쟁을 통해서 계급해방의식을 형상화했다. 조명희는 연해주지역 학교에서 교원으로 한인 2세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한편, 소비에트 문사동맹의 회원으로도 활동했다. 1936년 6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국인 작가들의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었을 때, 매월 6일 1회 이들을 전문적으로 지도하였다. 9월 27일 하바로프스크에서도 문예크루소크가 창립되자 이곳에서도 문인들을 지도했다. 스탈린 대탄압이 시작되면서 1937년 9월 18일 일본 첩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1938년 4월 15일 사형 선고를 받았다. 5월 11일 하바로프스크에서 총살형을 당했다. 1956년 7월 20일 극동주 군법재판소에 의해 복권되었다. 조명희는 스탈린의 정치적 탄압으로 사형을 당하였지만, 연해주에서 문학을 통해 항일정신을 고취했다. 수많은 문학인을 길러낸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렸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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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삼순 묘
안삼순(1894~1941)은 강원도 춘천 사람이다.춘천 일대에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다 1907년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한 외삼촌 마정삼(馬正三)의 아들인 마도현(馬道賢)·마만봉(馬萬奉) 형제와 역시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1908년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한 박영관(朴永寬)의 아들 박순구(朴順九)가 장성한 뒤 서로 협력하여 부친의 원수를 갚고 일제 침략세력을 토멸키로 맹약하고 1921년 9월경부터 화승총과 사냥총으로 무장하여 홍천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이에 그의 형제인 안이순(安二淳)·안귀봉(安貴鳳)과 외사촌 마남룡(馬南龍), 사돈지간인 전봉학(全鳳學) 등이 그들과 뜻을 같이하여 잇달아 가담하면서 장총단(長銃團)을 구성하여 인제 가리산 을 본거지로 하고 홍천·춘천·인제·양구 등지를 무대로 전후 19회에 걸쳐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고, 일경을 사살 처치하며, 부호층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 또는 징수하는 등의 활동을 벌여 나가자, 그도 같이 가담하여 주로 군자금 모금을 위한 부호층의 자산상태 정보 수집, 행동대원에 대한 길 안내 등의 지원활동을 하였다.그러나 1927년 11월 일제 군경의 대규모 토벌작전으로 다른 단원들과 함께 붙잡혀, 1928년 10월 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